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와 비장애 경계 허물다…예술로 이은 ‘포용의 다리’
- 스포원파크 내 창작공간 ‘두구’
- 부산 유일 장애 포용예술 실천
- 장애·비장애인 작가 창작 협업
- 시민과 함께 하는 프로그램도
- “장애인, 사회와 연대하게 도와”
- 지역 장애예술 시작은 ‘온그루’
- 2020년 수영 비콘그라운드에
- 그들만을 위한 작업공간 조성
- 장기 입주 보장과 판매 지원도
- 부산문화재단 “영역 확장할 것”
‘장애’는 사회적 약자를 보듬는, 포용예술이 가장 두드러지는 분야다. 지난해 12월 부산문화재단이 부산 금정구 두구동 스포원파크 안에 문을 연 창작공간 두구는 부산에선 유일하게 장애 분야 포용예술을 실천하는 공간이다. 장애를 가진 작가 2명과 비장애 작가 3명, 그리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한데 섞인 예술 단체 2팀이 이곳에 둥지를 틀고 있다.
지난 22일 오후 창작공간 두구를 찾았다. 이날은 두구가 처음으로 마련한 개방 행사인 오픈스튜디오가 열린 날이다. 입구로 들어서니 벽을 따라 작업실 문이 모두 활짝 열려 있었다. 방을 살짝 들여다봤더니 붓과 물감, 이젤 등이 놓인 작업실 풍경이 펼쳐졌다. 벽에는 방 주인이 세상에 내놓은 작품이 빼곡하게 걸려 있었다. 이날 방문객은 자유롭게 작업실을 둘러보고 작품을 감상했다. 자리에 있던 작가들은 작업실을 찾아온 방문객들과 작품을 놓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반대편 강의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러 명의 목소리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두구에 입주한 무용단체인 무브먼트 프로젝트 도로시가 연 커뮤니티 프로그램 ‘도로시와 두둥실’ 현장이었다.
“자, 제 머리 위에 있는 촛불을 꺼주세요” 머리 위에 촛불 모양으로 손을 얹은 진행자의 말에 참가자들은 입으로 후후 불거나 손을 연신 흔들었다.
“입으로 숨을 한 번 쉬어봤는데요. 이번엔 같은 방식으로 풍선을 불어보겠습니다.”
하얀 풍선을 하나씩 받은 참가자들은 열심히 풍선을 불었다. “플루트 불 때처럼 하면 돼. 한 번만 더 해볼래?” 발달장애 자녀와 함께 온 한 참가자는 옆에 앉은 아이에게 연신 말을 건넸다.
두구 한가운데 뻥 뚫린 다목적 공간에서는 여러 가족이 모여 앉아 만들기에 열중했다. 역시 입주 작가들의 작품을 모티브로 한 프로그램 ‘불편한 즐거움이 있는 공간’ 현장. 참가자들은 몸이 불편한 장애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를 녹여낸 이야기를 듣고 주인공들이 함께 생활할 아지트를 만들고 있었다. 이날 두구에서는 하루 종일 5개 프로그램이 쉼 없이 이어졌다. 입구에서는 조태성 작가의 무료 이름 그림 그리기 이벤트도 열렸다. 조 작가는 자폐스펙트럼 장애가 있다.
발달장애 자녀와 함께 이날 오전부터 여러 프로그램에 참여한 손우정(여·57) 씨는 “동정이나 시혜의 시각으로는 절대 장애를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장애인이 관계를 맺고 사회와 연결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두구는 그것이 가능한 공간”이라며 “내 아이가 직접 참여하지는 못하더라도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섞여 예술을 즐기고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어 의미 있다”고 말했다.
▮온그루에서 싹튼 장애 예술
부산문화재단이 장애예술에 관심을 쏟기 시작한 것은 2019년께부터다. 홍티아트센터, 감만창의문화촌 등 예술인을 위한 창작 공간은 이미 운영하고 있었지만 장애를 가진 예술인이 좀 더 자유롭게 작품 활동할 공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 이런 고민은 2020년 11월 창작공간 온그루 조성으로 이어졌다.
부산 수영구 비콘그라운드에 자리 잡은 온그루는 장애예술인만을 위한 창작공간이다. 288㎡ 규모로 5개의 개인 작업실과 전시실 등을 갖췄다. 2020년 문을 연 뒤 지금까지 64명의 작가가 이곳을 거쳐 갔다. 현재는 미술 음악 무용 분야 개인 작가와 오케스트라, 미술단체 각각 한 개 팀이 입주해 있다. 부산문화재단 강주형 대리는 “장애 작가들은 공모 지원서를 쓰는 것부터 더 힘들게 느낀다. 긴 호흡으로 작품 활동을 할 필요도 크다”며 “일반 레지던스는 6개월 단위도 많지만 온그루는 한 번 입주하면 최소 1년 길면 2년까지 기간을 길게 잡는다”고 설명했다.
