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리 달린 거대한 성이 연기를 뿜으며 벌판을 걸어 다닌다. 이 기상천외한 상상은 2004년 국내 개봉 당시 301만 관객을 불러 모으며 오랫동안 일본 애니메이션 국내 흥행 기록으로 남았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다.
90살 할머니가 된 18살 소피
모자 가게에서 일하는 18살 소피는 황무지 마녀의 저주로 하루아침에 90살 노인이 된다. 집을 떠난 소피가 몸을 의탁한 곳이 바로 마법사 하울의 움직이는 성. 청소부를 자처하며 성에 눌러앉은 소피는 불꽃 악마 캘시퍼, 소년 마르클, 그리고 미스터리한 하울과 기묘한 동거를 시작한다.

저주가 풀어준 마음의 자유
이 영화의 묘미는 저주의 역설이다. 늙어버린 소피는 오히려 젊을 때보다 당당하고 자유로워진다. 남의 시선에 움츠러들던 소녀가 할머니의 얼굴을 빌려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사랑 앞에 용감해지는 과정은 '진짜 나이 듦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남긴다. 소피의 머리색이 장면마다 미묘하게 변하는 연출도 두고두고 회자되는 디테일이다.

전쟁 속에서 지키는 것들
화려한 마법 세계의 이면에는 전쟁이라는 묵직한 주제가 흐른다. 잘생긴 겁쟁이 마법사 하울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서 비로소 지켜야 할 이유를 찾는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특유의 반전 메시지와 낭만이 공존하는 이 작품은 아카데미 장편 애니메이션상 후보에 오르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사랑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개봉 후 20년이 넘도록 재개봉과 OTT를 통해 새로운 세대와 만나고 있다. 히사이시 조의 '인생의 회전목마'는 지금도 결혼식과 연주회 단골 곡으로 사랑받고, 하울과 소피가 하늘을 걷는 장면은 지브리 최고의 명장면을 꼽을 때 빠지지 않는다.

마음이 지칠 때 찾게 되는 영화가 있다면, 많은 이들에게 그것은 이 걸어 다니는 성일 것이다. 따뜻한 차 한 잔과 함께 다시 성문을 두드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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