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년 동안 다니던 직장을 정년퇴직한 남편은 이상하게도 매일 새벽 다섯 시만 되면 어김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에는 평생 몸에 배어버린 출근 습관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줄 알고 안쓰러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남편의 새벽 외출이 잦아졌고 이상한 예감에 뒤쫓아간 날 나는 식탁 위 조용히 놓인 종이를 발견했다.

식탁 위에 무심하게 펼쳐져 있던 종이는 남편이 매일 밤 조용히 적어 내려간 낡은 일기장의 한 쪽이었다.
글씨 속에는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고 아내의 생활비를 끝까지 책임지기 위해 인력 시장으로 향한다는 고백이 적혀 있었다.
퇴직금으로 시작하려던 사업이 흔들리자 남편은 가족들에게 말도 못 하고 홀로 물류 창고 일용직으로 나섰던 것이다.

어두컴컴한 새벽길을 홀로 걸어 나갔을 남편의 고단한 뒷모습을 떠올리자 참았던 눈물이 거침없이 흘러내렸다.
평생 가족을 위해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왔으면서도 정년 이후까지 미안해하는 남편의 깊은 마음이 가슴을 후벼팠다.
나는 식탁 위에 떨어진 눈 자국을 닦아내며 새벽 일을 마치고 돌아올 남편을 위해 따뜻한 밥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차가운 아침 공기를 가르고 집으로 돌아온 남편은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신발을 벗으며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남편의 거칠어진 손을 꼭 잡으며 고생했다고 가만히 나지막한 목소리로 첫 인사를 건넸다.
남편은 당황한 듯 머뭇거리다가 이내 내 진심을 느끼고는 그동안 참아왔던 긴장과 안도의 숨을 깊게 내쉬었다.

남편이 남긴 일기장은 단순한 푸념이 아니라 평생 가족을 지켜낸 한 가장의 숭고하고 따뜻한 책임감이 담긴 기록이었다.
우리는 마주 앉아 뜨거운 국밥을 나눠 먹으며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삶을 서로의 온기로 함께 헤쳐 나가기로 약속했다.
현관문 앞에 정갈하게 놓인 남편의 때 묻은 작업화 위로 창밖에서 불어온 아침 햇살이 포근하게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