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순서 바꾸고, 거꾸로 읽고, 세로드립까지…근데 그거 뭐지? [그거사전]

홍성윤 기자(sobnet@mk.co.kr) 2024. 10. 12.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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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사전 - 39] 거꾸로 읽고 세로로 읽고 말장난하는 ‘그거’

“그거 있잖아, 그거.” 일상에서 흔히 접하지만 이름을 몰라 ‘그거’라고 부르는 사물의 이름과 역사를 소개합니다. 가장 하찮은 물건도 꽤나 떠들썩한 등장과, 야심찬 발명과, 당대를 풍미한 문화적 코드와, 간절한 필요에 의해 태어납니다. [그거사전]은 그 흔적을 따라가는 대체로 즐겁고, 가끔은 지적이고, 때론 유머러스한 여정을 지향합니다.
[사진 출처=Şahin Sezer Dinçer, unsplash]
【예문】소개팅 상대가 ‘자신은 로골로지스트’라고 소개했다. 나와 같은 부류인가 싶어서 어구전철과 제자체와 회문과 이합체시까지 떠들다가 깨달았다. 로골로지스트가 아니라 로맨티시스트였다는 사실을.

로골로지(logology)라는 단어가 있다. 여러 의미로 쓰이는데, 그중의 하나가 바로 유희 언어학(recreational linguistics)이다. 놀이로서의 이용에 초점을 맞춘 언어학을 지칭한다. 말장난·말놀이 등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말놀이의 최고 권위자였던 드미트리 보그만(Dmitri Borgmann, 1927~1985)의 저서 ‘휴가 중인 언어Language on Vacation’(1965)에서 유희로서의 언어학을 설명하기 위해 로골로지라는 단어를 차용하면서 자리 잡은 용어다. 드미트리 보그만은 1972년 글로벌 석유회사 스탠다드 오일 컴퍼니의 새 이름 엑손(Exxon)을 만든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원래는 Energy Company를 줄인 엔코(Enco)가 우선 후보였지만, 일본어로 ‘차가 고장 난 상태’ ‘연료가 다 떨어졌다(한국 한정)’라는 일본어 엥꼬(えんこ)와 발음이 유사하다는 지적에 엑손이 최종 낙점됐다는 후일담이 있다.

언어유희의 대가였지만 사진 만큼은 사망유희 뺨치는 드미트리 보그만 선생(왼쪽)과 그의 저서 ‘휴가 중인 언어’. [사진 출처=공공 저작물·Charles Scribner‘s Sons]
로골로지라는 단어 자체는 1960년대 이후에 새로운 쓰임을 얻은 것이지만, 언어유희는 언어의 탄생과 궤를 함께 해온 오래된 존재다. 언어를 해체·재조립하고, 스스로 제약을 걸어 표현의 한계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재미와 지적인 쾌감, 사고의 확장을 선사한다. 아래 소개하는 말놀이는 그중 일부이다.

애너그램은 문자의 순서를 바꿔 다른 단어나 문장을 만드는 낱말 놀이다. 어구전철이라고도 한다. 완전히 상관없는 단어로 바뀌기도 하지만 ‘자살’의 글자 순서를 바꿔 ‘살자’로 쓴다거나 listen(듣는다)을 silent(말이 없는)로 바꾸는 등 서로 의미가 연결되는 단어로 바뀌는 경우도 있다. 댄 브라운의 추리소설 ‘다빈치 코드’나 조앤 K. 롤링의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는 애너그램이 주요 소재로 등장한다.

해리 포터 팬이라면 잊을 수 없는 애너그램. TOM MARVOLO RIDDLE → I AM LORD VOLDEMORT. 인간적으로 ‘I AM’ 넣는 건 좀 치사하지 않나 싶다. [사진 출처=워너 브러더스]
팬그램은 알파벳의 모든 글자를 사용해 만든 문장을 말한다. 한글에서는 초성·중성·종성의 모든 조합을 보여줄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자음 혹은 모음을 포함한 문장을 팬그램으로 친다. 모든 글자가 나타나기 때문에 서체 예문으로 쓰인다. 윈도 OS에서 폰트의 예문으로 쓰이는 ‘다람쥐 헌 쳇바퀴에 타고파’(한글 모든 자음 사용)나 ’The Quick Brown Fox Jumps Over The Lazy Dog‘ 등이 대표적인 팬그램이다.
단언하건대 위 문장은 한국인에게 가장 익숙한 문장이다. [사진 출처=마이크로소프트]
그렇다면 천자문(千字文)은 팬그램일까? 천자문은 4글자로 된 250구의 한시(漢詩)로, 단 한 글자도 겹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매우 팬그램스럽기는 하나 모든 한자가 빠짐없이 수록된 것은 아닌지라 팬그램은 아니다. 한자는 그 특성상 팬그램이 불가능하다. 많아도 너무 많기 때문. 청나라 때 편찬된 한자 사전 강희자전(康熙字典)에만 4만7,035자가 실려 있고, 1986년 출간된 한어대자전(漢語大字典) 초판에는 5만4,678자가 수록돼 있다.

