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아우슈비츠·가자, 올 노벨 평화상의 불편한 진실 [임지현 '반전의 세계사']

2024. 10. 19.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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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현 ‘반전의 세계사’] 전쟁 피해자 바뀌는 기억의 연대
20세기 후반 한반도를 할퀸 냉전의 정치적 제노사이드와 그 폭력에 연루된 인간의 내밀한 트라우마를 응시한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소식에 한반도가 들떠 있을 때, 바다 건너 일본은 ‘니혼히단쿄(일본 원·수폭 피해자 단체 협의회)’의 노벨 평화상 수상 소식에 환호했다.

‘증언’이라는 무기로 핵무기 없는 세상을 위해 고투해 온 ‘니혼히단쿄’의 수상 소식은 전 세계의 평화론자들을 기쁘게 했다. 반면 핵 공유나 핵 억지론을 외쳐 온 일본 우익은 일본 핵무장을 무산시키려는 국제적 음모라며 반발했고, 중국 ‘웨이보’의 누리꾼들은 전쟁을 일으킨 나라가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고 비판을 쏟아냈다.

독일선 이스라엘 국가 폭력 비판 금기
1963년 1월 27일 아우슈비츠 해방기념일에 일본 히로시마에서 온 평화운동가들 4명이 참가한 ‘히로시마 아우슈비츠 평화행진’ 사진. [사진 바르샤바 현대미술관 아카이브]
나는 노벨 평화상이 임자를 찾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세계 유일의 원폭 희생자임을 강조하면서도 여전히 핵무기금지조약에 가입하지 않고 있는 일본 정부의 이율배반을 꼬집은 와다 마사코 사무국 차장의 수상 소감은 보편적 울림이 있다. 핵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일본 우익으로서는 그만큼 불편할 것이다. 이미 핵보유국인 북한이나 남한의 반북 핵무장론자들도 마땅치 않아 할 거다.

그 와중에 일본 주재 이스라엘 대사가 ‘니혼히단쿄’의 노벨 평화상 수상 논란에 끼어든 것은 조금 이례적이다. 수상 직후 히로시마 시청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미마키 토시유키 히단쿄 이사장이 던진 말이 발단이었다. 미마키 이사장은 히로시마·나가사키의 ‘원폭 고아’에 빗대어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피 흘리고 있는 가자 팔레스타인 자치구의 아이들에 대한 공감을 표했다.

그러자 길라드 코헨 주일 이스라엘 대사는 자신의 SNS 계정을 통해 원폭 고아와 가자 어린이 희생자의 비교가 역사를 왜곡하고 하마스 테러로 희생된 이스라엘 희생자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히단쿄’가 2023년 10월 7일 하마스의 이스라엘 민간인 학살과 인질 테러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도 이스라엘군의 가자 지구 공격만 문제 삼은 데 대한 불만을 토로한 것이다.

일본 홀로코스트 교육센터에서 ‘기억하자’를 히브리어, 영어, 일어로 쓴 명판. [사진 임지현]
최근 들어, 일본의 원폭 희생자와 팔레스타인 민간인 희생자를 병치하는 기억의 연대 움직임이 부쩍 눈에 띈다. 다비드의 노란 별을 가슴에 단 이스라엘 대표단이 유엔 안보리에서 하마스의 테러리즘을 비판할 때, 도쿄 주재 팔레스타인 대표부는 자신의 X 계정에 이스라엘군의 가자지구 폭격을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 ‘리틀 보이’와 비교하는 글을 올렸다. 그 전에는 가자지구에서 온 팔레스타인 난민 청소년들이 히로시마 평화공원을 찾아 원폭 기념비에 헌화하는 일이 있었다.

일본과 달리 독일에서는 이스라엘의 국가 폭력을 비판하는 지식인들이 잇달아 불이익을 당했다. 유대계 지식인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쾰른 대학은 2024년 예정된 유대계 철학자 낸시 프레이저의 석좌교수 초청을 취소시켰다. ‘한나 아렌트’상 2023년 수상자인 마샤 게센의 시상식은 우여곡절 끝에 겨우 열렸지만, 수상 연설은 취소됐다. 이들의 이스라엘 비판이 결과적으로 하마스의 테러 공격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게 그 이유였다.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은 반유대주의라는 단순 논리가 그 밑에는 깔려 있다.

2023년 아렌트상 시상식 소동에 대해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한나 아렌트가 지금 독일에 살아 있다면, 아마도 그조차 한나 아렌트 상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썼다. 1948년 12월, 아렌트와 아인쉬타인 등 유대계 지식인들은 메나헴 베긴을 위시한 시오니스트 우익을 인종주의적 파시스트 국가론의 신봉자라고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지금의 독일이라면 이스라엘의 국가 폭력을 서슴지 않고 비판한 아렌트는 반유대주의의 혐의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이스라엘의 국가 폭력에 대한 비판이 하마스의 테러리즘을 정당화한다는 작금의 논리는 제로섬게임의 규칙일 뿐이다. 냉전의 긴 터널을 통과하면서, 어느 한 편에 대한 비판이 다른 한 편을 정당화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제로섬게임은 냉전의 게임 규칙이 됐다. 한반도로 눈을 돌리면, 북한의 붉은 세습왕조에 대한 비판이 남한의 국가 폭력을 정당화한다거나 남한의 개발독재에 대한 비판이 북한의 정당성을 뒷받침한다는 식의 진영 논리가 그렇다.

