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되어가고 있는 박정희, 어떻게 볼 것인가?

정해구 성공회대 겸임교수 2024. 9. 21.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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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과 쏠림이냐, 포용과 분권이냐] 박정희정권의 공과 되돌아보기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후에도 한때 ‘박정희 신드롬’이 맹위를 떨쳤고, 그의 딸인 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되기도 했다. 하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도 탄핵으로 물러나고 그로부터도 상당 시간이 흐른 지금, 박정희를 일방적으로 찬양하는 사람은 많이 줄었다. 이제 경상도 사람들이나 60∼70대의 나이 드신 분들만이 주로 그를 기억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박정희는 역사 속의 인물이 되어가고 있다. 그에 대한 열광이 식은 지금 어쩌면 그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가능한지도 모른다. 이 글은 바로 그런 견지에서 박정희 개인의 특성과 박정희정권의 공과에 대해 새삼 되돌아보고자 한다.

권력이 최고의 가치였던 박정희

개인 박정희는 어떤 사람인가? 그것은 다음의 두 사례를 통해 파악해 볼 수 있다. 우선 그가 왜 일본군 장교가 되고자 했는가 하는 점이 그 하나다. 1917년 경북 구미에서 태어났던 그는 가난 속에서도 공부를 잘했다. 그리하여 그는 당시 수재들이 입학했던 대구사범에 들어갔고, 졸업 후에는 문경에서 2년 동안 교사 생활을 했다. 그러던 그가 1940년에 일본에 대해 충성을 다하겠다는 혈서까지 보내며 만주제국 육군군관학교(신경군관학교)에 입학했고, 졸업 후에는 성적 우수생 특전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편입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944년 마침내 일본군 장교가 되었다.

박정희는 왜 일본군 장교가 되고자 했나? 안정된 직장인 교사로서 근무하다가, 또한 그가 존경했던 셋째 형 박상희가 그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는데도, 그는 23살의 뒤늦은 나이에 왜 친일의 길에 나서게 되었을까? 여러 정황으로 볼 때, 군인이 되어 권력을 갖고자 했던 것이 그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945년 일본의 패망은 하루아침에 그의 꿈을 무산시켰다.

일제 패망 후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다시 남조선 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전신)에 입학했다. 일본군 장교였던 그가 이제 다시 대한민국의 장교가 되었다. 그러나 남로당에 가입했던 그는 1949년 숙군 과정에서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군인으로서 성공하고픈 그의 꿈은 다시 한번 무너졌다. 하지만 일본군·만주군 인맥의 구명으로 그는 살아날 수 있었는데, 당시 그는 군 내부의 남로당 명부를 수사당국에 넘겼다 한다.

개인 박정희가 어떤 사람인지를 파악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가 쿠데타를 도모했다는 사실이다. 숙군 과정에서 구명은 되었지만, 군복을 벗고 민간인 신분인 문관으로 근무했던 그는 6·25전쟁의 발발로 다시 장교로 복직했다. 하지만 복직 이후에 박정희가 유독 관심을 가졌던 것은 군사쿠데타였다.

우선 육군본부에서 근무했던 그는 1952년 부산정치파동 당시 이승만정권에 대한 쿠데타를 도모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종찬 참모총장은 군의 정치적 중립을 지키고자 했고, 따라서 그의 첫 쿠데타 꿈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박정희와 군내 쿠데타 세력이 또다시 쿠데타를 기도했던 것은 1960년 3·15부정선거 때였다. 하지만 5월 18일로 날짜까지 잡았던 쿠데타는 4·19혁명의 발생으로 실행되지 못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1년 후 그와 쿠데타세력은 마침내 장면정권에 대해 쿠데타를 감행했는데, 1961년의 5·16군사쿠데타가 바로 그것이었다.

교사 생활을 하다가 일본군 장교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승만정권과 장면정권 내내 쿠데타를 도모했고 마침내 이를 성공시켰다는 점에서, 우리는 개인 박정희가 진심으로 염두에 두었던 것이 무엇인지 짐작해볼 수 있다. 그는 권력을 가질 수 있는 군인이 되고자 했고, 마침내 그것은 결국 군사쿠데타로 이어졌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5·16쿠데타는 당시 시국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한 구국의 결단이었다기보다는, 군인으로서 그가 오랫동안 추구해 왔던 꿈, 즉 쿠데타를 통한 권력 쟁취의 실현이기도 했다.

