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인류 번영 위해 펑펑 쓴 물, 역대급 고지서 온다

사지원 기자 2024. 9. 21. 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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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마의 남자가 닝기르수의 국경을 넘지 못하게 하소서. 제방이나 도랑을 훼손하지 못하게 하소서." 고대 수메르의 도시국가 라가시에서 기원전 2450년경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독수리 비석' 문구의 일부다.

라가시는 다른 도시국가 움마와 100년 넘게 물의 통제권을 놓고 싸웠다.

2018년 과학 대중화에 기여한 공로로 칼 세이건상을 받은 물 전문가인 저자는 신간에서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자원인 물의 역사를 세 시기로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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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문명-산업혁명-수자원 위기… 인류사 속 물 역사 3단계로 구분
수자원 통제로 일군 경제적 번영… 생태계 파괴-기후 위기 몰고 와
화석연료와 달리 대체 자원 없어… 지속가능한 미래 위한 대안 제시
◇물의 세 시대/피터 글릭 지음·물경제연구원 옮김/488쪽·2만3000원·세종연구원
인류는 수자원 관리 능력을 키우면서 그동안 발전을 이뤄 왔지만 기후변화, 수자원 부족 등으로 ‘물의 위기 시대’를 맞게 됐다. 저자는 지금이라도 상황을 직시하고 생태계 복원, 수자원 가용성 확대 등의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고 조언한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움마의 남자가 닝기르수의 국경을 넘지 못하게 하소서. 제방이나 도랑을 훼손하지 못하게 하소서.” 고대 수메르의 도시국가 라가시에서 기원전 2450년경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독수리 비석’ 문구의 일부다. 라가시는 다른 도시국가 움마와 100년 넘게 물의 통제권을 놓고 싸웠다. 관개 운하 등 물에 대한 접근성을 확보해야 안정적인 식량 공급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초기 국가에서는 수자원을 통제하는 능력이 권력 확보에 핵심 요소로 인식됐다.

2018년 과학 대중화에 기여한 공로로 칼 세이건상을 받은 물 전문가인 저자는 신간에서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자원인 물의 역사를 세 시기로 나눈다. 첫 번째 시대는 수렵채집 생활의 시작부터 강을 기반으로 4대 문명이 꽃핀 시기까지다. 당시 유목에서 정착으로 인류의 생활방식이 바뀌면서 댐, 수로는 물론이고 물과 관련된 법과 제도가 정비되기 시작했다.

두 번째 시대는 산업혁명 후 기술 발달을 토대로 과거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물 활용이 가능해진 시기다. 이때 인류는 빙하에서 사막까지 수천 km에 이르는 수로를 건설하고, 농경이 불가능한 지역에서 식량 재배가 가능하도록 대규모 관개 시스템을 구축했다. 저자는 “현대 문명은 두 번째 물의 시대의 발전 위에 세워져 경제·사회·문화적 풍요를 누리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두 번째 시대의 발전 방식은 한계에 다다랐다. 수자원 통제는 효율적인 경제 성장을 가져왔지만 의도치 않은 부작용도 초래했다. 환경 파괴와 그로 인한 기후변화다. 1700년대 이후 지구 해안과 내륙 습지의 87%가 파괴됐는데, 이 중 30%가 기술 발전이 가속화된 1970년대 이후 훼손됐다. 생태계도 망가지고 있다. 국제자연보전연맹에 따르면 어획이 쉬운 대형 어종 200여 종 가운데 85종은 이미 멸종 위기에 처했다.

민간기업의 ‘수도 민영화’도 두 번째 물의 시대에 닥친 또 다른 위험 요소다. 세계은행은 1990년부터 2021년까지 65개국의 상하수도 부문에서 1100건 이상의 민영화가 이뤄졌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저자는 “민간기업은 자연 수생태계를 보호할 유인책이 거의 없다”고 단언한다. 실제로 1989년 영국 총리 마거릿 대처가 잉글랜드와 웨일스 상하수도 시스템을 10개 지역 기업에 넘겨 민영화했지만, 물 가격은 대폭 올랐고 환경 오염은 심각해졌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물의 세 번째 시대를 통해 물과 인류가 새로운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지금과 같은 식이라면 앞으로 물 사용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현재 지하수는 세계 식량의 3분의 1 이상을 생산하는 데 사용된다. 그러나 지하수는 화석 연료처럼 매장량이 한정돼 있어 언젠가 고갈될 수밖에 없다. 화석 연료는 풍력, 태양 등 대체 에너지가 있지만, 수자원은 그렇지 않다. 저자는 대안으로 △물 이용에 대한 보편적 권리 인식 △훼손된 생태계 복원 △폐수 등을 활용한 수자원 가용성 확대 등을 제시한다

기후위기라는 혹독한 대가 18일(현지 시간) 체코 올로모우츠주 미쿨로비체에서 한 주민이 홍수 피해를 입은 집 주변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살피고 있다. 폭풍 ‘보리스’가 유럽 중동부를 덮치면서 최소 20명 이상이 사망했다. 인류가 수자원을 통제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지만, 부작용으로 각종 이상 기후를 겪고 있다. AP 뉴시스
‘디스토피아냐, 지속 가능한 세계냐.’ 인류의 행동에 따라 다가올 세상은 달라질 수 있다는 저자의 메시지는 ‘한가위 열대야’를 처음 겪은 한국에도 묵직하게 다가온다. 진행 중인 기후위기의 실존적 위협을 생생히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이해하기 쉬운 문장과 각종 도표로 물에 대한 전문지식을 알기 쉽게 풀어냈다.

사지원 기자 4g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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