건물 자체가 통으로 발전소, 한국 스타트업의 획기적 기술
스타트업 취중잡담
‘공대 아름이’라는 말이 있었다. 공과대학 내 소수인 여학생을 일컫는 말이다. 우스갯소리로 나온 신조어지만 이를 뒤집어보면 주류 집단 내의 타자를 지칭하는 씁쓸한 배경을 갖고 있다.
공대 아름이는 이제 옛말이다. 숙명여대는 2016년 공과대학을 신설했다. 에이스인벤터의 정영수 대표(48)는 2017년 처음 개설된 숙대 기계시스템학부의 교수이자 창업가다. 그의 삶은 도전의 연속이었다. MIT 박사 과정을 밟기 위해 태어난 지 백일도 되지 않은 아이와 아내를 두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고, 인원 미달 우려가 있었던 여대 공대 교수로 임용됐다. 교수라는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현재 친환경 건축물에 적용할 수 있는 하이드로겔 기반 건물일체형 태양전지(BIPV)를 개발 중이다. 정 교수를 만나 친환경 건물에 볕드는 창업기를 들었다.
◇숙대 기계시스템공학부 1기 교수로 합류
정 교수는 연세대 기계공학부를 졸업하고 서울대 기계공학부에서 석사를 했다. 이후 삼성종합기술원에서 에너지 시스템 개발에 참여했다. 휴대폰이나 노트북에 들어가는 초소형 연료전지 시스템의 사용 시간을 늘리는 프로젝트였다. 3년 반 동안 좋은 팀장과 동료와 즐겁게 일했지만 도전의 필요성을 느꼈다. 석사 학위만으로는 커리어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2009년 세계적인 명문 공대 MIT에서 박사 과정을 밝기 위해 홀로 미국으로 떠났다. “MIT에서 전기장을 이용해서 나노입자를 코팅하는 기술과 하이드로겔 기반의 기능성 소재 개발을 주로 연구했습니다. 연구 실적은 좋았습니다. 유명 저널에 논문을 발표하면서 충실히 연구 용역을 쌓았죠. 물론 갈 길이 태산이었습니다. 미국의 박사 자격 시험은 악명이 높거든요. 그래서 시험 전까지 혼자 학업을 했습니다. 성공을 위해 고독한 시간을 보내야 했죠. 시험을 통과한 후 가족부터 불렀습니다. 동대학에서 박사 후 연구원 생활을 했죠. 남들은 그 과정이 가장 힘들고 어렵다고 하지만, 제게는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가족과 함께였으니까요.”
2017년, 숙대 기계시스템공학부가 설립될 때 교수로 임용됐다. “제 소식을 듣고 주변에서 많이들 걱정했습니다. 공대 내에서도 기계공학과 내 여학생 비중이 매우 낮은 편이라 인원 미달 우려가 있었거든요. 하지만 공대가 살려면 기계공학과가 있어야 했기에 학교나 저나 도전적인 선택을 한 겁니다. 학과 기반 자체가 벤처 정신이었죠. 학교의 도전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우려와 달리 입시 경쟁률이 잘 나오는데다 제자들이 사회 진출도 잘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함께 연구했던 대학원생의 지성과 노력이 창업에 큰 역할을 해줬죠.”
창업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함께 일했던 한국에너지연구원의 박사가 태양광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 기업 담당자와의 만남을 주선했어요. 담당자가 현재의 실리콘 기반 태양전지는 한계가 크다며, 제 전문 분야인 나노입자 코팅과 하이드로겔 소재를 다루는 기술로 차세대 태양전지를 개발했으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태양광을 전문으로 연구한 적은 없었지만 흥미를 느꼈습니다. 친환경 에너지 수요도 증가하는 추세였고요. 2022년 중소벤처기업부의 비창업패키지에 선정된 것을 계기로 에이스인벤터 법인을 설립하고, 상용화를 위한 기술 개발에 착수했습니다.”
◇건물 외장재 역할하는 하이드로겔 기반 태양전지 개발
기존의 실리콘 기반 태양전지는 한계가 많았다. “실리콘 태양전지는 불투명해서 설치 공간에 제약이 많은데다 심미성이 떨어지고, 경제성이 부족하는 등 여러 문제가 있었습니다. 보통 농가에서 태양광 시설을 도입하는데요. 농작물 위에 태양전지를 설치하면 햇빛을 차단해서 농작물의 생장에 지장을 줍니다. 어쩔 수 없이 패널의 간격을 띄워서 설치해야 하는데 그러면 가용 면적이 줄어서 효율이 떨어지죠.”
보다 근본적인 문제도 있었다. “태양광 발전소 설치 시 가장 큰 걸림돌은 부지 확보인데요. 땅값 등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보통 지방이나 시골에 태양전지를 설치합니다. 문제는 에너지 수요가 큰 곳은 수도권 등 도심지라는 점이에요. 전기 끌어오기 위한 전력망이 필요한데, 인프라는 개인이나 기업이 마음대로 설치할 수 없기 때문에 일이 커집니다.”
일련의 문제에 대한 대안은 건물일체형 태양전지(BIPV)다. BIPV는 건물 외장재나 창호에 태양전지를 통합해 전력을 생산하면서 건축 외장재 기능까지 수행한다. 하지만 이 분야에서도 실리콘 기반의 태양전지의 한계는 자명했다. ”태양전지가 건축 자재로 더 자연스럽게 융합되면, 훨씬 더 많은 건물에서 에너지를 자립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리콘 태양전지는 색상이 제한적이고, 투명하지 못해 건물 외관을 해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설치 후 몇 년 이 지나면 색상이 바뀌거나 오염될 우려가 있었죠. 설치가 어렵다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설치 공간이 제한된 건물이 대부분이었고, 많은 건물이 기존 태양전지를 부착할 수 없는 복잡한 구조였죠.”
