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마음에 그려진 김다미와 전소니의 우정, 아니 사랑('소울메이트')
[엔터미디어=정덕현의 그래서 우리는] "똑같이 그리다 보면 그 사람이 아니라 내 마음이 보여." 하은(전소니)은 미소(김다미)의 얼굴을 그리며 어떤 자신의 마음을 봤을까. 민용근 감독의 영화 <소울메이트>는 하은이 거대한 캔버스에 그린 미소의 그림으로 시작한다. 극사실주의로 그려진 그 그림은 마치 사진처럼 생생하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면 연필로 하나하나 그어진 선들이 만들어낸 얼굴이다. 그 선 하나하나에서 그 그림을 그린 하은의 마음이 느껴진다. 이들 사이에는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소울메이트>는 그 그림으로 시작해서 그 그림으로 끝난다. 그림 속 미소의 얼굴은 학창시절 하은과 하은의 남자친구 진우(변우석)와 함께 제주의 어느 산길을 오르다 찍힌 사진이다. 돌아보는 미소를 순간 찰칵 찍어낸 하은은 그 사진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면서 미소의 얼굴을 캔버스에 담았을 게다. 풋풋한 청춘의 건강함이 묻어나는 미소의 그 얼굴은 어딘가 놀란 듯 보이면서도 생기가 넘치고 그러면서도 어딘가 슬픔 같은 것이 묻어난다.
덥고, 지루하고 졸리고 나른하던 어느 날 전학 온 미소는 오자마자 교실을 박차고 나가 바다가 보이는 뚝방 위에서 저 멀리를 바라보는 그런 아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나오지 않지만 부모의 보살핌을 거의 받지 못했고, 결국 엄마마저 그 아이를 제주에 남겨 놓고 떠났다. 외롭게 괴로웠을 미소지만, 그는 이름처럼 늘 생글생글 웃으며 하은과 그의 가족들과 더불어 성장한다.
미소는 그가 '찐'이라고 생각하는 제니스 조플린을 닮았다. 27살의 나이에 활활 타올랐다가 저 세상으로 떠난 아티스트. 같은 나이에 요절한 지미 핸드릭스, 짐 모리슨과 더불어 3J로 불리며 이른바 '27살 클럽'의 멤버 중 하나로 불리는 히피 문화를 대표하는 싱어 송 라이터. 그는 미소에게는 자유의 존재로 읽힌다. 제니스 조플린의 명곡 'Me & Bobby McGee'에 나오는 가사 내용 중 '자유란, 아무 것도 잃을 것이 없다는 것의 다른 말일 뿐(freedom's just another word for nothin' left to lose)'이라는 대목이 미소가 마주하고 있는 '쓸쓸한 자유'의 면면을 잘 설명해준다.
제주에서 서울로 떠나 성북동 달동네 위에 있는 도시 속 섬 같은 허름한 집에서 지내며 하루하루를 갖가지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살아가지만, 미소는 하은에게 자유로운 제니스 조플린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편지를 보낸다. 바이칼 호수에는 가본 적도 없지만, 그 곳을 여행하고 돌아왔다고 엽서를 가져온다. 미소는 결코 제니스 조플린처럼 자유로운 적이 없었고, 그래서 그런 자유를 늘 꿈꾸고 있었을 뿐이다. 엄마마저 돌아가셔 남은 가족조차 없는 미소는 어디든 훨훨 날아갈 수 있었지만, 퍽퍽한 삶은 그 어디도 그를 날게 해주지 않았다.
반면 단란한 가족의 품에서 자라난 하은은 미소의 그 자유를 부러워하지만 고소공포증으로 비행기조차 타지 못해 섬 바깥으로 나가지도 못하는 인물이다.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고 잘 그리지만 제주에서 학교 선생님이 되어 지낸다. 제주와 서울로 떨어져 지내며 하은과 미소는 서로를 그리워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또 보듬으면서 우정 그 이상의 마음을 주고받는다.
두 사람의 다른 삶은 그들이 그리는 그림으로도 표현된다. 하은은 있는 그대로 똑같이 그리는 극사실주의의 그림을 그리는 반면, 그런 틀 자체가 싫은 미소는 입시 미술 학원에서 데생을 할 때조차 추상적인 그림을 그려낸다. 그들이 학창시절 비 맞은 고양이를 집으로 데려와 함께 그리는 장면에서도 하은이 생생하게 있는 그대로의 고양이를 그린 반면, 미소는 추상적인 고양이의 형상에 마음까지 그려 넣는다.
똑같이 그리는 건 재주일 뿐, 재능이 아니라고 여기는 이도 있지만, 하은과 미소의 그림은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처럼 지와 사랑이라는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달려가지만 결국은 같은 지점에서 만나 서로를 채워가며 완성되어 간다. 따라서 <소울메이트>는 그림을 매개로 해서 서로를 완성하고 채워가는 하은과 미소의 우정, 아니 그 이상의 사랑을 담아낸다. 맞다. 그건 사랑이다. 그저 이성과 동성이라는 구분이 불필요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운명적인 사랑.
1990년대 말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그래서 폴더폰이나 싸이월드, MP3, 펌프 같은 영화에 등장하는 당대의 오브제들은 당대를 살았던 중장년층의 마음을 추억 속으로 소환시킨다. 하지만 이 그 아날로그적 감성을 담은 뉴트로를 힙하게 바라보는 MZ세대들의 마음 또한 이 작품은 툭툭 건드리고 있다. 마치 '인생네컷' 사진을 통해 바로 찍은 디지털 사진을 즉석으로 인화해 손에 쥐는 아날로그적 감성을 갖고픈 MZ세대들의 취향을 이 작품은 레트로한 영상과 색감, 정서 등으로 사로잡는다.
그 위에 하은과 미소의 한 평생을 담아낸 마음들을 이를 연기한 김다미와 전소니는 생생하게 살아 숨쉬게 만든다. 특히 이미 <마녀>로 강렬한 인상을 주며 등장해, <이태원 클라쓰>로 걸크러시를 보여주고는 <그해 우리는>으로 달달한 감성까지 전해줬던 김다미는 이 작품 속 미소라는 청춘의 초상을 통해 자유와 슬픔, 그리움과 행복 등이 버무려진 복합적이고 입체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마치 청춘의 초상을 상징하는 듯 그림 속에 얹어진 그의 얼굴로 시작해 그의 얼굴로 끝을 맺는 영화는 그래서 김다미라는 배우의 존재감을 확연하게 뇌리에 새겨넣어준다.
"이젠 니 얼굴을 그리고 싶어. 사랑 없인 그릴 수조차 없는 그림 말야." 똑같이 그리다 보면 그 그림을 그리는 자신의 마음이 보인다는 하은의 말에 화답하듯, 영화는 그런 미소의 답으로 끝을 맺는다. 그림을 통해 전해지는 사랑의 이야기는 그래서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를 떠올리게 한다. 그건 우정을 넘어선 사랑이야기고, 그래서 이성애의 틀을 벗어버림으로써 드디어 삶의 이야기가 된다. 그래서 영화가 끝나고도 관객들이 쉽사리 객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여운은 그 아련한 그리움과 슬픔만이 아니다. 그건 어찌 보면 찬란하면서도 슬픈 우리네 삶의 한 단면을 본 것 같은 데서 오는 먹먹함 때문이 아닐까.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영화 <소울메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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