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독립운동가’ 자료엔 빠진 이재유·김사국·강주룡의 역사

김종목 기자 2026. 5. 25.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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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부가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한 인물은 이재유(1905~1944), 김사국(1895~1926), 강주룡(1901~1932)이다. 보훈부는 지난 4월 30일 낸 선정 보도자료에서 선정 사유를 두고 “일제의 민족차별에 맞서 한국인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헌신했다”고 했다.

이재유와 김사국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다. 강주룡은 이른바 ‘적색노조’로 분류된 ‘평양 지역 혁명노동조합 사건’에 연루 혐의로 체포됐다.

이 보도자료는 계급 운동과 결합된 노동운동에서 ‘계급’과 ‘혁명’을 뒤로 밀어냈다. ‘더 좋게 만든다’ 뜻의 ‘개선’이라는 표현은 투옥과 고문을 감수하며 제국주의와 노동 착취에 맞선 투쟁 성격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는 측면도 있다. 이들의 이력을 다시 정리했다.

일제가 작성한 이재유의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국사편찬위원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에 나온 이재유에 대한 정의는 “일제강점기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위원, 고려공산청년회 일본총국 위원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김경일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다. 김경일이 정리한 약사와 보훈부가 쓴 공훈록 등을 보면, 이재유는 1928년 5월 고려공산청년회 일본총국 활동 등을 하다 요시찰 대상에 오른다. 그해 8월 ‘제4차 조선공산당’ 관련자로 붙잡혀 서울로 압송된다. 1930년 11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 6월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뒤 1932년 12월 만기 출옥했다.

이후 이재유는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경성트로이카’를 조직해 영등포와 용산 등지에서 활동했다. 다시 체포됐다가 탈출한 뒤 조직한 경성재건그룹 시기 <적기>를 발간해 조선 독립과 조선공산당 재건을 주장했다. 1938년 7월 치안유지법·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년을 받았다. 옥중에서도 조선어사용금지반대 등 운동을 벌인다. 1942년 9월 12일 형기 만료에도 비전향자라는 이유로 출옥하지 못했다. 1944년 10월 26일 청주보호교도소에서 순국했다.

김경일은 이재유가 사회·노동운동을 통해서 지향한 바는 “조선의 독립과 ‘조선적’ 공산주의 국가의 건설”이라고 정리한다. 김경일은 “(이재유의 사상은) 급진적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정수를 가장 잘 드러내면서 민족적이고 민중적, 혁명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일제가 작성한 김사국의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국사편찬위원회

김사국에 대한 정의도 “일제강점기 3·1운동에 참가하고 고려공산동맹을 이끈 사회주의운동가, 독립운동가“(홍종욱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다. 3·1운동 직전인 2월 말 서울에서 여러 동지와 한성정부 수립을 위한 ‘조선국민대회’를 준비했다. 그해 4월 23일 ‘국민대회사건’으로 투옥됐다가 이듬해 9월 석방된다.

출옥 후 노동·청년운동에 뛰어들어 서울청년회 결성을 주도했다. 일본 도쿄에서 사회혁명당·흑도회 활동을 했다. 1923년 고려공산동맹 결성을 주도하며 “무산계급의 단결”을 주장했다. 이후 폐병을 앓다가 1926년 5월 8일 사망했다.

강주룡이 평양적색노조사건 연루 혐이 체포 소식을 다룬 동아일보 7월 25일자 ‘산업별로 노조개조 적색노조를 조직’ 기사. 맨 왼쪽 맨 아래가 강주룡이다. 출처: 동아일보

강주룡은 1931년 5월 임금 삭감에 맞선 평원고무공장 파업을 주도하다 공장에서 쫓겨난 뒤 그달 29일 새벽 을밀대 지붕에서 임금 삭감 등에 반대하며 고공 투쟁을 벌인 일로 유명하다.

강주룡의 관련 서술에서 잘 언급되지 않는 대목 하나가 ‘평양 지역 혁명노동조합’ 참여다. 조선공산당에서 사회주의운동을 벌인 정달헌(1897~?) 등이 결성한 조합이다. 강주룡이 이 적색 노조 연루로 1931년 6월 8일 다시 체포된다. 그해 동아일보 7월 25일자 ‘산업별로 노조개조 적색노조를 조직’ 기사에 강주룡, 정달헌 등의 체포 소식과 함께 사진이 나온다.

강주룡은 옥중 투쟁을 벌이다 신경쇠약과 소화불량을 겪는다. 1932년 6월 7일 병보석으로 풀려났다가 두 달 후인 8월 13일 평양 서성리 빈민굴에서 사망했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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