천자문은 중국 남북조시대 양나라의 학자 주흥사(周興嗣, 470~521)가 초대 황제인 무제의 명을 받아 지었다. 무제는 주흥사에게 네 글자씩 맞춘 250구의 시를 짓되 한 글자도 같은 글자를 쓰지 않아야 하며 하룻밤 사이(!)에 완성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주흥사가 어지간히 큰 잘못을 하지 않고서야 저런 어명을 내릴 수 없지 싶다. 아무튼 주흥사는 그 어려운 걸 해냈고, 완성한 직후엔 머리와 수염이 하얗게 세어 있었다. 이런 이유로 천자문에는 백수문(白首文)이란 별칭이 붙었다. 머리카락이 세어서 망정이지 다 빠졌더라면 광수문(光首文)이나 독두문(禿頭文)이 될 뻔했다.

머리가 다 빠져서 흑화한 세계선의 주흥사. “누가 하늘천 소리를 내었는가?” [사진 출처=KBS]
리포그램(제자체)은 팬그램과 달리 특정 글자를 제외하고 쓴 글을 말한다. 아예 리포그램만으로 구성된 소설도 있다. 1939년 미국 소설 ‘개즈비’(Gadsby)의 경우, 알파벳 e를 본문에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프랑스 출신 작가 조르주 페렉(Georges Perec, 1936~1982)도 e를 쓰지 않고 3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소설 ‘실종’(La Disparition, 1970)을 완성했다. 한국 소설가 배명훈 역시 등단작 ‘Smart D’에서 사용료를 낸 사람만 글자 D와 ㄷ을 쓸 수 있게 된 미래 세계를 그리며 내용 일부를 리포그램으로 쓴 바 있다.

바로 위 문단은 한글에서 빈번하게 쓰이는 주격조사 ‘은’ ‘는’ ‘이’ ‘가’를 제외하고 쓴 리포그램이다. 개즈비의 작가 이름이 어니스트 라‘이’트다보니 위에서는 명시하지 못한 점 양해 바란다. e를 뺀 소설을 완성한 조르주 페렉은 그로부터 3년 후에 ‘돌아오는 사람들’(Les Revenentes, 1973)이란 작품을 통해 모든 모음을 e로 바꿔서 쓰는 수미상관적인 치밀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유니보컬릭(일모음문)은 모음 하나만으로 만든 글로 다른 모음을 제외한다는 점에서 리포그램의 일종이다.

이 남자 수염이 굉장하다. 실험 문학 그룹 울리포의 멤버이기도 한 작가 조르주 페렉. 제약 없는 창작 실험을 통해 다양한 작품을 내놨다. 특히나 1978년 메디치 상을 받은 그의 대표작이자 700페이지짜리 대작 ‘인생사용법’(1978)은 파리의 한 아파트를 무대로 99개 장을 개별 소설처럼 배치하고 퍼즐이나 게임처럼 이야기를 연결하고 인용하고 전개하는 독특한 방식을 택했다. [사진 출처=펭귄 북스]
팰린드롬(회문)은 바로 읽으나 거꾸로 읽으나 똑같은 단어나 문장을 말한다. 간단한 예로는 ‘기러기’ ‘일요일’ ‘토마토’ 등이 있다. ‘소주 만병만 주소’ 같은 문장 형태로도 가능하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가 하는 대사 “Was it a cat I saw?(내가 본 게 고양이였나?)”도 회문이다. 아이돌 그룹 슈퍼주니어 T의 노래 ‘로꾸꺼!!!’(2007)도 가사의 상당 부분이 회문으로 구성돼 있다. 가로로 읽으나 세로로 읽으나 똑같은 단어들의 집합을 지칭하는 사토르 마방진(Sator square)의 라틴어 원형은 거꾸로 읽어도 성립하는 회문이기도 하다. 가장 오래된 사토르 마방진은 1세기경 폼페이 유적에서 발견된 것이다.
사토르 마방진의 라틴어 원형. 어디서 익숙한 단어가 보인다. 시간의 흐름이 역행한다는 상상력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2020년 영화 ‘테넷(TENET)’의 제목은 여기에서 따온 것이다. 참고로 악당 이름은 사토르다.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스푸너리즘은 두 단어의 초성을 바꿔서 발음하는 걸 말한다. 이와 같은 말실수를 자주 했던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였던 윌리엄 아치볼드 스푸너의 이름에 따온 것이다. 노인 코래방(코인 노래방), 쯔와이스 트위(트와이스 쯔위) 따위의 스푸너리즘이 한때 화제가 되기도 했다.

