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는 싸우고, 팥은 제 빛 찾아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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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덥더니 그새 쌀쌀하다.
친환경 기피제로 한고비 넘겼나 싶던 배추가 또 탈이 났다.
배추 때문에 심기가 불편한데 밭장은 마음이 콩밭, 팥밭에 가 있다.
지난봄 한 움큼씩 심은 콩과 팥이 벌써 제법 여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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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고양 편
그리 덥더니 그새 쌀쌀하다. 모깃불 피우던 화구에 두툼한 마른 장작을 넣는다. 허, 참, 날 얄궂다.
친환경 기피제로 한고비 넘겼나 싶던 배추가 또 탈이 났다. 날이 서늘해질 무렵 찾아오는 불청객은 단연 진딧물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그분’이 오셨다. 진딧물은 한번 나타나면 삽시간에 밭 전체로 번진다. 가능한 한 빨리 발견해 아예 뽑아내야 한다. 2024년 10월19일 텃밭에 비상경계령이 내려졌다.
“진딧물까지 왔습니다. 마요네즈 필요하네요.”
먼저 도착한 막내가 단톡방에 사진과 함께 글을 올렸다. 진딧물은 난황유로 다스린다. 물과 식용유, 달걀노른자와 친환경 세제를 조금 섞어서 만든다. 교과서에선 그렇게 가르치는데, 살다보면 ‘요령’이란 게 생기기 마련이다. 마요네즈는 주성분이 달걀과 기름이다. 언제부터인지, 누가 알려줬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 텃밭 동무들은 마요네즈를 물에 희석해 뿌려주면 난황유와 효과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마요네즈 한 통 챙겨 밭으로 향했다. 부지런한 막내는 벌써 돌산갓을 솎고, 늦물 가지와 고추까지 따놨다. 유례없이 기괴했던 날씨처럼 올해는 작황도 기이해서, 10월 중순인데도 가지와 고추가 주렁주렁이다. 배추 심느라 뽑아낸 방울토마토를 그냥 뒀다면 토마토 값이 한우 대접을 받는 요즘 흐뭇하지 않았을까 싶어 아쉽다.
배추부터 살폈다. 제법 차들기 시작한 속을 펼치니 좁은가슴잎벌레가 우수수 우수수 떨어진다. 날이 차지면 모습을 감추기 마련인데, 올핸 배추의 속까지 야무지게 파먹고 있다. 아주 전성기다. 배추벌레도 군데군데 보인다. 기피제 피해 이사 갔던 녀석들이 단체로 돌아온 모양이다. 배추밭 열한 고랑을 다 뒤졌는데, 진딧물 내리신 배추는 다행히 세 포기뿐이다. 미련 없이 뽑아 평상 옆에 던져놓고, 마요네즈 협찬 난황유를 만들어 배추 포기마다 정성껏 뿌려줬다. 진딧물 몰아내는 부적이다. 제발.
배추 때문에 심기가 불편한데 밭장은 마음이 콩밭, 팥밭에 가 있다. 지난봄 한 움큼씩 심은 콩과 팥이 벌써 제법 여물었다. 11월 초쯤 서리가 내리면 거둘 요량이었는데, 밭장이 그새를 못 참고 꼬투리를 따고 있다. 여물긴 여물었으되 콩도 팥도 제 색을 내려면 좀더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도란도란 깐 옅은 색 콩과 팥을 말리기 위해 평상 위에 널었다. 반바지를 입고 왔더니 어느새 살짝 한기가 느껴진다.
17세기에 문을 연 독일 뮌헨의 어느 양조장에서 왔다고 쓰여 있는 맥주 캔을 땄다. 얼마 전 중국에 다녀온 막내는 광둥성에서 잡아 말렸다는 어포를 들고 왔다. 전날 회식으로 과음했다는 밭장은 건네는 맥주 캔에 손사래를 치며 맹물만 마신다. 가을이 깊숙해진 밭에서, 가득 찼으되 곧 비워질 땅을 바라본다.
“내년엔 아예 쉬는 셈 치고, 콩하고 팥만 뿌려볼까요?” 막내가 짐짓 심각하게 말한다. 콩류를 심으면 흙이 좋아진단다. 팥도 ‘빨간 콩’이다. 한 해를 걸러 지긋지긋한 좁은가슴잎벌레와 헤어질 수만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싶기도 하다. “하긴 호박, 오이도 연작이고, 배추도 그러네. 밭 배치를 바꿀 때가 됐기는 하네.” 그러고 보니 3년 전 크게 밭을 뒤집은 뒤 계속 같은 자리에 같은 작물을 심고 있다. “그럼 저쪽에다 잎채소나 몇 고랑 내고, 진짜 한번 질러볼까?” 그리고 아무도 말이 없었다.
글·사진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 농사를 크게 작게 지으면서 생기는 일을 들려주는 칼럼입니다. 지역이 다른 세 명의 필자가 돌아가며 매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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