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유럽 축구 구단들의 방한이 시작됐다.
28일 뉴캐슬 유나이티드가 한국에 도착했다. 이들은 30일 팀 K리그와 프리시즌 경기를 가진다. FC바르셀로나도 한국을 찾는다. FC바르셀로나는 31일 FC서울, 4일 대구FC와 친선 경기를 치른다. 토트넘 홋스퍼도 온다. 1일 한국에 오는 토트넘은 3일 뉴캐슬과 프리시즌 경기를 소화할 예정이다.
지금부터 일주일간 펼쳐질 유럽 축구 구단들의 방한 일정. 이에 앞서 유럽 축구 구단들의 방한 역사를 되짚어본다.
#첫 방한은 1967년
유럽 축구 구단의 첫 방한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기록이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군데서 기록을 찾은 결과, 공식적인 유럽 축구 구단의 첫 방한은 1967년이었다.
1967년 6월 3일 영국 '미들섹스 원더러스'가 방한했다. 1912년 런던 서남부에 있는 미들섹스 카운티를 기반으로 결성된 팀으로 그 지역 선발팀이라고 볼 수 있다. 리그에 참가하거나 컵대회에 나서는 팀은 아니었다. 그 지역에서 특출난 선수들을 뽑아 전세계를 돌며 축구를 전파하는 역할을 했다. 1912년에는 파리, 비엔나, 뮌헨 등에서 경기했다.
1967년 아시아투어에 나섰다. 일본 투어로 시작했다. 그 해 6월 3일 한국을 방문했다. 국가대표팀 1진과 2진을 상대로 효창 운동장에서 경기를 소화했다. 1승 1패를 거두었다. 당시 경향 신문 보도에 따르면 1만 5000명의 관중이 들어왔다.

#1972년 펠레의 방한
1970년 브라질 구단인 플라멩구와 올라리아가 방한했다. 소소한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1972년 그가 왔다. 축구 황제 펠레가 방한했다. 산투스FC와 함께 한국을 찾았다. 펠레는 1970년 멕시코월드컵에서 브라질의 우승을 이끌었다. 당대 최고의 축구 스타로 군림하던 때였다.
동대문에 있던 서울 운동장에서 한국 축구 대표팀과 맞대결을 펼쳤다. 3만 5000여 관중이 몰려들었다.
당시 조선일보 보도를 보면 펠레의 방한이 얼마나 대단했는 지 짐작할 수 있다.
'서울 운동장 주변은 오전 10시께부터 붐비시 시작했다. 입구 8개소는 다투어 입장하려는 대열이 20~50m씩 줄을 지었다. 아예 도시락 두 개를 싸든 이도 있었다. 오후 3시 문을 열 때는 3000여명이 밀려들어 혼잡을 이뤘다.
오전 11시 입장권이 매진되자 표를 사지 못한 3000여명이 암표를 찾아 아우성쳤다. 1000원짜리 일반석 입장권을 2000원에 팔았고, 2000원짜리 측성 입장권은 5000언에 팔렸다는 이야기도 나돌았다.
100여명의 상인들과 신문팔이 등은 신문을 '펠레 방석'이란 이름을 붙여 깔개로 팔았다. 펠레의 얼굴과 사인을 넣은 손수건을 '펠레 손수건'이라해서 50원씩에 파는 진풍경도 보였다.
3개 텔레비젼 방송국이 일제히 중계를 시작한 오후 7시께부터 다방, 음식점 등 텔레비젼이 있는 접객업소엔 운동장에 가지 못한 팬들이 진을 쳤다. 텔레비젼 가게엔 쇼윈도 너머로 중계 방송을 시청하는 시민들이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
경기가 끝나자 운동장에서 풀려나온 인파로 을지로 6가 일대는 다시 대혼잡, 차잡기를 단념한 사람들이 시간을 보내기 위해 부근 대폿집, 다방 등에 몰려 때 아닌 호경기를 일으키기도 했다.'
펠레와 산투스의 방한은 1972년 초여름 대단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조금씩 이어지는 방한
1976년에는 맨체스터 시티가 방한했다. 일본과 한국에서 진행된 아시아 투어였다. 축구 대표팀 1진과 2진을 상대로 세 차례 경기를 치렀다.
1979년에는 베켄바우어가 뛰던 뉴욕 코스모스의 방한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1980년에는 차범근이 뛰언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가 팀과 함께 방한했다. 서울과 부산에서 3차례 경기를 펼쳤다.
