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충의 밤이 길어졌다. 흥국생명이 먼저 흔들렸고, 따라붙었고, 끝내 놓쳤다. 그 여운이 길었다. 10월 29일, GS칼텍스와의 풀세트 승부에서 흥국생명은 세트 스코어 2-3으로 무릎을 꿇었다. 스코어만 적으면 간단하다. 15-25, 28-26, 25-23, 19-25, 13-15. 그러나 이 다섯 줄 안에는 한 팀의 약점과 가능성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요시하라 도모코 감독은 경기 뒤 “블로킹과 수비에서 우왕좌왕했다. 동작이 느렸고 생각이 많았다. 우리는 더 성장해야 한다”고 했다. 질타였고, 동시에 방향성이었다.

패턴은 1세트에서 드러났다. 실바의 서브 타임만 오면 코트가 흔들렸다. 강타와 연타를 섞으며 리시브 라인을 무너뜨렸고, 에이스만 5개가 쏟아졌다. 경기는 순식간에 기울었고, 팀 리시브는 낮은 성공률로 주저앉았다. 15-25, 내용까지 완패였다. 여기서 무너졌다면 그걸로 끝이었다. 그런데 흥국생명은 2세트 초반부터 리듬을 되찾았다. 리베로를 바꾸고, 서브 강도를 끌어올리며 맞불을 놨다. 정윤주의 강한 서브가 상대 리시브를 흔들자 듀스로 간 끝에서 피치의 서브 득점, 이다현의 블로킹이 연달아 터졌다. 28-26, 밑바닥에서 끌어올린 한 세트였다.
3세트는 더 극적이었다. 중반까지 실바와 레이나의 무게에 밀려 11-15로 끌려갔지만, 교체 카드로 호흡을 바꾸더니 다시 이다현이 전면에 섰다. 실바의 타점을 읽고 두 번 연속 막아 세웠고, 레베카가 길게 넘어온 볼을 놓치지 않았다. 블로킹 타이밍이 팀 전체에 맞춰지기 시작하면서 25-23으로 다시 뒤집었다. 1세트의 악몽을 지운 흐름이었다. 그럼에도 경기는 쉽게 닫히지 않았다. 4세트 들어 GS칼텍스가 세터를 김지원으로 바꾸면서 볼 흐름이 가벼워졌고, 실바의 점유율을 잠시 낮추자 레이나가 비어 있던 공간을 파고들었다. 25-19. 승부는 5세트로 갔다.

마지막 세트는 한 구, 한 구의 싸움이었다. 2점 차가 나면 금세 좁혀지는 줄다리기. 여기서 경기를 끝낸 건 유서연의 결정적 두 포인트였고, 매치 포인트에서는 실바가 다시 오픈을 꽂아 넣었다. 실바는 이날 39점을 올렸다. 그 안에는 1세트의 서브 에이스 5개, 블로킹 2개가 포함되어 있었다. 레이나도 22점으로 버텨줬다. GS칼텍스는 서브 득점에서 9-4로 우위를 잡았고, 선수 기용 변화로 흐름을 다잡았다. 흥국생명은 레베카가 29점, 공격성공률 46.67%로 분투했으며, 이다현은 블로킹 8개 포함 13점을 보탰다. 수치만 보면 지지 않을 경기였다. 문제는 상대가 압박을 바꿀 때 흔들리는 첫 반응과, 그 이후 라인 전체가 정렬되는 속도였다.
요시하라 감독의 쓴소리는 그래서 단순한 감정 표현이 아니었다. “블로킹과 수비에서 생각이 많았고 동작이 느렸다”는 말은, 오늘 경기의 실제 장면들과 정확히 겹친다. 1세트 실바 서브 라인을 막아내지 못하고 무너진 순간, 4세트 중반 서브-리시브 공방에서 길이를 놓치며 일점차 승부에서 연속 실점을 허용한 시퀀스, 5세트 초반 블로킹 라인이 네트를 살짝 떠난 틈에 상대가 재빨리 때려 넣은 장면들. 이건 감각의 문제가 아니라 원칙의 문제다. 누가 먼저 올라가고, 누가 뒤를 메우며, 라이트와 레프트의 간격을 누가 콜로 정리하는지. 팀이 약속을 정확히 기억해내느냐가 승부처에서 갈렸다.
그럼에도 흥국생명은 반등의 힌트를 분명히 남겼다. 첫째, 리듬이 무너졌을 때 서브로 상대 흐름을 끊어낸 2세트. 정윤주의 강서브는 단순한 득점 이상이었다. 상대의 콤비네이션을 한 번 끊고, 세터의 시야를 좁히는 데 결정적이었다. 둘째, 세트가 깊어질수록 레베카의 공이 가벼워졌다는 점. 초반에는 높은 볼에서 힘으로 눌렀다면, 3세트 이후에는 라인샷과 스트레이트 변주로 코스의 품을 넓혔다. 셋째, 이다현의 블로킹 타이밍. 실바의 퀵오픈과 파이프 타이밍을 두 번 연속 잡아낸 장면은, 상대의 ‘정답’ 같은 루트를 팀이 데이터로 읽고 있다는 신호였다. 이건 오늘의 패배와 별개로, 시즌이 길어질수록 흥국생명이 가져가야 할 확실한 무기다.