일본 히로시마 현 후쿠야마 시에 있는 홀로코스트 교육센터의 안네 프랑크 동상. [사진 임지현]
지성사의 관점에서 볼 때, 냉전의 가장 큰 폐해는 우리의 의식 세계를 제로섬게임의 규칙에 가두어 두었다는 데 있다. 그래도 냉전의 세계사를 차근차근 들여다보면, 제로섬게임의 규칙을 깨고 한 편에 대한 비판으로 다른 한 편에 대한 비판을 벼르고, 그렇게 벼려진 비판이 다시 원래의 비판을 더 예리하게 만드는 비판의 변증법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1962~63년 8개월에 걸친 히로시마-아우슈비츠 평화 행진은 이 점에서 흥미롭다. 1963년 1월 29일 자 『폴란드 매일』은 히로시마-오시비엥침 평화 행진 기사를 1~2면에 걸쳐 싣고 있다. 4명의 일본 반핵평화활동가가 히로시마를 출발해 아시아와 유럽의 23개국에 걸쳐 3만3000㎞를 거치는 8개월간의 긴 여정 끝에 폴란드에 도착해 1963년 1월 27일 아우슈비츠의 해방기념식에 참가했다는 내용이다.

‘니혼잔 묘호지’ 승려인 사토 쿄츠 등 일본 활동가들은 히로시마 원폭 투하 당시 폭탄의 열기에 녹아내린 기와 조각을 가져왔고, 아우슈비츠 기념관 측은 그 답례로 홀로코스트 희생자를 소각하고 남은 재를 항아리에 담아 기증했다. 히로시마와 아우슈비츠의 잔해에서 각각 길어 올린 죽음의 상징을 교환하자, 기념식 참가자들은 ‘히로시마 다시 없게’ ‘아우슈비츠 다시 없게’를 연호했다.

바르샤바 현대미술관이 보관하고 있는 36장의 흑백사진은 독특한 기억의 풍경을 보여준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줄무늬 죄수복을 입은 유럽인 참가자 행렬의 선두에서 불교 만장을 높이 들고 눈 덮인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 길을 걷고 있는 일본 대표들의 사진은 서먹서먹한 연대감을 보여준다. 승복을 입고 결연한 표정으로 염불하는 사토의 모습은 압권이다.

지금이야 누구나 다 홀로코스트를 갖다 붙이고 아우슈비츠는 보통명사가 됐지만, 행진이 시작된 1962년 당시 미국 전역에서 홀로코스트 강좌가 딱 하나만 개설된 현실에 비추어보면 히로시마-아우슈비츠 평화 행진이 얼마나 선구적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반세기를 뛰어넘어 2008년 3월 미군의 베트남 전쟁 밀라이 학살 40주년 기념식에서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온 일본 대표단의 규모가 가장 컸다.

일본인 희생 세계 공인받으려는 의도
안네 프랑크의 일기가 가장 많이 팔린 나라가 일본이라는 것도 의외다. 1952년 일본어판이 출간된 이래 20세기 말까지 4백만 부가 팔렸다. 여러 종의 만화책과 애니메이션 관객까지 합치면 안네의 일기를 접한 일본인 수는 훨씬 늘어날 것이다. 거기에 더해, 후쿠야마의 시골 마을 논 한 가운데 있는 아시아 유일의 홀로코스트 교육센터에 가보면 무언가 과잉의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센터의 창립자 오츠카 목사는 2015년 독일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유대인과 일본인의 조상이 같고 유대교와 국가 신도 사이에 공통점이 많다고 주장해 많은 독일인을 놀라게 했다. 일본어와 히브리어의 발음에 유사한 게 많다는 발언도 덧붙였다. 히로시마와 아우슈비츠, 일본인과 유대인의 동일성에 대한 과장된 주장 밑에는 홀로코스트를 지렛대로 세계 유일의 원폭 희생자인 일본의 희생자의식을 세계로부터 공인받고 싶다는 욕망이 숨어있다.

유대인과 일본인이야말로 백인 인종주의의 가장 큰 희생자라는 일본 우익의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는 미국과 영국, 프랑스와 네덜란드 등의 서양 제국주의에 대항한 일본 제국을 아시아 저항 민족주의의 기수라고 치켜세운다. 홀로코스트의 기억을 원폭 희생자의 기억과 연결해 아시아·태평양 전쟁에서 이웃 민족에 대한 일본의 침략과 가해의 역사를 은폐하는 가림막 기억으로 남용했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히로시마의 비유를 아우슈비츠의 유대인에서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으로 대치한 ‘니혼히단쿄’의 기억 정책이 어디로 튈지는 지켜볼 일이다. 노벨 평화상 수상을 계기로 『도쿄 신문』 등 일본 미디어가 합천의 한국원폭피해자협회를 소개하는 기사를 실은 것은 반갑다.

‘히로시마-아우슈비츠-가자’의 기억 연대는 제스처만으로도 가능하지만, 한·일 기억 연대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임지현 서강대 석좌교수. 서강대에서 서양사 전공. 대표 저서로 『희생자의식 민족주의』(2021), 『기억 전쟁』(2019), 『대중 독재』(2004), 『우리 안의 파시즘』(공저 199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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