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이 노벨문학상 작품 폐기한 곳인가요?”…곤혹스러운 경기도교육청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지난해 벌어진 경기도교육청의 ‘도서 폐기 사건’이 재조명 받고 있다. 당시 이 사건은 보수단체의 민원으로 촉발됐고, 결과적으로 총 2500여권의 도서가 폐기 처분됐다. 폐기된 도서 가운데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 포함돼 있다.
11일 경기도교육청 시민자율게시판에는 한강 작가의 작품 폐기 관련 민원들이 잇따랐다.
한 시민은 “노벨문학상 책을 폐기한 경기도 교육청의 무식하고 무지한 처사를 보니 저런 교육청아래 내 자식을 맏기고 있다니 부끄럽고 창피하다”는 항의글을 썼다. 또다른 시민은 “여기가 노벨문학상 ‘소년이 온다’를 유해도서로 지정한 교육청이냐”며 “대단한 교육감을 뽑아놓으셨다”며 일침을 가했다.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조속히 초·중·고 도서관에 다시 배치하고, 청소년 권장도서로 지정해달라고 민원을 제기했다”는 글이 올라왔다.
경기교육청은 논란이 불거지자 이날 별도의 입장을 내고 “경기도교육청은 특정 도서를 유해도서로 지정하고 폐기를 지시한 적이 없다”고 했다.
경기교육청은 “지난해 11월 학생들의 올바른 가치관 형성을 위해 부적절하다고 판단되는 내용이 포함된 도서에 대해서는 학교도서관운영위 협의에 따라 적합한 조치를 취하도록 요청한 바 있다”면서 “그 결과 각급 학교에서 학교도서관운영위원회를 통해 폐기 도서를 선정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경기도교육청이 특정도서를 유해 도서로 지정하고 폐기했다는 건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도교육청의 해명이 군색하다는 반응이 나온다. 당시 공문을 받았던 사서 교사들은 교육청의 공문이 도서를 폐기하라는 압박처럼 느껴졌다는 입장이다. 경기지역 한 사서 교사는 “공문이 접수된 이후 학교장으로부터 ‘그냥 한 권 정도만 폐기하면 안되겠느냐’라는 말을 들었다”며 “공문 자체가 압박이었던 셈”이라고 했다.
박도현 전교조 경기지부 사무처장은 “결과적으로 수많은 책들이 폐기됐지만, 그중에서 실제 유해도서로 분류된 책은 단 한 권도 없었다. 폐기에 명확한 기준조차 없었던 것”이라며 “폐기된 도서를 복구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냈지만, 교육청은 ‘각 학교에서 결정한 일’이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사건은 지난해 ‘청소년 유해도서를 분리제거 해달라’는 내용의 민원을 한 보수단체가 제기하면서 시작됐다. 이에 경기교육청은 같은해 11월 각 학교에 ‘부적절한 논란 내용이 포함된 도서에 대해 협의해 조치하라‘는 취지의 내용을 담은 공문을 보냈다.
당시 학교에 전달된 공문을 보면 “ 학교도서관에 비치된 일부 유해한 성교육 도서에 대해 선정성, 동성애 조장 등 도서를 접하는 청소년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을 우려하는 다수 민원과 도의회 및 국회의 목소리가 있다”며 “부적절한 논란 내용이 포함된 도서에 대해서는 학교도서관 운영위원회 협의 후 협의 결과에 따라 교육목적에 적합하도록 조치해 달라”는 내용이 적혀있다.
경기교육청은 올해 2월쯤에는 “학교도서관운영위원회 운영 현황을 기한 내 제출해달라”며 “학생들의 올바른 가치관 형성을 위해 성교육 도서 선정 및 운영에 각별한 관심을 요청한다”라는 내용의 공문을 보냈다.
공문이 기점이 돼 당시 경기지역 학교 도서관에서는 총 2517권의 도서가 폐기됐다. 폐기된 도서 중에는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도 포함됐다. 경기도 내 한 사립고등학교에서도 <채식주의자> 2권을 폐기한 사실이 확인됐다.
김태희 기자 kth08@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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