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원이를 잊지 말아 주세요”
전문가 “범죄 예방체계 점검 계기로”

“우리 딸을 ‘고교생 살인 사건 피해자 A양’이 아닌, ‘이채원’으로 기억해 주세요.”
31일 찾은 ‘광주 고교생 살인 사건’ 피해자 고(故) 이채원양의 방은 사건이 발생하기 전인 지난 5일에 멈춰 있었다.
책상 위에는 교재와 학용품이 그대로 놓여 있었고, 태블릿에서는 생전 채원양이 즐겨 듣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방 안 곳곳에는 평범한 10대 여학생의 일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마치 사회가 그를 잊어가듯 책상에는 무심하게 먼지만 쌓이고 있었다.
이양의 아버지 이모(49)씨와 어머니 최모(43)씨는 지금도 사건 당일의 순간들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평소 채원양은 학원 수업이 끝나는 자정 무렵이면 부모에게 “귀가했다”는 문자를 남겼지만, 그날따라 아무리 기다려도 문자가 오지 않았고,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고 한다.
40여분 뒤 경찰의 전화를 받고 병원으로 달려갈 때도 교통사고일 줄만 알았지, 딸이 강력 범죄의 피해자가 됐으리라곤 생각치도 못했다고 한다.
이씨는 “채원이는 마지막 순간까지 눈도 감지 못한 채 있었다”며 “부모로서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는 생각에 지금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이씨와 최씨는 이날 이양의 이름을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사건 이후 한 달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사건만 기억하고 정작 채원이라는 아이는 잊어버리는 것 같다는 이유에서다.
재발 방지를 하겠다던 정부·지자체는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고 있고, 누구도 약자 대상 범죄를 막을 제도나 정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
이씨는 “사건보다 이채원이라는 이름이 기억되고,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딸의 이름을 공개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최씨도 “사람들은 사건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채원이가 어떤 아이였는지에 대해서는 점점 잊혀지는 것 같다”며 “또 다른 누군가가 같은 피해를 겪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라고 한숨을 쉬었다.
이양 부모의 말처럼, 정부는 이 사건을 ‘약자인 여성·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강력범죄’라고 규정하고도 지금까지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않은 채다.
이경숙 성평등가족부 성평등정책실장은 지난 11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제16차 여성폭력방지위원회 사전브리핑에서 이양 사건을 두고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도심에서 살해한 강력범죄”라면서 “약자인 여성 청소년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한 폭력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번 사건이 지난 2016년 서울 강남역 인근 공중화장실에서 30대가 일면식 없는 20대 여성을 흉기로 살해한 ‘강남역 살인사건’, 2022년 서울 신당역에서 30대가 20대 여성 역무원을 장기간 스토킹한 끝에 살해한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 등과 겹쳐 보인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정부는 구체적인 제도 개선이나 정책 변화를 보여준 것은 없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이양 사건을 단순한 개인의 비극으로 마무리지을 것이 아니라, 범죄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한 폭력으로서 범죄예방 체계를 전반적으로 점검해야 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한 목소리를 냈다.
문현철 호남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현행 자치경찰법에 도보순찰과 범죄 취약지역 정기 점검, 주민 참여형 치안 활동 등을 명문화해 예방 중심의 풀뿌리 치안이 작동할 수 있도록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정규 호남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도 “범죄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한 범죄를 특정해 강력한 처벌을 통해 경각심을 줄 뿐 아니라, 범죄가 반드시 적발된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한편 이양은 지난 5일 새벽 0시10분께 광주시 광산구 월계동 남부대 인근 인도에서 귀가 도중 장윤기(24)씨가 휘두른 흉기에 찔려 숨졌다.
/글·사진=하성민 기자 hsm@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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