박정희정권의 공과

이후 군정을 거쳐 등장했던 박정희정권의 3공화국은 특히 경제성장에서 큰 성과를 이룩했다. 대외지향적 수출공업화 전략을 통해 경제성장을 추구했던 박정희정권은 제1차 경제개발계획(1962년∼1966년) 동안 연평균 7.9%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고, 제2차 경제개발계획(1967년∼1971년)에서 경제성장률은 9.5%에 달했다. 또한 이러한 고도성장에 있어 한·일 국교 정상화를 통한 청구권 자금(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상업차관 3억 달러)과 국군 파병으로 인한 약 10억 달러에 달하는 베트남 특수는 우리 경제의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물론 이는 한·일 간의 과거사 문제와 베트남 민간인 학살 등 많은 문제점을 남기기도 했다.

1972년 유신체제의 구축 이후에도 박정희정권의 경제성장은 계속 이어졌다. 그리하여 경공업에 이어 중화학공업화가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던 제3차 경제개발계획(1972년∼1976년) 기간의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11%에 달했다. 그 결과 1964년 1억 달러에 그쳤던 수출액은 1977년 100억 달러에 달했고, 1960년 80달러에 그쳤던 1인당 GNP는 1980년에 1,686달러에 이르렀다. 요컨대, 박정희정권 기간의 경제성장은 한국의 압축 성장을 가능케 해준 초기 기틀을 구축해 주었다.

그러나 이 같은 고속 성장에도 불구하고 유신체제의 구축은 박정희 본인에게 그리고 우리 민주주의 역사에 큰 오점과 불행을 초래했다. 박정희 1인에게 모든 권력을 집중시켰던 공개적인 독재체제로서의 유신체제는 이후 민주화의 출구를 막아버림으로써 결국 파국적 결말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즉 유신체제 동안 박정희는 긴급조치와 같은 비상수단을 통해 통치했고, 이에 반발한 야당 및 재야 그리고 사회운동의 저항은 결국 부마항쟁을 분출시켰고, 이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박정희가 피살되는 내부 분열의 비극적 결말로 이어졌다.

박정희정권의 출구로서 유신체제가 아닌 다른 대안은 없었을까? 만일 박정희가 3선 임기를 마치고 1975년에 물러났더라면, 아마도 선거를 통해 김종필의 공화당이나 김대중 또는 김영삼의 야당이 정권을 이어받았을 것이다. 그럴 경우 박정희가 그간 이룩한 경제성장 또한 그런대로 민주화와 결합되었을 것이다. 나아가, 만일 그렇게 되었더라면, 또 한 번의 군사쿠데타를 통한 전두환정권의 등장이나 노태우정권도 존재하지 않았을 터이고, 광주항쟁과 같은 비극 역시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출구가 없었던 유신체제는 박정희 본인조차 죽음으로 몰았고, 우리의 민주주의 또한 큰 대가를 치르지 않을 수 없었다.

역사에서 배운다

지나간 역사를 찬찬히 되돌아보다 보면 우리는 거기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박정희 개인에 대해 그리고 박정희정권의 공과에 대해 앞에서 살펴본 내용도 마찬가지다. 경제성장에 대한 박정희의 공이 매우 크다 할지라도, 그로 인해 우리 민주주의는 큰 희생을 치르지 않을 수 없었고, 지금도 우리는 경제적 불평등과 지역적 갈등 등 박정희 시대에서 비롯된 부정적 유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근래에 윤석열정부는 ‘자유’를 내세워 밖으로는 한·미·일 간의 동맹, 특히 한·일 간의 연대를 도모하는 한편, 안으로는 과거의 역사 왜곡과 이승만 불러내기를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과거 한국을 강점했던 일본 그리고 지금도 미국을 등에 업고 한반도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증대하고픈 일본과의 연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한 독재자 이승만 불러내기를 통해 우리 역사를 어떻게 왜곡하려 하는지, 많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제는 역사가 되어가고 있는 박정희를 새삼 되돌아보면서, 우리의 과거 역사가 제대로 독해되고 이를 통해 우리의 미래를 제대로 헤쳐 나갈 수 있는 지혜가 더욱 필요하지 않은가 한다.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가 3일 오후 경북 구미시 상모동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 추모관을 방문해 헌화 및 분향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 글을 쓴 정해구 교수는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이사장을 역임했습니다. 이 연재는 공공선 거버넌스(원장 강치원)에서 기획한 것입니다. 편집자)

[정해구 성공회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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