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풍자 빼라"던 대한민국의 검열, 그리고 11년 만의 배상 [스프]

원종진 기자 2024. 10. 24.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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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스피커]
 

비주류란 이유로, 마이크를 가지지 못했던 사람들의 스피커가 되는 저널리즘.
 

지난 2013년 9월, 연출가 남인우는 극장에서 상영될 예정인 연극 '아리스토파네스 3부작' 중 <구름> 연출 준비에 한창이었다. 국립극단이 그리스 희극을 재해석해 연출한 작품으로, 희극이라는 장르의 특성상 사회와 정치를 풍자하는 요소들이 들어가 있었다. 남 연출가는 극본 원본에 성추행 파문을 빚고 경질된 박근혜 정부 청와대 대변인 윤창중 씨뿐 아니라, 박원순 당시 서울시장 등 야권 정치인들의 정책을 풍자하는 대목을 넣었다. 남 씨는 당시를 "배우와 스태프들을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엄정하게 지휘하며 연출가로서의 권위를 잃지 않고자 분투하던 시기"로 기억한다.

그러던 어느 날, 무대 뒤에서 한창 일하던 그에게 국립극장 사무국장 A 씨가 봉투에 담긴 종이뭉치를 들고 찾아왔다. 남 씨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꺼내든 종이뭉치는 다름 아닌 사방이 빨간펜으로 난도질 된 자신의 연출 극본이었다.

1년여 뒤, 집회의 촛불이 전국을 뒤덮고 세상이 뒤집어졌다. 특검 수사가 시작되며 박근혜 정부 당시 작성됐던 '문화계 블랙리스트'도 세상에 드러났다. 하지만 그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새 정부 출범 후 꾸려진 민관 합동 진상조사위원회는 수사로는 드러나지 않았던 미시적 문화폭력이 정부 차원에서 자행됐음을 밝혀냈다. 남 씨의 경우도 그런 예다. 남 씨는 빨간펜으로 난도질된 연출 극본을 받아들었을 당시엔 그 일의 영문을 알 수 없었으나, 진상 조사 결과, 연극에 들어간 정치 풍자적 요소를 삭제하라는 정부 차원의 다각도 개입이 있었음이 드러났다.

남 씨는 국가에 책임을 묻고자 지난 2022년 국가배상 소송을 냈다. 소송의 상대방 격인 문화체육관광부는 처음에는 화해나 조정의 방식을 모색하겠다고 했다. 불필요한 소송 기간과 비용을 쓸 필요 없이, 국가가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잡는 길이었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고 분위기가 달라졌다. 화해나 조정을 해보자던 문체부는 돌연 국가배상 책임을 인정할 수 없다고 나섰다. 그렇게 소송은 길어졌고, 연출가 남 씨는 지난주에야 승소 판결을 받을 수 있었다. 검열 사건이 있은 지 9년, 소송을 제기한 지 3년 만의 일이었다.


판결을 내린 서울중앙지법 민사50단독 최미영 판사는 이 사건에 대해 "대한민국 소속 공무원이 한 연극 대본의 검열 및 수정 요구 행위는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예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하고, 건전한 비판을 담은 창작 활동을 직접 제약하는 것으로서, 검열을 금지하고 있는 헌법의 정신에도 어긋나며, 철저하게 법치주의를 수호하고 적법절차를 준수해야 할 공무원의 의무를 심각하게 위반한 것"이라고 판결문에 적었다.

세월이 흘렀지만, 이 일은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국가 차원의 미시적인 검열이 일어날 수 있음을 다시금 상기시켜 준다. 대한민국은 이제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국가가 됐지만, 역설적이게도 불과 몇 년 전까지, 노벨문학상 수상 당사자는 물론 많은 문화예술인들을 미시적 검열 통제 하에 놓고 있었던 국가이기도 하다. SBS <더 스피커>는 최근 나온 연출가 남인우에 대한 국가배상 판결을 계기로, 사건의 당사자와 법률대리인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Q.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당시 '문화계 블랙리스트'가 드러나 파문이 일었다. 연출가는 당시 본인이 국가 검열의 피해자라는 것을 몰랐나?

남인우 연출가

남인우 연출가 : 사실 국립극단 공연 소극장, 기껏해야 300석도 안 되는 극장이었는데, 1주일 2주일 한다고 얼마나 많이 와서 보겠어요? '사람들이 많이 봐야 3천 명 4천 명 보는 건데 왜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을 하지?' 정도로 생각을 했지, 그때는 전혀 위에서 청와대든 어디든 국가적인 개입이 있을 거라고 생각을 못 했죠. 그냥 정치적으로 민감한 상황이니까 감독이 스스로 그냥 좀 어떻게 해보려고 하나 보다, 그런 식의 압박이 있나 보다 했지, 위에서 이렇게 구체적으로 명령이 왔다고는 생각을 못했던 거죠.

그런데 나중에 시간이 흘러서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원회에서 호출을 받아서 갔는데, 거기서 그런 저보고 대본을 수정한 사실이 있냐고 물어보면서,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랑 왔다 갔다 한 문건들을 이제 저한테 보여주더라고요. 그 공문을 보고 제가 메모해 놓은 걸 보니까 일자가 이제 딱딱 맞는 거예요. 그때 알았죠. '보이지 않는 국가 차원의 검열이 있었구나' 하는 것을.

Q. 국가 차원의 검열이라는 건 몰랐겠지만, 당시 빨간펜으로 수정된 대본을 받아들었을 때 어떤 느낌이 들었나?

남인우 연출가 : 연출은 창작을 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다른 동료들과 함께 만들어내는 역할도 하는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누군가가 나를 통제하는 행위를 배우들이나 스태프들이 보고 있는 극장에서 대놓고 한 거예요. 배우들이 볼 때는 지금 자꾸 예술감독이 와서 빨간펜 친 대본을 주고 막 그러니까 '쟤도 그냥 하라는 대로 지금 하고 있군' 이런 인식이 팽팽했겠죠. 제가 연출이 제대로 됐겠어요?