그럼 무엇이 부족했을까. 첫째는 리시브 라인의 초기 위치 선정과 버티는 힘이다. 실바의 서브는 강하지만 예측 불가능한 궤적은 아니다. 1세트에만 실바가 서비스 에이스를 5개나 기록했다는 사실은, 단지 힘에 눌렸다는 말로는 설명이 안 된다. 첫 공이 흔들릴 때 두 번째와 세 번째 발의 위치가 뒤로만 밀렸고, 어깨를 고정하는 대신 팔로만 공을 받은 장면이 반복됐다. 둘째는 4세트 전환 속도다. 상대가 세터를 바꾸고 점유율을 분산하자 블로킹 출발점이 혼란스러워졌다. 눈으로는 읽었지만, 발이 먼저 나가지 못한 몇 개의 포인트가 결국 세트를 통째로 넘어가게 했다. 셋째는 5세트 ‘첫 콜’이다. 세트 시작 후 첫 두 랠리에서 누가 콜을 주도하는지에 따라 팀의 볼 집중도가 달라진다. 오늘은 그 콜이 상대 쪽에서 더 크게 들렸다.
한편으로는, 이 패배를 과하게 확대할 필요도 없다. 시즌은 10월에 시작했고, 오늘은 1라운드였다. 흥국생명은 1승 3패, 3연패의 수렁에 빠진 게 사실이지만, 2·3세트처럼 불리한 흐름을 거꾸로 돌리는 장면을 같은 경기 안에서 두 번이나 만들었다. 그건 흔한 능력이 아니다. 팀이 ‘되는 플레이’를 갖고 있다는 뜻이고, 그 플레이를 더 빨리 꺼내오는 법만 익히면 결과는 자연히 따라온다. 요시하라 감독이 “시즌 중반, 후반으로 갈수록 성장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늘의 문제를 지적하는 동시에, 언제까지 무엇을 바꾸겠다는 시간표를 사실상 공개한 셈이다.

선수별로도 메시지는 분명하다. 레베카는 이미 팀의 1옵션으로 제 역할을 해내고 있다. 득점 29점, 성공률 46%대면 원정에서 5세트 승부에도 충분한 숫자다. 중요한 건 이다음이다. 리시브 라인이 흔들릴 때 후위에서 한 박자씩 시간을 벌어줄 수비, 득점 이후 곧바로 이어지는 첫 서브에서의 집중 유지. 이다현은 오늘 경기로 자신의 시즌 정의를 새로 썼다. ‘높은 블로킹’이 아니라 ‘맞는 블로킹’. 상대 주포의 템포를 읽어 각을 잡는 블로킹은 더 값지다. 정윤주의 서브는 앞으로 팀이 흔들릴 때마다 꺼낼 수 있는 확실한 카드다. 세터진은 오늘 상대의 교체처럼 과감한 변주가 필요하다. 흐름을 뺏길 때 볼 높이와 속도를 한 번에 바꾸는 결단이, 시즌 후반 큰 경기에서 세트를 살릴 수 있다.
GS칼텍스의 운영은 배울 만했다. 실바의 점유율이 떨어지는 순간 레이나에게 기회를 몰아주고, 5세트에 세터를 바꿔 템포를 재조정했다. 필요한 순간에 유서연이 2점을 책임졌다. 이 기본기가 오늘의 승부를 갈랐다. 그러나 이 기본기는 흥국생명도 할 수 있다. 아니, 이미 하고 있다. 오늘 2·3세트가 증거다. 다만 그 템포를 5세트까지 끌고 가는 힘, 한 번 흔들려도 다시 중심에 들어오는 속도, 그 두 가지가 아직은 덜 단단할 뿐이다.

결국, 이 경기는 흥국생명이 시즌을 통과하는 데 필요한 체크리스트를 한 장으로 만들어줬다. 리시브 첫 발, 블로킹 출발점, 세터 템포 변주, 득점 후 첫 서브 집중. 네 가지 항목을 주중 훈련 동안 반복해 체질화하면, 오늘 같은 경기의 결말은 달라진다. 무엇보다 잊지 말아야 할 건, 팀이 이미 ‘이길 수 있는 경기’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0-1에서 2-1로 가는 동안 보여준 태도는 우연이 아니었다. 그 태도를 끝까지 밀어붙이면, 13-15의 간격은 곧 메워진다.
스코어는 지나가지만, 말은 남는다. “더 성장해야 한다.” 요시하라 감독의 문장은 숙제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약속이다. 시즌이 중반과 후반으로 갈수록 오늘 같은 허술함이 줄어들고, 대신 2·3세트의 단단함이 길어질 것이라는 약속. 팬들이 듣고 싶은 말도 그거다. 오늘의 아픔을 정확히 가리키고, 내일의 방법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 장충의 긴 밤이 끝나고, 흥국생명이 다시 올라갈 시간표는 이미 손에 쥐어졌다. 다음 경기는 그 시간표의 첫 줄을 확인하는 자리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필요한 건 거창한 전술이 아니라, 첫 발의 속도와 첫 콜의 자신감이다.
흥국생명 3연패 탈출은 결국 기본에서 시작된다. 블로킹의 첫 발, 리시브의 첫 어깨, 세터의 첫 선택. 오늘은 늦었다. 다음은 빠르면 된다. 그 차이가 승점으로, 순위로, 표정으로 남는다. 장충의 공기는 그 변화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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