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미슐랭 스타들]⑩소설한남, 한식의 새로운 서사를 그릇에 담다

이정수 기자 2024. 10. 12.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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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슐랭 1스타의 엄태철 셰프
한식의 새 장막을 여는 ‘소설’ 같은 곳을 꿈꾸다
미슐랭 1스타 레스토랑 소설한남의 엄태철 셰프. /김지호 조선일보 기자

가끔 우리는 인생을 한편의 소설과도 같다고 얘기하곤 한다. 희로애락의 감정들이 피워내는 일련의 사건들이 마치 한편의 작품과도 비슷하게 흘러가기 때문이다. 또한 유년, 청년, 장년, 노년으로 접어드는 삶의 단계도 소설의 기승전결과도 유사하다. 모두의 주연은 다르지만 각자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는 점도 비슷하다.

삶을 하나의 소설과도 비슷하게 보는 셰프가 국내에도 존재한다. 바로 미슐랭 1스타의 엄태철 셰프다. ‘소설한남’, 그의 레스토랑 이름에서도 그 비슷한 철학을 느낄 수 있다. 다만 그만의 소설에서 주인공은 바로 ‘한식’이다.

흥미롭게도, 엄 셰프의 삶이라는 소설에서 한식은 초반부에 크게 등장하진 않는다. 미국, 스페인 등 여러 요리 경험을 쌓으며 오히려 한식에 대한 열망이 더 커진 경우다. 처음 조리 기구를 잡았을 당시에도 그는 한식을 꼭 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고 했다. 오히려 앞으로 ‘어떤 음식을 해야 할까’ 하는 막연함이 커졌다고 한다. 그러던 중, 유학을 마치고 일하던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에서 그는 마침내 답을 찾았다. 그가 걸어가야 할 길이 바로 ‘한식’임을 깨달은 것이다.

뚜렷한 목표만큼이나, 엄 셰프가 선보이는 한식은 매우 직관적이다. 음식의 담음새, 재료, 맛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한식을 그대로 표현하고자 한다. 따라서 그는 한식을 한식답게 만드는 본질을 담아내기 위해 그는 끊임없이 탐구한다.

그의 레스토랑 ‘소설한남’에서 그려내는 한식은 단순히 재료의 조합에 그치지 않는다. 한국의 전통적인 식문화, 즉 먹는 방식까지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쌈에 여러 재료를 올려서 먹는 방식, 고운 쌀로 만든 떡, 밥과 함께 어우러지는 다양한 반찬들까지, 모든 기승전결은 한식의 정수를 담아낸다.

소설한남의 시그니처 메뉴 중 하나인 '쌈 요리'. 다시마, 양배추 등을 이용해 한국의 맛을 살려내려 했다. /김지호 조선일보 기자

지난여름 시즌에도 그의 고집스러운 철학은 제철 재료에서 엿볼 수 있다. 덕자 병어, 애호박, 복숭아, 초당 옥수수 등으로 그는 그만의 이야기를 새롭게 풀어냈다. 특히 코스의 첫 부분에 등장하는 아뮤즈 부쉬부터 한국적인 맛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 다시마, 양배추, 곰취를 이용한 세 가지 쌈밥과 바람떡이 그 예다.

다시마 쌈밥은 잘 숙성된 다시마의 향이 입안 가득 퍼지고, 새우의 향긋함이 어우러져 해초의 감칠맛을 더했다. 바람떡은 성게의 농후한 맛이 입안에 파도처럼 밀려오고, 바삭하게 튀긴 감태가 고소한 향을 물결처럼 더한다. 양배추 쌈밥은 ‘절제된’ 한국의 맛을 담았다. 오직 밥과 양배추, 꽈리고추, 멸치로 만든 양념장만이 서로 섞이며 입안에서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덕자 병어 전과 돼지 등 갈빗살로 만든 떡갈비는 한국 전통 잔치 음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듯하다. 병어는 호박 꽃 속에 담겨 꽃의 향긋함과 함께 고소한 맛이 퍼지고, 새우 소스가 해산물의 풍미를 한층 끌어올린다. 돼지 등갈비로 만든 떡갈비는 전복이 더해져 쫄깃한 식감을 자랑한다. 함께 곁들인 고사리와 아스파라거스를 넣은 질감 있는 밥은 부드럽게 넘어가며 싱그러움을 더한다. 다채로운 맛들이 서로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것. 한식만의 특징을 그대로 담아낸 접시다.