그때도 저는 너무 힘이 들었고, 그 일이 있고 나서 6개월 뒤에 상세불명의 혈압으로 중환자실에 입원도 하고 막 그랬거든요. 제 직업의 본질적인 부분에 대해 침해를 받다 보니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은 거죠. 하지만 당시에는 그래도 그런 일이 어떤 국가 권력이나 이런 것으로 인해서 저한테까지 부당한 지시가 내려오는 상황이라고까지는 미처 생각을 못 했습니다. 너무 순진했던 것 같습니다.

Q. 소송전 끝에 국가배상 판결을 최근 받았다. 어떤 느낌이 들었나?

남인우 연출가 : 기분이 좋다기보다는 1차적으로는 진짜 참담했어요 솔직히. 그전까지는 물론 증언도 있었고 이건 사실이겠구나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마음 한쪽 구석에서는 아니었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어요. 하지만 법적인 판결문이라는 팩트가 돼버린 것이니까요. 사실 예술가로서 너무 창피한 일이잖아요. 우리나라가 지금 민주공화국이라고 하는데, 이런 일이 지금도 벌어졌다는 게 사실로 굳어진 것이라 1차적으로 좀 참담했고요.

두 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기가 뭘 했는지를 인정하지 않는 분들에 대해서 화가 나기 시작하더라고요. '이분들이 어떻게 예술원 회원이 됐지?' 하는 생각도 들고요. 또 제 자신도 너무 창피했습니다. 저 자신도 그걸 검열이라고 인지 못 한 게 너무 좀 창피했고,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내가 사랑하는 조국이라는 사실도, 그리고 내가 너무 존경하고 사랑했던 사람들이 이 일에 함께했다는 것도 너무 창피했습니다.

Q. 2022년에 제기한 소송이었는데 3년이나 걸렸다.

하주희 변호사

하주희 변호사 (남인우 연출가 소송 대리) : 처음에 소송을 제기한 2022년쯤에는 조정 가능성이 컸었어요. 문체부 측에서도 적정하게 액수를 정하겠다고 했고, 자기들도 인정하는 부분이 있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조정안을 만들고 했는데, 공교롭게도 정권이 바뀌고 새 장관들이 들어온 뒤에 급격하게 입장이 바뀌어서 국가배상 책임을 부인하는 걸로 분위기가 바뀌었어요. '대한민국이 검열을 지시했다는 증거가 어디 있냐' 뭐 이런 취지로요. 그러면서 당초 생각했던 것보다 소송이 좀 오래 걸린 것 같습니다. 합의나 조정 이런 걸로 하겠다는 의사가 정부 측에서 좀 있었는데, 갑자기 '조정 말고 변론기일에서 조정을 하자' 이렇게 해서 기일이 잡혔는데 갑자기 부인을 하고, 공방이 오고 가고 그렇게 된 거죠.

Q. 재판부는 당시 있었던 국립극단의 검열 행위가 정부 차원에서 실행됐음을 상세히 명기하면서 헌법 위반이고, 배상 책임도 있다고 판결문에 적시했다. 판결의 의미를 어떻게 평가하나?
 
<판결문 중 '인정 사실' 부분>

피고 국립극단에서는 2013. 9. 3.부터 2013. 9. 15.까지 '개구리'라는 연극을 공연하였는데,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라 한다) 공연전통예술과 김○○ 과장은 2013. 9. 12. '국립극단 기획공연 <개구리> 관련 현안 보고'라는 문서(이하 '이 사건 보고서'라 한다)를 완성하여 청와대에 보고하였다. 이 사건 보고서는 연극 '개구리'에 대하여, '내용상 문제점'으로, '그분(노무현 전 대통령 상징)'과 '카멜레온(박정희 전 대통령)'의 대화를 통해 '그분'을 미화하고 '카멜레온'을 비하적으로 묘사한 점, 국정원 선거 개입 사건을 '기말고사 컨닝'으로 풍자한 점, 윤창중 전 대변인 스캔들을 풍자한 점 등을 지적하면서, '국립극단 예술감독(△△△) 조치사항'으로, '연출가로 하여금 결말을 수정하도록 하고 과도한 정치적 풍자를 대폭 완화하도록 지도하는 등 문제의 소지를 최소화하도록 조치'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이 사건 보고서는 '향후 조치계획'에 관하여, "향후 국립극단 작품에 '편향된 정치적 소재'는 배제토록 강력 조치"한다면서 '아리스토파네스 시리즈 2차 작품[구름(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행 추문 등 패러디 내용 포함 예정), 9. 24.~10. 5.] 등 2013년 국립극단 후속 작품에 정치적 소재의 내용은 배제토록 조치'한다고 기재하였다.

하주희 변호사 (남인우 연출가 소송 대리) : 가장 기본적인 일반 원칙, 즉 예술에 대한 사전 검열이라든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은 안 된다는 것을 민사적 차원에서도 다시 한번 확인한 판결이라고 봅니다. 특히 이 사건과 관련해서 피고인 '대한민국'은 그 책임에 대해서 부인했었어요. '우리가 지시해갖고 한 증거가 어디 있느냐' 이런 식으로 나왔었는데, 국립극단에서 나온 진술이랑, 전체적으로 그 당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가 어떻게 실행됐는지를 전반적으로 검토해서 대한민국 정부의 지시가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책임을 지라고 한 점에서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원종진 기자 bell@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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