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 뽑은 구덩이에 ‘아동’ 묻었다” 참상 담은 詩와 수필

신심범 기자 2023. 2. 6.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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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70년대 부산 최초의 부랑인 강제수용시설인 '영화숙·재생원'에서의 지옥같은 삶을 기록한 문학 작품이 오래전 출간됐으나 그동안 조명을 받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피해생존자의 수기나 증언집이 진상규명 움직임을 촉발시킨 주요 기제로 작용했다.

반면 2012년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한종선 씨의 증언집 '살아남은 아이'는 즉각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며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 여론에 불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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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숙·재생원’ 아픈 기록들

- 부산소년의집 3기 출신 장병문 씨
- 1983년 영화숙 실태 수기로 남겨
- 1964년 수용 김경찬 씨 시집에도
- 짐승 취급 당했던 시설의 삶 생생

1960~70년대 부산 최초의 부랑인 강제수용시설인 ‘영화숙·재생원’에서의 지옥같은 삶을 기록한 문학 작품이 오래전 출간됐으나 그동안 조명을 받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피해생존자의 수기나 증언집이 진상규명 움직임을 촉발시킨 주요 기제로 작용했다.

1960년대 영화숙에 감금됐다가 부산 소년의집으로 전원됐던 장병문 씨가 1983년 영화숙의 참담한 실태를 수기 형식으로 발간한 책 ‘잃어버린 자식들’ 표지(맨 왼쪽)와 책 본문.


▮ “인간 이하로 산 6년 폭로”

부산 소년의집 3기 출신인 장병문 씨는 1983년 영화숙의 참담한 실태를 담은 수기 ‘잃어버린 자식들’을 펴냈다. 인간답게 살지 못한 6년의 한을 담아 제목을 정했다고 한다. 이야기는 작중 주인공 ‘종호’가 용두산공원에서 단속반에 붙잡혀 영화숙으로 끌려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군대식 통제에 겁을 먹은 종호는 몇 차례 탈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도망하지 못하도록 발바닥 매질도 당했다.

책에 따르면 영화숙에는 8개 막사가 있었다. 1~6소대, 보충대, 여성 소대·직업보도소 등에 소속된 원생 약 1000명이 살았다. 새로 붙잡혀온 원생은 보충대에서 생활했다. 새벽마다 이부자리에 소변 실수를 하는 원생이 많았는데, 이들에게는 식사가 절반만 제공됐다. ‘오줌싸개’가 아닌 원생들도 마실 물은 제한적이었고, 간식이나 성탄절 선물은 관리자에게 다 빼앗겼다.

일반 수용인은 ‘아동’으로 불렸다. 각 방 원생 중 ‘반장’이란 중간관리자를 뽑았고, 반장 위에 ‘소대장’, 소대장을 총괄하는 ‘지도장’도 있었다. 소대장들은 각목 같은 것을 휘두르며 아동들을 다스렸다. 굶거나 병들어서, 맞아서 죽은 원생은 ‘독수리산’(근처 야산) 소나무를 뽑아 생긴 구덩이에 파묻었다. 소대장이나 지도장 책임아래 훈련도 매일 진행됐다. 아동은 6·25 노래 등 군가를 부르거나, 자신들의 처지를 빗댄 노래를 불렀다. ‘찬바람이 쌀쌀대는 장림동의 영화숙, 오늘도 아침부터 구보를 뛰네’ ‘모여라 헤쳐라 엎드려 뻗쳐라 죄 안 지은 원생들 엎드려 뻗은 그 모습’ 등 가사도 다양했다. 영화숙·재생원 피해생존자 황송환 씨가 증언했던 ‘재생원 노래’(국제신문 지난해 11월 21일 자 6면 보도)와 유사하다.

▮ “질긴 것이 생명이라 죽지도 못했다”

1964년 재생원에 끌려가 겪은 일을 시로 쓴 김경찬 씨.


재생원의 기억을 시로 남긴 작품도 있다. 민간요법 연구가 김경찬(66) 씨는 1964년 재생원에 끌려가 겪은 일을 시 ‘재생원’으로 풀어냈다. 2018년 8월 자비로 출판한 시집에 실었다. 경남 창원이 고향인 그는 부산 남포동을 전전하던 중 단속반에 붙잡혔다. 이후 1년 6개월 가까이 짐승 이하의 삶을 살았다.

‘이층칼잠 자다가도 기상하면 / 일어나서 밥 먹듯이 매를 맞고 / 강제노역 일 나가면 …(생략) / 돼지밥통 치우다가 뼉당구는 칼슘 얻고 / 마늘 파는 특미가 따로 없네 / 영양실조 걸린 아동 벌레 먹고 풀 먹다가 / 맞아 죽고 병들어 죽고 곯아죽네 / “오늘도 취사장에 돼지를 잡건만은 왕고기는 누가 먹고 / 국물만 주나 왕고기 백시라이 생각지도 않건만은 / 꽁시라이 찬밥이나 많이 줍소서” / 지옥 같은 목마름에 / 신평 쓰레기 매립장 썩은 물 많이도 먹었건만 / 죽기를 원했는데 / 찔긴 것이 생명이라 죽지도 못했네’

김 씨 또한 이후 재생원을 빠져나와 소년의집으로 옮겨갔다. 그는 “뭉그러진 낫을 들고 매일 밭일하러 나갔다. 반장의 호루라기에 늦게 반응하면 정강이뼈를 까이고 방망이로 맞았다. 먹을 거라곤 보리쌀이나 수제비가 다였다”며 “소년의집에 가지 않았더라면 과연 내가 지금도 살아 있을지 모르겠다”고 전했다.

▮ “지금이라도 세상에 알려지길”

‘잃어버린 자식들’의 머리말에서 장 씨는 “이런 공포의 지옥이 아직도 어딘가의 고아원, 보육원, 기도원, 부랑아 수용소 등에 존재하리라고 믿으며 그런 불행한 분들을 조금이라도 위로하고 싶어서 글을 썼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의 바람처럼 진상규명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반면 2012년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한종선 씨의 증언집 ‘살아남은 아이’는 즉각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며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 여론에 불을 붙였다.

장 씨는 최근까지 소년의집 3기 동창회 친구들과 교류했지만 현재는 연락이 끊겼다. 친구 허병우 씨는 “동창회에 나오지 않는 건 물론 전화도 되지 않는다”며 “친구가 영화숙에서 당한 일을 책으로 써내 우리에게는 화제였지만, 당시 세간에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며 “생생한 기록이 남아 있었다니 다행이다. 책이 알려져 그때의 참상이 기억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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