유연하고 투명한데다 상대적으로 가벼운 태양전지가 필요했다. 하이드로겔 기반의 태양전지를 개발하기로 했다. “저희가 개발한 태양전지 셀은 두 개의 투명한 전극에 나노 입자를 깔고 그 사이에 하이드로겔 필름을 넣어서 접합한 형태입니다. 셀의 구조가 간단해 가볍고, 제작비도 절감할 수 있죠. 게다가 경도와 색상, 투명도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어서 다양한 건물 디자인에 적용 가능합니다. 태양전지로서의 기능을 해치지 않고 건축물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죠.”
다양한 색상과 투명한 소재로 건축물의 미관을 해지지 않는데 주안점을 뒀지만 에너지 공급원으로서의 기능도 뛰어나다. “하이드로겔 기반 전해질막은 기존의 액체 전해질보다 안정성이 뛰어납니다. 태양전지의 광변환효율도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죠. 하이드로겔 기반 태양전지는 건물 벽뿐만 아니라 다양한 곡면과 투명한 창호 등에도 설치할 수 있습니다. 유연한데다 투명성이 높기 때문이죠. 기존 실리콘 태양전지를 설치할 수 없던 공간에도 설치함으로써 에너지 효율을 높일 수 있습니다.”
하이드로겔 기반 건물일체형 태양전지를 다양한 비즈니스에 적용할 구상이다. “이 기술은 컬러의 다양성, 투명성, 유연성을 모두 갖추고 있어 건물 외장재 뿐만 아니라 실내 블라인드 등의 소품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저희는 건물 외장재용 태양전지와 실내에서도 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는 실내 블라인드 및 창호용 태양전지, 농업용 비닐하우스 등에 적용 가능한 농업용 필름 등 총 3가지 축으로 비즈니스를 영위할 생각입니다. 농업용의 경우 농민들이 전기 판매 수익을 낼 수 있는 형태를 준비 중입니다.”
이해관계자들은 에너지 비용 절감, 친환경 경영 실현, 건물의 심미적 가치 증대 등 다양한 효용을 누릴 수 있다. “건설사는 심미성과 기능성이 뛰어난 에너지 자립형 건물을 설계할 수 있습니다. 정부나 공공기관의 제로에너지 건축물 의무화 정책 확대에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죠. 특히 RE100(renewable energy 100) 추진 기업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저희 기술로 지은 건물 자체가 에너지 생산 기지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이런 기업은 재생에너지 사용 목표에 달성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접근법으로 친환경 건축 솔루션을 전세계에 제공하고 싶습니다.”
◇중국 위주의 태양전지 시장, 우리가 바꿔볼게요
현재 경기도 화성시에 50MW급 태양전지 모듈 양산 설비를 구축하고 있다. 내년 상반기에 공장 설립을 완료하고, KS 인증으로 신뢰성을 확보해 본격적으로 제품을 출시할 계획이다. 이미 국내외 여러 건설사와 실증 사업을 진행 중이다. 우리나라에서 먼저 정착한 다음 해외로 진출할 구상이다. 친환경 이슈에 가장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유럽 시장이 가장 큰 타깃이다.
친환경 건축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와 함께 큰 주목을 받았다. 중기부의 초기창업패키지, 딥테크팁스에 선정된데 이어 기술보증기업 TECH밸리, WISET 여성과학기술인 R&D 지원사업 등 다수의 스타트업 지원 사업에 선정됐다. 짧은 기간에 많은 성과도 냈다. 2023년 말 연구개발특구 딥테크 창업경진대회 이사장 상을 받은 데 이어 올해 스마트건설 창업아이디어 공모전 한국건설기술연구원 원장상(장려상)을 받았다. 지난 8월에는 은행권청년창업재단(디캠프)와 조달청이 지속가능성을 주제로 연 창업경진대회(디데이)에서 24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본선에 진출했다.
사실상 중국이 점령한 태양전지 시장을 다시 개편하는 게 목표다. “전세계 태양전지 모듈의 90% 이상을 중국이 공급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현실이죠. 하이드로겔 기반 태양전지를 상용화해서 차별화된 기능을 보여주고 가격 경쟁력까지 확보한다면 실리콘 태양전지로는 넘볼 수 없었던 기능성 태양전지 시장으로 진입할 겁니다. 그러면 중국 위주로 재편된 태양전지 산업에서 우리나라만의 파이를 점유할 수 있지 않을까요.”
도전을 멈추지 않은 비결은 ‘멀리 내다보기’다. “의사결정을 할 때 항상 5년, 10년 뒤의 제 모습을 생각합니다. 그때의 내 모습이 지금보다 발전하지 않은 것 같으면 걸어온 길을 과감하게 바꾸려 노력했어요. 석사 과정 당시 지도 교수를 존경했지만, 박사 학위까지는 따야겠다 싶어서 삼성종합기술원에 갔고 국내가 아닌 해외 최상위 공대에서 학위를 받았을 때의 제 모습이 나은 것 같아서 미국에서 박사 생활을 했습니다. 여대 기계공학과를 잘 발전시키면 우리나라에서도 훌륭한 여성 기계공학자가 탄생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숙대 교수가 됐고요. 지금은 저의 또 다른 발전을 위해 창업이라는 길을 택했고요. 더 많은 사람이 쉽게 재생에너지를 활용할 수 있는 세상을 앞당긴 사람. 그게 지금 제가 그리는 5~10년 후의 제 모습입니다.”
/진은혜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