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온다, 독감이 온다[육아에 바나나]

집에 아기 해열제가 있던가.

혹시 모르니까 아침 이유식을 아기가 제일 좋아하는 죽으로 든든하게 먹여야지. 낮잠은 짧게라도 재우고 출발하자.

날씨가 덥기는 한데, 맨살을 내놓기엔 차고, 아기는 열이 많아. 주사는 허벅지에 맞으려나. 아니면 팔에? 옷은 어떻게 입혀야 하지.

처음으로 남편 없이 혼자 아기를 데리고 예방 접종을 하러 가는 날. 전날부터 머리가 복잡하다. 아기가 뒤집어지게 울면 달래며 안을 아기 띠부터 좋아하는 장난감들을 챙기면서 아침 수유 스케줄부터 간식, 낮잠 일정까지 머릿속으로 열심히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자주 가는 소아과는 산책 겸 15분 정도만 걸으면 되는 곳이지만, 아기가 주사를 맞고 갑자기 눈물바다가 될까봐 남편에게 자동차를 두고 가라고 일주일 전부터 신신당부를 해두었다.

혼자 운전하는 것도 무서운데, 아기를 태우고 운전해야 한다니 어질어질했다. 뒷좌석에 혼자 앉은 아기가 늘 옆자리에 있던 엄마가 없다는 걸 알고 큰 소리로 울어버리면 어쩌나, 과연 자동차가 최선일까 고민하다 보니 뒤통수에 땀이 나는 것만 같다. 남편이 동행할 때는 크게 걱정이 되지 않았던 부분들인데, 막상 혼자 하려니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래, 일단 부딪혀 보자!

아기의 인생 첫 독감 예방 접종 당일,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아기가 가장 좋아하는 (이름도 긴) 소고기표고버섯대추죽을 뜨끈하게 먹이고, 약간의 낮잠을 재웠다. 병원으로 가는 차 안에서 아기는 걱정과 달리 조용히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즐기는 듯했다. 고작 5분 남짓한 거리의 운전은 마치 무시무시한 작전을 수행하는 듯했다. 주차까지 성공하고 병원 주차장에서 유아차를 펼쳐 아기를 태우니 뿌듯함이 차올랐다.

접수를 하는데 채혈을 해야 하는 꽤 큰 아이가 한쪽 귀퉁이 방에서 아프다고 고래고래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우리 아기도 곧 저렇게 깩깩 울면 어쩌나 눈을 질끔 감았다. 어른인 나까지도 무서워질 지경이었지만, 이제 10개월이 된 하얀 백지 같은 아기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내 품에 앉아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통통한 발을 이리저리 흔들고 있을 뿐이었다.

?
뿌엥. 어머어머. 으아아아. 감사합니다!

오?

순식간에 끝난 접종, 아기는 자신의 몸에 들어온 주삿바늘에 어리둥절해하다가 ‘뿌엥!’하고 짧게 울더니 빠르게 바지를 입히는 주변의 손놀림과 ‘어우 어우 괜찮아’를 외치는 주변의 목소리에 한 번 더 어리둥절해진 채로 접종을 마쳤다. 진료실을 나와 대기하는 10분 동안 아기는 다시 흘러나오는 병원 음악 소리에 발을 흔들었다. 리듬을 타는 통통한 아기 발을 보면서 허탈하면서도 다행스러웠다. 안도감에 비집고 나오는 함박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병원을 나섰다.

주사도 잘 맞혔겠다, 아기도 생글생글 웃고 있고, 왠지 오늘이라면 아기와 단둘이 카페에 앉아 차를 마실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나를 추동했다. 맑게 갠 가을 하늘의 햇살이 유독 따사로웠다.

이 좋은 날씨에 테라스에 앉아 햇살 가득 쬐면서 커피 한 잔 마실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 아기랑 한 번 해볼까...?

그래! 못할 게 어디 있겠어.

