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건파’ 일 이시바 총리, 한·일관계 실리적으로 바꿀까
내년 한·일 정상화 60주년 앞두고 갈등 어떻게 대처할지 주목
[주간경향] 지난 10월 1일 일본에서 3년간 집권한 기시다 후미오 내각이 물러나고 이시바 시게루 일본 자유민주당 신임 총재(67)가 제102대 총리로 취임했다. 이시바 총리는 지난 9월 27일 자민당 총재 결선투표에서 215표를 받아 다카이치 사나에 경제안보상(194표)을 제쳤다. 당내 소수파로 그간 총재 선거에서 4번(2008·2012·2018·2020)이나 고배를 마신 끝에 거둔 승리다.
이시바 총리는 취임과 동시에 새 내각을 정식 발족했다. 이시바 내각 역시 집권 자민당 소속으로 전반적인 국정 운영 틀은 기시다 내각과 유사할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그간 이시바 총리가 안보·역사관 등과 관련해 당내에서 비주류의 목소리를 내온 만큼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남아 있다.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맞는 내년에 이시바 내각이 한국과의 외교관계를 어떻게 이어나갈지도 주목된다. 양국은 강제동원·위안부 피해자, 사도광산 세계문화유산 등재 등 문제를 두고 갈등을 빚고 있다.
‘소수파’가 총리 자리에 오르기까지
이시바 총리는 정계에 41년간 몸 담아온 ‘정치 베테랑’이다. 그의 아버지 이시바 지로 역시 정치인으로 돗토리현 지사와 참의원 의원을 지냈다. 이시바 총리는 게이오대 법학과를 졸업한 뒤 은행원으로 일했다. 아버지가 사망한 뒤 아버지 친구인 다나카 가쿠에이 전 일본 총리에게 정계 입문을 권유받아 1983년부터 다나카 전 총리를 보좌했다. 29세였던 1986년에는 당시 기준 전국 최연소 중의원(하원의원)으로 당선됐다. 이후 방위청 장관, 방위상, 농림수산상, 지방창생담당상 등을 역임했다. 자민당 간사장 등 당내 요직을 맡기도 했다.
그는 정치적 견해와 개인 성향 때문에 자민당에서는 줄곧 소수파였다. 아베 신조 전 총리를 필두로 뭉친 ‘아베파’가 맹위를 떨치던 2012년, 그는 계파가 없는 의원 중심의 ‘무파벌 연락회’를 주도했다. 2015년 아베 전 총리가 다시 총재로 선출되자 그는 19명의 정치인과 함께 ‘수월회’를 공식 결성했다.
2018년 ‘반아베 노선’을 내세우며 자민당 총재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2년 후 아베 전 총리가 건강 악화로 사임하면서 열린 총재 선거에서도 아베 전 총리가 후계자로 낙점한 스가 요시히데 당시 관방장관에게 밀렸다.
지난해 터진 자민당 비자금 스캔들은 이시바 총리에게 기회였다. 자민당 현역 의원 85명이 정치자금 모금 행사 입장권을 팔아 얻은 이익을 보고서에 기재하지 않아 비판받았고, 기시다 전 총리는 사임 압박을 받았다.
일본 언론은 이번에 이시바 총리는 자민당원들이 ‘덜 나쁜 사람’을 선택했기 때문에 당선됐다고 분석했다. 경쟁자였던 다카이치 경제안보담당상은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공언하는 등 강경보수 쪽에 치우친 행보를 해 당원 사이에 우려의 목소리가 퍼졌다고 요미우리신문은 전했다. 요미우리신문은 “기시다 정권에서 개선된 한·일관계가 훼손돼 한·미·일 연계에 금이 가면 러시아, 중국, 북한의 불온한 움직임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견해가 다카이치를 열심히 지지한 세력에게 브레이크가 됐다”고 했다.
고이즈미 신지로 전 환경상은 겉으로는 ‘세대교체’와 ‘당 개혁’을 주창하면서도 아베파와 아소파 전·현직 지도부를 만나는 등 ‘언행 불일치’를 보인 것이 마이너스가 됐다고 요미우리신문은 전했다.
당내 기반이 취약한 이시바 총리는 당내 결집도를 끌어올리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새 내각의 각료 20명 중 4명을 자신과 같은 방위상 출신 인사로 구성했다. 그가 기용한 무파벌 각료는 12명에 달한다. 또 고이즈미 전 환경상을 곧 다가오는 중의원 선거의 선거대책위원장으로 내정했다. 당 부총재 자리엔 무파벌 의원들에게 영향력이 큰 스가 요시히데 전 총리를 앉힐 방침이다. 또 다른 출마자였던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은 유임하는 안을 조율 중이다.
강성 보수세력과의 통합은 미진하다. 이시바 총리는 다카이치 경제안보담당상에게 당 총무회장직을 제안했다가 거절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시바 총리는 중의원을 조기 해산하고, 오는 10월 27일 총선을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실리주의자’ 이시바···향후 한·일관계는
이시바 총리는 이전 자민당 총리들과 비교하면 한·일 역사 문제 등에서 온건한 목소리를 내왔다고 평가된다. 인도적·윤리적인 이유보다는 원만한 외교관계를 위해 주변국을 자극해선 안 된다고 보는 실리주의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한·일관계가 극도로 악화한 2019년, 한국 정부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파기를 검토하자 “우리나라(일본)가 패전 후 전쟁 책임을 정면에서 직시하지 않았던 것이 많은 문제의 근원에 있다”며 일본 정부를 비판했다. 2017년 동아일보 인터뷰에선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한국이 납득할 때까지 사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총재 선거 과정에서는 태평양전쟁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
다만 방위상 출신인 이시바 총리는 자위대의 기동력을 높이고, 해병대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또 평화헌법 개정과 관련해선 태도를 뚜렷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특히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는 데 힘을 쓸 계획이다. 이시바 총리는 지난 9월 27일 기자회견에서 북한, 중국, 러시아발 안보 위협을 거론하며 “일본을 지키는 것을 제대로 확립하겠다”고 말했다. 같은 날 게시된 미국 보수 싱크탱크 허드슨연구소 기고에서는 “아시아판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를 창설하고, 이 틀 내에서 미국의 핵무기를 공동 운용하는 핵 공유나 핵 반입도 구체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도 문제와 관련해서도 일본 정부의 기존 입장을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민당 영토특위 위원장이던 2011년 ‘다케시마(일본이 독도를 부르는 명칭)의 날’ 제정을 추진했다.
이시바 총리는 지난 10월 1일 취임 기자회견에서 한국, 미국과의 관계 방향성을 묻는 말에 “미국과 양국 관계는 중요하고 한국과도 그러하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나라가 다르면 국익도 다르다”면서 “각각이 국익을 바탕으로 얼마나 진지하게 논의해 어떤 성과를 얻을까(가 중요하다)”라고 덧붙였다.
같은 자리에서 이시바 총리는 기시다 전 총리와 마찬가지로 납북 피해자 송환을 추진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드러냈다. 그는 “납북 피해자 문제는 우리 내각의 가장 중요한 과제”라며 “강한 결의로 해결에 임할 것”이라고 말했다.
윤기은 기자 energye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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