작가로서 존재감을 이어갈 수 있도록 작품 활동을 내보일 기회를 끊임없이 제공하는 것도 온그루의 역할이다. 최근에는 전시에서 또 한발 나아가 판매의 장도 펼쳤다. 온그루 건물 안에 전시장을 열고 입주 작가의 릴레이 전시를 열고 있는데, 특별히 한 켠에 작품 판매 섹션을 마련했다. 여기서는 작가의 손을 거친 소품, 굿즈가 전시된다.
강 대리는 “장애 작가들은 대부분 낮에 단순노동 등 공공근로를 하며 생활을 이어간다. 근무시간이 길다 보니 밤이나 주말 말고는 작품 활동을 할 시간이 없는 경우가 많다”며 “작품 판매를 통해 이 같은 어려움을 해결하고 장애예술인이 자립할 기회를 주기 위해 처음 판매에 나섰다”고 말했다. 온그루는 올해 말까지 입주 작가의 작품을 순차로 선보일 예정이다.
지난해 7월 온그루와 인연이 닿아 입주한 조태성 작가의 어머니인 박경옥(56) 씨는 “집에서 그리는 것과 작업실에서 그리는 건 확연히 다르다. 장소가 주는 힘이 크다. 그런 면에서 온그루는 장애 예술인에게 매우 필요한 공간”이라며 “다양한 전시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것도 큰 장점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알려지고 초청받아 올해만 열 번의 전시를 열게 됐다”고 말했다.
▮장애 예술을 넘어 포용예술로
온그루에서 장애예술지원의 싹을 틔운 부산문화재단은 지난해 포용예술로 범위를 확장했는데, 그 결과물이 바로 창작공간 두구다.
두구의 지향점은 단순히 장애예술인 지원에 머물지 않는다. 포용이라는 단어에서 볼 수 있듯 장애를 넘어 장애예술인과 비장애예술인이 소통하고 협력하는 데 방점이 찍혀 있다. 경계와 구분을 짓는 것이 무의미한 공간이라는 의미다.
지난 5월 첫 정식 공모를 거쳐 입주한 7팀은 처음부터 협업프로젝트 ‘두구다움’을 진행하고 있다. 두명 또는 두 팀의 작가가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창발플레이’는 핵심 프로그램이다. ‘창발플레이’ 기획을 맡은 문화매개실천연구소 이지혜 대표는 “장애예술인끼리만 모여있으면 서로를 돕기 어렵다. 더 퇴화하거나 사업을 위한 사업이 되고 만다”며 “장애·비장애 예술인이 함께 한다는 건 동료가 생긴다는 의미다. 당장 어떤 성과가 안 나오더라도 이후 같이 활동할 물꼬를 트는 것”이라고 말했다.
두구에 입주한 신수항 작가는 “지체장애를 갖고 있다 보니 작업에 감각에 대한 이야기를 녹여넣는 경우가 많다. 협업을 통해 다른 감각을 가진 사람들의 경험을 이해하게 돼 많은 도움이 되었다”며 “두구에 들어오기 전에는 나 스스로 장애와 비장애를 구분했지만 여기서 장애 비장애 예술인과 한데 어울리니 구분 지어놨던 경계가 사라졌다”고 말했다.
비장애예술인으로 입주한 김리아 작가는 “여성·인권 등 분야에 관심이 많았다. 사회에서 차별받는 분야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면 시너지가 날 것이라 여겨 입주했다”며 “이전까지는 내 자신에 대해 들여다보고 내가 느낀 것만 작품에 담았지만, 두구에서 활동하면서 타인에 대한 생각이 많아졌다”고 설명했다. 창작공간 두구 김미지 대리는 “협업을 위해 토요일에도 온라인 줌으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엔 추상적이었지만 많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럽게 팀이 꾸려졌고, 매개자가 매칭되면서 협업 프로젝트가 이어졌다”고 덧붙였다.
자폐스팩트럼 장애를 가진 신현채 작가(작가명 셰이드신)는 “두구에 오기 전까지는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작업밖에 하지 않았다. 두구에 입주해 다른 작가들과 소통하면서 그림만으로는 내 이야기를 드러내는 데 한계를 느꼈다. 음악, 퍼포먼스, 설치미술 등을 더 더양하게 하고 싶어졌다”며 “다른 사람과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보려 한다”고 밝혔다.
부산문화재단 조정윤 생활문화본부장은 “개방된 항구도시 정서가 분명한 부산은 포용예술을 꽃피우기 좋은 곳”이라며 “온정적 관점으로 장애작가를 바라보는 것은 포용예술이 아니다. 비장애 작가와 함께 새로운 예술영역을 만들고, 작품이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두구의 궁극적인 목표”라며 “앞으로 이들이 작품을 판매하고 나아가 해외로 진출하는 데에도 역할을 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공동기획 : 국제신문, 부산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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