병원 근처를 살피다 문턱이 없는 조그만 카페를 발견했다. 유아차를 끌고 다니다 보면, 가게들의 문턱을 먼저 확인하게 된다. 한적하고 좋은 공간이어도 문턱이 높거나 계단이 있다면 유아차를 끌고 들어갈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적당히 친절해 보이는 사장님과 좋아하는 크림라떼를 파는 곳이었다. 주문을 마치고 아기와 앉아 있는데 아기는 여전히 동요 없이 행복해했다. 눈 마주치면 생글생글, 도톰한 양말을 신은 발은 힘껏 들어올려 스스로 조물딱거리다가 주변을 구경했다.

아기도 나처럼 이미 오늘의 병원 나들이를 충분히 즐기고 있는 듯했다. 병원에서의 주삿바늘은 이미 까맣게 잊은 것도 같았다. 아기는 울거나 떼를 쓰지도 않았다. 함께 있는 내내 유아차에 앉아 생글거렸고, 카페에 계신 할아버지들과 장난을 치기도 했다.


나의 걱정은 무색했다. 아기를 태우고 운전을 하는 것도, 혼자 병원에 와 예방 접종을 하는 것도, 카페에 들어가 커피 한 잔을 여유롭게 마시는 것도 실상 모두 어렵지 않았다. 겁먹었던 것만큼 대단히 힘들거나 진땀을 빼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육아가 늘 그랬던 것 같다.

임신도, 출산도, 육아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것에서 오는 막연함에 두려움부터 느끼기 일쑤였다. 임신 중에는 출산이, 아기를 실제로 안아보기 전에는 조그맣고 바스러질 것 같은 갓난아기를 잘못 안아 다치게 할까 두려웠다. 미루고 미뤄 아기 목욕을 6개월이나 되어서야 처음으로 누군가의 도움 없이 시도했던 나는, 그때도 지금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완벽하진 않아도 한 번, 두 번 해보다 보면 서서히 적응해 어느새 당연히 해낼 수 있는 일이 생긴다. 첫 시도의 용기가 결국 나를 조금 더 자연스러운 엄마의 모습으로 성장시키기도 하는 듯하다. 조심스럽고 겁이 많은 엄마가 시간이 조금 걸릴지라도 아기와 함께 합을 맞추어 성장해 나가는 느낌이 꽤 그럴듯하다.

아기를 태우고 돌아오는 길, 카시트에 폭 들어가 있는 작은 아기에게 연신 고맙다고 읊조렸다.

“부족한 엄마를 기다려줘서 고마워. 엄마에게 다음번에는 더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용기를 줘서 고마워.”

다음에는 조금 더 먼 거리를 아기를 데리고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언제든 아기가 아프면 벌벌 떨지 않고 아기를 병원에 데려갈 수도 있을 것 같다.

부족한 엄마도 ‘엄마’가 아닌 것은 아니라고 되뇐다. 서툰 엄마도 아기가 자라면서 함께 시행착오를 겪으며 엄마로의 삶에 적응하고 자라나는 것일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아마도 엄마가 된 이상, 남은 평생을 아이와 함께 자라나는 시간으로 보내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아기를 낳고 기른다는 건, 생애 없던 새로운 용기를 쌓으며, 일상을 더 단단하게 다지며 자라나는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지난 여름, 나들이를 나간 아기

* 글쓴이 - 보배

'세상의 모든 문화'에서 <탱고에 바나나>를 연재하다가 23년 12월 출산 후 <육아에 바나나>로 돌아왔습니다. 의지하고 싶은 가족 품에 있다가 지켜주고 싶은 가족이 생긴 요즘입니다. 공저 <나의 시간을 안아주고 싶어서>, <세상의 모든 청년>에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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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레터 <세상의 모든 문화>에 연재되고 있는 글입니다. <세상의 모든 문화>는 총 20여명의 작가들이 매일(주중) 다양한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리는 뉴스레터로, 다양한 분야의 작가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가는 무료 레터 콘텐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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