1983년에는 허정무가 소속팀이었던 PSV에인트호벤과 함께 방한해 경기를 펼쳤다. 당시 에인트호벤은 대통령배 축구대회에 출전해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제노아, 뒤셀도르프, 레버쿠젠, 플루미넨시 등이 방한했다.

#2002 월드컵을 유치하라
1990년대 들어 해외 구단의 방한은 조금씩 그 성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2002년 월드컵 유치를 위한 프로모션 행사의 성격을 뛰기 시작했다.
1995년 9월 30일 아르헨티나의 명문 보카주니어스가 방한했다. 한국 대표팀과 경기를 펼쳤다. 보카주니어스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축구 신동 디에고 마라도나가 핵심이었다. 1994년 미국 월드컵 도중 마라도나는 금지약물 복용으로 출전 정지 징계를 받았다. 그 징계가 풀리고 처음으로 뛴 경기였다. 모든 초점은 마라도나에 맞춰졌다. 전세계적인 관심을 받았다. 동시에 한국의 2002년 월드컵 유치에도 관심이 쏟아졌다.
1996년 5월에는 AC밀란과 유벤투스가 내한했다. 모두 한국 대표팀과 경기를 펼쳤다. 한국에서 월드컵이 열리면 엄청난 흥행이 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서울 올림픽 주경기장에 만원 관중이 들어차 엄청난 축구 열기를 보여주었다.
1996년 5월 31일 한국은 일본과 함께 2002년 월드컵 공동 개최를 달성했다. 보카 주니어스, AC밀란, 유벤투스 등을 불러온 것이 큰 도움이 됐다.
#2000년대 클럽의 시대가 열리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이 열렸다. 이후 해외 구단의 방한은 그 궤적을 달리했다. K리그의 전성 시대가 열렸다. 방한 구단들도 대표팀이 아닌 K리그 팀들을 상대하게 됐다.
2004년과 2010년 FC바르셀로나가 방한했다. 2004년 호나우지뉴와 함께 온 바르셀로나는 수원 삼성과 경기를 펼쳤다. 당시 수원은 악착같은 플레이를 펼쳤고 우르모브의 강력한 프리킥 한 방으로 1대0 승리를 차지했다.
2010년 바르셀로나는 리오넬 메시를 앞세워 경기를 펼쳤다. 서울 월드컵 경기장에서 K리그 올스타팀과 경기했다. 메시가 두 골을 넣으며 5대2로 승리했다.
2005년에는 첼시가 방한했다. 스폰서십의 일환이었다. 당시 삼성전자가 첼시를 후원하고 있었다. 삼성전자의 요청으로 첼시는 한국으로 날아와 수원 삼성과 친선 경기를 펼쳤다.
2009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새로운 장을 열었다. 2009년 박지성과 함께 맨유가 방한했다. 세계 최고의 팀 중 하나였던 맨유는 방한 기간 내내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맨유는 한국에 온 김에 구단 차원에서 다양한 마케팅 활동을 벌였다. 몇몇 스폰서십 계약도 이끌어냈다.
2003년에는 피스컵도 시작됐다. PSV에인트호번, 토트넘, 올랭피크 리옹, 함부르크 등이 방한했다.
이렇듯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이유로 구단들을 초청하기 시작했다.
부작용도 있었다. 유벤투스 방한 사태가 대표적이다. 당시 프로모터는 무리하게 유벤투스를 데려왔다. 호날두가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유벤투스를 데려온 것이었다. 호날두는 결국 경기에 나서지 않았다. 이후 프로모터는 법적 분쟁에 휘말리기도 했다.
이제 해외 구단의 방한은 철저히 비즈니스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매년 가을이 되면 각 구단들이 방한을 모색한다. 여러 프로모터들도 뛰어들곤 한다. 그러나 결국 성사가 되는 것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상업적인 성공 여부를 따지게 되는 것이다.
중계권과 스폰서십 여부가 가장 크다. 이 두 가지 요건이 담보되지 않는다면 이벤트가 성사되기 힘들어진다. 코로나 이후 성공한 해외 구단들의 방한들 모두 확실한 중계권료 수입과 스폰서 기업이 있었을 때 가능했다.
과연 이번 토트넘, 뉴캐슬, 바르셀로나의 방한은 어떤 이야기를 쓰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