소설한남의 덕자 병어 전. 향긋한 호박꽃 안에 병어로 속을 채웠다. /김지호 조선일보 기자

가을 역시 풍성한 맛의 향연이 이어진다. 봄과 여름을 지나 구수함이 절정에 이른 햇고구마, 토란 등이 주인공이다. 먼저 속을 깨워주기 위해 달콤한 고구마와 찹쌀, 우유, 무화과 등으로 만든 죽이 준비돼 있다. 죽의 부드러움 속에 짭짤한 캐비어를 찾아내는 것도 묘미다. 이 외에도 코끼리조개, 방풍나물, 살이 통통한 숫게 등으로 가을의 풍성함을 그려낸 소설한남은, 일 년 중 가장 깊고 풍요로운 계절의 맛을 한껏 담아내고 있다.

사실 엄 셰프의 여정은 아직 시작에 불과하다. 한식이라는 거대한 문화 속에는 그가 풀어내야 할 줄거리가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비록 자신은 조연에 머무를지라도, 그가 써 내려가는 소설 속 한식이 주연으로 우뚝 서서 더욱 빛나기를 바랄 뿐이다.

―간단한 약력 소개 부탁드린다.

“소설한남의 엄태철이다. 중학교 때부터 요리에 관심을 가졌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진로도 그쪽으로 정했다. 요리를 하며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내게 희열을 줬던 것 같다. ‘품 서울’, ‘모수’와 같은 훌륭한 레스토랑에서 일하면서 한식에 대한 열정도 커졌다”

소설한남의 돼지 등 갈빗살로 이용한 떡갈비와 고사리, 아스파라거스가 등이 들어간 밥. 육즙이 가득한 떡갈비와 나물향이 은은하게 나는 부드러운 밥 곁들이면 풍미가 좋다. /김지호 조선일보 기자

―소설한남에 대한 설명 부탁드린다.

“소설한남은 2018년 10월에 문을 열었다. 다들 이름에 대해 많이 물어본다. 소설한남은 여러 의미를 지니고 있다. 특히 소설은 소설책과 같은 뜻도 지니고 있지만 한자로 풀이하면 ‘수수하고 정갈하다’는 의미도 지닌다. 한식이 갖고 있는 절제미와도 비슷하다. 또한 영문으로 쓰면 ‘쏘 서울(So Seoul)’로도 들린다. 한국, 그중 중심이 되는 서울을 기점으로 현대적인 한식을 보여주고 싶어 이 이름으로 짓게 됐다.”

―소설한남의 한식은 어떤 한식인가.

“누가 봤을 때에도 한식처럼 느껴지길 바란다. 먹었을 때 맛있는 것은 물론이고 한식이라는 느낌이 들어야 한다. 그래서 그 형태도 많이 고민한다. 재료도 100% 한국적인 것을 쓰려고 하는 것도 있지만 한식에서만 볼 수 있는 것들도 포함시키려 노력한다. 쌈, 비빔밥 등 한국적인 요소들 말이다. 코스 중간중간에 떡과 같은 한 입 거리를 주는 것도 마찬가지다. 단순 갈비, 비빔밥과 같이 한식을 선보이는 게 아니라 한국의 문화도 녹여내고 싶었다. 다만 억지로 한식임을 강조하고 싶지 않다. 한식임을 보여주기 위해 필요한 부분만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식의 주 철학 중 하나도 절제지 않는가.”

