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 제공자인데 집안일까지?…필리핀 가사관리사 명칭이 함정

한겨레 2024. 10. 10.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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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외국인 가사관리사 시범사업에 참여할 필리핀 노동자들이 지난 8월6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하고 있다. 공항사진기자단

김동수 | 르포작가·‘유령들: 어느 대학 청소노동자 이야기’ 저자

필리핀 이주노동자들의 아이 돌봄 서비스가 시작됐다. 아이를 돌보다 보면, 청소, 조리 등의 집안일도 하기 마련이다. 아이가 배고프다고 할 때 밥이나 간식을 차려주는 것도 돌봄의 일환이다. 문제는 서울시가 제공한 ‘업무 범위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이주노동자가 아이만 아니라 동거가족을 위해 ‘가볍거나 간단한 가사서비스’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이 가이드라인을 보고 이주노동자가 하는 일의 공식 직명을 확인했다. 외국인 ‘가사관리사’였다. 한국과 필리핀 정부가 체결한 업무협약에선 ‘돌봄 제공자’(caregiver)였다. 고용노동부와 서울시는 왜 협약과 다른 직명으로 명명했을까?

가사관리사라 일컫는 순간, 그 종사자가 아이 보호자의 집안일까지 떠맡게 되는 건 어쩌면 예견할 수 있는 일이었다. ‘집안일 전반을 관리한다’는 직명의 뜻대로, 업무 범위를 모호하게 해 최저의 급여를 주고 최대한의 업무를 시키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이런 상황은 집안일에서 파생된 업종인 건물청소에서도 발견된다. 과거에 노조를 막 조직한 ㄱ대학의 청소노동자들이 잡초 뽑기, 제설, 낙엽 쓸기, 화단 가꾸기 등의 ‘업무 외 노동’을 사쪽에 금지해달라고 요구한 적이 있었다. 그때 사쪽은 그들과 계약했던 근로계약서의 한 항목을 가리키며 이렇게 답했다. “여기 직종에 ‘미화직’이라 쓰여 있죠? 미화라는 게 여사님들이 화단 정리하고 잡초 뽑는 것까지 다 포함된 거예요.” 이는 미화의 뜻이 “아름답게 꾸밈”이니, ‘캠퍼스를 아름답게 꾸미는 일’인 화단 가꾸기도 미화 작업에 해당한다는 논리였다. 보통의 경우 청소(원)와 미화(원)를 같은 의미로 혼용해 쓰지만, ㄱ대학의 사용자는 노동자를 착취할 수 있는 방향으로 미화라는 단어를 청소보다 폭넓게 해석했던 것이다. ㄱ대학뿐 아니라 국회, 이화여대, 중앙대 등 청소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든 곳마다 이런 미화 작업을 무급으로 해왔다는 폭로가 나왔다.

물론 업무 범위를 단박에 인지할 수 있는 직업명을 사용하면서 그 범위에 벗어난 일을 강제하는 경우도 있다. 공동주택 경비노동자가 대표적이다. 그들은 경비업법에 따라 정해진 경비업무만 해야 했지만, 예전부터 관행적으로 분리수거, 외곽청소, 주차관리 등 관리업무도 겸했다. 그러다 2021년 이른바 ‘경비원 갑질 방지법’(공동주택관리법 시행령 개정안)의 시행으로, 경비원의 업무 범위가 조정됐다. 그런데 이 업무들을 설명하는 문구가 ‘청소와 이에 준하는 미화의 보조’처럼 모호했다. 이를 더 명확하게 할 필요성이 제기되자, 정부는 법 시행 전에 허용 업무와 불가 업무의 예시를 제시했다.

이후에 한 아파트의 입주자대표회의는 용역업체를 통해 경비노동자들에게 음식물 쓰레기통 세척을 지시했다. 외견상 이 업무 지시가 갑질처럼 보여도, 쓰레기통 세척을 정부가 예시에서 불가 업무로 명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법은 아니었다. 이런 맥락에서 서울시가 ‘가볍거나 간단한 가사서비스’에 해당하거나 그렇지 않은 업무를 가이드라인에 적시했지만, 현실적으로 모든 집안일의 종류를 세세하게 나열하기는 힘들다. 가이드라인에서 나열한 ‘업무 범위 아님’에 속하지 않는 업무를 아이 보호자가 새로 발굴한다면, 결국 필리핀 가사관리사가 해야 할 일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내가 만난 청소노동자 중에는 가사서비스나 요양보호 업무 경력을 가진 분이 적지 않았다. 한 분은 현장에서 자신을 가사관리사님, 청소노동자님, 요양보호사님이 아니라 여사님이나 이모님으로 부르는 것이 싫다고 했다. “의사, 경찰이 여자라고 여사님이라 부르나요? 최소한 여경, 여의사라고는 하잖아요. 그런데 우리를 부를 때는 왜 우리 직업을 굳이 지우는 걸까요?” 현재 필리핀 이주노동자에게도 “필리핀 이모님”이라 부르는 경우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요양보호사가 돌보는 노인뿐 아니라 그 동거가족을 위한 일까지 한다는 주장을 쉽게 접한다. 어쩐지 필리핀 가사관리사의 처지와 많이 닮아 있다. 그들의 업무를 만약 집안의 가족 중 누군가가 해야 한다면, 대개는 여성, 더 특정하면 엄마에게 맡겨진다. 더군다나 엄마는 업무 범위에 제한을 두지 않고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못하는 용돈 정도만 받거나 아예 무료로 일한다. 어떤 이유에서든 엄마가 이 일을 할 수 없을 경우에 그 빈자리는 여성 노동자로 대체되는 편이다. 문제는 그들에게도 ‘엄마와 같은 노동력’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국적과 상관없이 가사관리사, 요양보호사 등을 직업명 대신에 엄마와 관련 있는 호칭인 여사님 또는 이모님으로 부르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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