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평범해 보이지만 가장 퀴어한 부부 [열한 가지 결혼 이야기 ⑪]
‘주여! 동성 커플들에게도 우리와 같은 지옥을 맛보게 하소서.’ 2013년 9월7일 동성 부부인 김조광수·김승환씨가 결혼식을 올리자 ‘한국기혼자협회’에서 재치 있는 문구의 현수막을 내걸었다. 하지만 하늘은 이 ‘기도’에 응답하지 않았다. 이들의 혼인신고서는 수리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2014년 5월21일 서울서부지방법원에 혼인신고 불수리 불복 신청을 했으나 기각됐다.
그로부터 10년이 흐른 2024년 10월10일, 혼인신고 불수리증을 받은 동성 부부 열한 쌍, 총 스물두 명이 모여 법원에 불복 신청을 하겠다며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번 소송에서 승소하면, 앞으로 한국에서도 동성 부부의 법적 지위가 인정받게 된다. 2024년 10월 현재, 동성결혼이 가능한 나라는 전 세계 39개국이다.
〈시사IN〉은 혼인평등소송에 참여하는 원고 열한 쌍 부부의 집을 방문했다. 나이도 직업도 사는 모습도 모두 다른 이들의 집안 풍경은 다채로우면서도 비슷했다. 서로를 돌보고, 일상을 나누고, 때로 다투기도 하지만 결국은 마주 보고 웃고 마는, 지극히 평범한 부부의 모습이었다. 세상의 모든 커플들과 다를 바 없는 이야기들이어서, 이게 기사가 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트랜스젠더 남성인 박유안씨(24)는 요즘 머리를 기르고 있다. “성별 정정까지 마친 트랜스젠더 남성이지만 대한민국 사회가 기대하는 방식의 ‘남성’으로만 살고 싶지는 않아요. 제게 딱 맞는 단어를 찾고 싶은데 마땅한 게 없네요. 굳이 말하자면 ‘성별 비순응’이라고 할까요.” 남편 민다정씨(가명·35)와도 성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나눈다. “다정이 ‘너 요즘 여장을 즐기는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열아홉 살 때부터 호르몬 요법을 시작한 유안은 2021년 10월 여성에서 남성으로 성별 정정을 마쳤다. 법원이 생식능력 제거 수술 없이 성별 정정을 인정한 첫 사례이기도 했다. 판결이 나오기 전 다정은 “성별이 바뀌고 나면 우리가 결혼하고 싶어도 남(男)-남(男)이라서 불가능할 텐데 괜찮겠냐”라고 물었다. 유안은 이렇게 답했다. “이건 내가 회피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동성혼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회가 바뀌어야 하는 문제야. 결혼 때문에 성별 정정을 포기할 생각은 없어.”
2019년부터 함께 살기 시작한 두 사람은 2023년 3월 하얗고 겁이 많은 강아지 하리(2)를 입양했다. 결혼 이야기가 오갔다. 유안은 언젠가 아이도 낳아 키우고 싶다고 했다. “10년 뒤에 한국 나이로 서른다섯이거든요. 그때쯤 아이를 낳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지금은 호르몬 요법도 중단했어요.”
하지만 구체적으로 상상하면 할수록 걸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당장 산부인과 병동에 입원할 수 없다. 법적으로 성별이 남성이기 때문이다. 남성이라 출산 수술에 대한 건강보험도 적용되지 않는다. 엄마 이름으로 등록하는 출생신고도 가능할지 의문이다. “여러 변호사에게 물어봤는데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출생신고는 어떻게든 되겠지만 그게 어떤 방식인지는 정말 그때 가봐야 알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퇴원한 뒤에도 여성 산모 위주로 짜여 있는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있을지 미지수다. “닥칠 수 있는 상황을 하나하나 생각해보다가 미혼부가 겪는 문제와 비슷하다는 걸 알게 됐어요. 더 알아보고 싶은데 찾는다고 찾아지는 내용은 아니니까요.”
두 사람은 “이번 혼인평등소송에 참여하는 열한 부부 중 가장 평범해 보이지만 들여다보면 가장 퀴어한 부부”라며 웃었다. 겉보기에 유안은 머리가 긴 여자 같고, 다정은 남자답다. 완벽한 비성소수자 부부처럼 보인다. 하지만 알고 보면 유안은 출산을 생각하고 있는 트랜스젠더 남성이고, 다정은 그를 사랑하는 시스젠더(태어날 때 성별과 스스로 인식하는 성별이 같은 사람) 게이다.
악플이 쏟아질 걸 알면서도 유안이 얼굴과 실명을 공개하기로 한 건 “사람들이 놀라지 않았으면” 해서다. “보세요. 저는 괴물처럼 생기지 않았어요. 어디서든 볼 수 있는 평범한 얼굴이잖아요. 배우자와 함께 강아지를 키우고, 결혼식에 무슨 옷을 입을지 고민하는 사람이에요.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평범한 일상 속에서 존재한다는 걸, 사람들이 구체적인 얼굴로 느낄 수 있게 하고 싶었어요.”
나경희 기자 did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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