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한·미 첫 합동 정보전, 미션은 서울 침투·일제 교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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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전선, 정보전쟁] 대한독립 정보전 〈상〉 - 독수리 작전
광복의 해 1945년은 우리 정보사(史)에도 명암이 교차한 한 해였다. 한민족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었던 최초의 한·미 합동 정보전이 8월의 태양만큼 뜨겁게 시작됐으나, 일본의 항복으로 갑자기 중단돼 차갑게 식었다. 바로 미 중앙정보국(CIA) 전신인 전략사무국(OSS)과 중국 충칭의 임시정부 광복군이 합동으로 전개한 독수리 작전(Eagle Project)의 운명이 그렇게 끝났다.
![‘독수리 작전’의 한미 연합 지휘부. 아랫줄 가운데가 한국광복군 2지대장 이범석 장군이다. [사진 독립기념관]](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4/01/joongangsunday/20250401143704939pepg.jpg)
독수리 작전은 1941년 일본의 태평양전쟁으로 잉태되기 시작했다. 미국은 이 전쟁으로 미군의 희생이 늘어나자 전쟁 조기 종결을 위해 대일 정보전 강화를 모색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이 최적 교두보로 떠올랐다. 일본과 가깝고 외모가 유사해 잠입이 유리할 뿐만 아니라, 강한 반일 정서는 대일 정보활동의 중요한 동력이 될 수 있다고 봤다. 이에 OSS를 비롯해 연방수사국(FBI)·해군정보국(ONI)·육군정보국(MIS)은 모두 한·미 합동 정보전의 효과와 타당성을 높이 평가하면서 구체적으로 구상하기 시작했다.
특히 1944년 들어 유럽의 2차 대전 전세가 연합국으로 기울어 전략적 여유가 생긴 미국은 마지막 저항세력인 일본에 전력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중국 충칭의 임시정부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1944년 10월 이범석 광복군 참모장(제2지대장)이 미군에게 광복군 요원들을 훈련시켜 한반도와 일본에 침투시키는 정보전을 벌이자고 제안했다.
이즈음 발생한 한국 학도병들의 일본군 탈영 사건은 합동정보전 추진을 더욱 가속했다. 1945년 1월 31일 김준엽(전 고려대 총장), 장준하 등 학도병들이 일본군을 탈영해 무려 6000리(2300㎞)를 걸어 충칭 임시정부에 도착한 사건이 발생하자, 연합국 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를 본 미 정보당국은 일본군 내부사정을 잘 알고 있는 이들을 적극 활용하는 방안을 생각했다. 목숨 걸고 6000리를 걸어온 결기와 용기, 모험심으로 봐서 정보요원 기질도 충분하다고 봤다.
![‘독수리 작전’을 합의한 김구 주석(앞줄 왼쪽)과 도노번 국장. [사진 위키백과]](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4/01/joongangsunday/20250401143706418yzsf.jpg)
우선 OSS 중국지부는 4월 9일 중국 시안(西安)에 한국 침투의 전초기지가 될 OSS 야전지휘부를 설립하고 광복군의 이범석과 OSS의 클라이드 서전트 대위를 연합지휘관으로 임명했다. 서전트는 컬럼비아대 박사로 중국 청도대 교수와 주중 미 대사 특별보좌관을 거쳐 OSS장교가 된 인재였다. 이어 5월 11일 투차오(杜曲)의 광복군 제2지대 본부에 합동훈련소를 설치해 곧바로 훈련에 돌입했다.
50명이 입교한 1기생 훈련은 무난히 진행됐다. 여기에는 일본군을 탈영한 김준엽·장준하·윤경빈 등 19명이 입교해 주축을 이뤘다. 훈련은 주로 군사·정치정보 획득, 신분위장, 미행 따돌리는 방법 등 기본적인 스파이 훈련부터 시작해 한국침투 후 일본군대 교란, 일본에 부역하는 한국인 제거, 대일 항전을 위한 지하조직 구축 등 후방교란을 위한 특수훈련까지 빡빡하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8월 4일 1기생 50명 중 38명이 혹독한 훈련을 모두 통과해 드디어 비밀 정보요원으로 탄생했다. 8월 7일 OSS와 임정 지휘부도 격려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OSS의 도노번 국장과 김구 주석은 “지금 이 시간부터 미 합중국과 대한 임시정부는 일본을 목표로 합동 비밀정보전을 개시한다”고 공동 선언했다. 독수리 요원들도 조국에 직접 잠입한다는 기대감과 사명감에 한껏 부풀어 있었다. 고된 훈련의 결실이 손에 잡힐 듯했다.
![‘독수리 작전’ 훈련을 받는 광복군 대원들. [사진 독립기념관]](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4/01/joongangsunday/20250401143707869bfhf.jpg)
독수리팀은 서둘러 윌리스 버드 중령과 이범석과 서전트 등 22명을 꾸려 8월 18일 오전 5시30분 C-47 수송기에 몸을 실었다. 무거운 침묵 속에 중국 시안을 출발한 수송기는 오전 9시30분 당시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했다. 이들을 맞이한 사람은 일본의 조선군사령관 고즈키 요시오(上月良夫) 중장이었다. 그는 본국으로부터 어떤 지침도 받지 못했다며 ‘안전을 보장할 수 없으니 즉시 떠나라’고 주장했다. 독수리팀은 전쟁포로 보호라는 평화적 목적이라고 끈질기게 설득했다. 그러나 요시오는 기관총과 박격포로 위협하는 등 완강히 저항했다. 결국 독수리팀은 8월 19일 오후 6시 중국으로 되돌아 왔다.

또한 독수리 작전이 중단된 후 중국·소련의 독수리 요원 포섭 노력이 집요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며 이 문제도 공동 대응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1945년 10월 1일 트루먼 대통령이 OSS 해체를 명령하면서 이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 미국의 군사 목적과 우리의 독립 목적이 결합한 특수 정보전이 제대로 된 작전 한번 펼쳐보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광복군 요원들의 장탄식이 아직도 귓전을 맴도는 듯하다.
오늘의 우리 자세도 아쉬운 점이 없지 않다. 독수리 작전이 남겨준 숭고한 유산들을 얼마나 잘 계승 발전시켰는지 자성할 점이 없지 않아서다.
어느 시대건 어느 국가건 독립을 위한 정보전은 그 나라의 역사가 된다. 나라 잃은 국가가 정식군대 없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비밀 정보조직이 중요한 임무를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대표적이다. 이스라엘의 독립에는 당시 유대인 비밀조직인 하가나(Haganah)가 아랍국가들의 군사정보를 수집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래서 당시 하가나의 주요 조직은 오늘날 이스라엘의 모사드(해외정보), 신베트(국내정보), 아만(군 정보)으로 계승돼 세계적 정보기관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우리는 독수리 작전에 관한 역사적 기록마저 아직 완전히 발굴하지 못하고 있다. 가령, OSS는 독수리 작전 훈련과정을 기록영화로도 촬영해 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아직도 이를 발굴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독수리 작전은 최초의 한·미 합동 정보전이라는 기념비적인 의미도 있다. 이를 명분 삼아 한·미 정보동맹으로 발전시키는 것은 오늘의 우리 몫이다. 미국과 영국도 2차 대전 당시 정보협력을 전후 ‘파이브 아이즈(Five Eyes)’라는 정보동맹체로 발전시켰다. 이처럼 우리도 2차 대전 정보협력을 토대로 한미 정보동맹을 기대해 봄 직하나, 아직 깊은 논의는 없어 보인다.
오늘 3·1절이어서 이런 아쉬움이 더 크게 느껴진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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