엄태철 소설한남 셰프가 음식을 준비하는 모습. /김지호 조선일보 기자

―가장 한국스러운 맛은 무엇인가.

“가장 한국스러운 맛을 하나만 꼽긴 어렵다. 그러나 한국스러운 맛을 잘 나타내는 메뉴들은 많다. 가령 일식하면 떠올리는 것이 있다면 가쓰오부시(가다랑어 포)를 이용한 맛일 것이다. 한식은 그 역할을 나물이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참기름으로 무쳐낸 나물은 한식을 잘 표현한다. 생각해 보니 참기름도 마찬가지다. 찜, 양념장 등 안 들어가는 곳을 찾기가 힘들다. 그리고 곰탕, 설렁탕 등 깔끔한 국물 속에서도 한국을 느낄 수 있다.”

―완연한 한식을 하고 싶다고 했는데, 그 의미가 궁금하다.

“조심스럽지만 한식의 정의를 내리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한 문장, 한 단어로 한식을 말하긴 어렵다. 그렇지만 우리는 먹었을 때 무엇이 한식인지 안다. 그 모호하면서도 뚜렷한 경계를 표현하고 싶다. 맛, 보이는 것 모두 한식이길 바란다. 때론 지인들이 왜 틀을 정해두냐고, 어려운 길을 스스로 걷냐고 묻기도 한다. 양식이란 범위에 더욱 어울리는 재료들을 보다 다채롭게 사용한다면 더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는 것을 안다. 그러나 한국 사람이 한국 요리를 한국스럽게 하고 싶은 것은 내 고집이다.”

―소설한남이 한식을 재구성하는 방식은 어떠한가.

“먼저 기존 한식을 보며 영감을 받는다. 한국만이 갖고 있는 특징인 문화에서 말이다. 사실 한국 음식을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쌀이다. 아침, 점심, 저녁 모두 들어가는 게 쌀이다. 그 쌀로 예시를 든다면, 절구에 빻아서 떡처럼 만들어보기도 하고, 가루를 내 쪄보기도 하고, 그냥 익혀보기도 하고 하면서 여러 방향을 시도해 본다.”

―소설한남의 시그니처 메뉴가 있다면 무엇인가.

“쌈 관련 메뉴라고 말하고 싶다. 지난여름에도 다시마, 곰취, 양배추 등을 이용한 쌈 요리를 많이 선보였었다. 쌈에는 여러 형태가 있다. 구절판을 이용해 쌈을 만들어 보기도 했다. 여름 구절판이라 해 닭 육수와 밀가루를 섞어 밀전을 만들고, 이어 닭 가슴살, 전복 등 여러 보양 재료를 넣어 먹는 메뉴다. 또 만두도 일종의 쌈과 비슷하지 않나.”

―개발하고 싶은 새로운 한식 문화가 있다면 무엇인가.

“정말 맛있는 밥을 만들어보고 싶다. 사실 밥은 그 가치를 존중받지 못해온 감이 있다. 우리 모두는 안다. 좋은 쌀로 갓 지어낸 밥은 그 자체로도 너무 맛있다는 것을 말이다. 한식에서 밥은 정말 중요하다. 우리가 속히 말하는 밥집의 메인이 돼야 할 것은 사실 밥이다. 그러나 찌개, 반찬 등에 밀리는 것 같아 아쉽다. 보온통에 밥을 넣고 주문이 들어올 때마다 푸는 것은 밥의 맛을 온전히 느끼지 못한다. 이 외에도 분식, 한상차림 등 욕심나는 것들은 많다.”

―어떤 셰프로 기억되고 싶은가.

“요리에 진심인 셰프로 남고 싶다. 또한 한식이 발전하는데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다면 좋겠다. 나이가 들어도 주방에서 계속 요리하는 셰프가 되고 싶다. 앞으로도 주방에서 하고 싶은 요리를 꾸준히 할 수 있길 바란다. 소설한남 역시 고객들이 들어와서 나갈 때까지 만족시키는 공간이 되도록 노력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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