세로드립이라고도 하는 이합체시(어크로스틱)는 행의 첫 글자만 따서 세로로 읽으면 원문에 없던 의미가 드러나는 말장난이다. 삼행시도 이합체시의 일종이다. 문장 속에 자신의 의중을 숨겨서 전달할 수 있다 보니 재미있는 사례가 많다. 2009년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재직 중이던 아널드 슈워제네거는 주의회에 보낸 서한에 이합체시로 욕설(F**k you)을 넣어 화제가 됐다. 2017년 다니엘 캐먼 미 국무부 과학특사는 버지니아주 샬러츠빌 유혈사태에 대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대응 방식에 반발해 사직서를 제출했는데, 사직서 각 문단의 첫 번째 글자를 세로로 연결하면 탄핵(Impeach)이 되도록 글을 썼다.

2010년 당시 캘리포니아 주지사였던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자신의 연설 도중 “Kiss my gay ass”라는 모욕적인 언사와 함께 퇴장한 주의회 의원에게 보낸 공식 서한. 해당 의원이 발의한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아주 고상하고 행정적인 공문을 보냈는데, 공교롭게도 첫 문자를 세로로 읽으면 ‘F**k you’가 완성된다. 선출직 공무원의 품위에 걸맞은 행동인지는 차치하고, 상남자 터미네이터다운 행보다.
2016년 자유경제원에서 주최한 대한민국 건국대통령 이승만 시 공모전에서 뽑힌 두 시 ‘우남찬가’(입선작)와 ‘To the promised land’(최우수상)가 세로드립으로 유명세를 치렀다. 가로로 읽으면 이 전 대통령을 찬양하는 내용이지만, 각 행의 첫 번째 글자만 따서 세로로 읽으면 이승만을 비판하는 내용이 됐기 때문. 우남찬사에는 ‘한반도 분열’ ‘민족반역자’ ‘한강다리 폭파’ ‘보도연맹 학살’ 등의 내용이 숨겨져 있었고, 영문시 To the promised land에는 ‘NIGA GARA HAWAII(니가 가라 하와이)’라는 문장이 발견됐다. 자유경제원은 응모자를 업무방해, 명예훼손, 사기 혐의로 고소하며 6000만원에 달하는 민사 손배소까지 걸었으나 결국 무혐의로 끝났다.

잰말놀이는 비슷한 발음의 단어가 반복돼 발음하기 어려운 문장을 빨리 읽는 놀이다. ‘간장 공장 공장장은 강 공장장이고 된장 공장 공장장은 공 공장장이다’나 ‘경찰청 철창살은 외철창살이고 검찰청 철창살은 쌍철창살이다’, ‘들의 콩깍지는 깐 콩깍지인가 안 깐 콩깍지인가’ 등이 대표적인 잰말놀이 문장이다. 가수 형돈이와 대준이는 잰말놀이 문장과 단어를 노랫말로 활용한 ‘한 번도 안 틀리고 누구도 부르기 어려운 노래’(2017)라는 곡을 발표한 바 있다.

가수 본인도 풀 컨디션이어야 소화할 수 있는 노래가 있다? 여기 있다. [사진 출처=KBS]
  • 다음 편 예고 : 결혼식에서 신부 부케 말고 신랑 가슴팍에 ‘그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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