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집 자식이 맏형 됐다”…기아 오피러스, 흑역사에서 명차로 뒤집힌 사연

기아 오피러스는 한국 자동차 산업의 격변기 속에서 탄생해, 기아 브랜드의 기함 자리를 9년간 지켜낸 상징적인 대형 세단이다. 상용차 중심 기업이었던 기아가 고급 세단 시장에서 존재감을 확보하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한 결과물이었으며, 동시에 현대자동차그룹 체제 안에서 재정립된 기아의 정체성을 보여준 모델이기도 하다.
기아는 1970년대 후반부터 고급 승용차 시장 진입을 모색해왔다. 6기통 차량 생산 제한이 해제되고 관용차 교체 수요가 증가하면서 대형 세단에 대한 시장의 관심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후 푸조 604, 포텐샤, 엔터프라이즈 등 다양한 대형 세단을 선보였지만 1997년 외환위기로 기아그룹이 부도에 이르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결국 기아는 현대자동차에 인수되었고, 독자적인 플래그십 전략 역시 큰 변화를 맞게 된다.
2003년 등장한 오피러스는 태생부터 독특했다. 본래 현대자동차가 개발하던 프로젝트를 기아가 넘겨받아 완성한 모델이었기 때문이다. 그랜저 XG 플랫폼을 기반으로 한 전륜구동 대형 세단이었으며, 이는 기존 기아 대형차들이 주로 후륜구동을 사용해왔던 점과는 차별화된 선택이었다. 차명 ‘오피러스(Opirus)’는 라틴어 ‘황금의 땅’을 의미하며, 기아는 이를 ‘의견 주도층(Opinion Leader Of Us)’이라는 의미로 설명했다.

출시 초기 반응은 엇갈렸다. 곡선 위주의 독특한 외관과 독립형 4등식 헤드램프는 기존 국산 대형 세단과는 확연히 다른 인상을 주었지만, 일부에서는 “재규어를 닮았다”거나 “생선 뼈 같다”는 조롱 섞인 평가도 나왔다. 포지셔닝 역시 현대 에쿠스와 다이너스티 사이에서 애매하다는 지적을 받으며 초기 판매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2006년 페이스리프트를 거친 ‘뉴 오피러스’는 전환점을 맞는다. 전면과 후면 디자인을 대폭 수정해 완성도를 끌어올렸고, 플랫폼도 그랜저 TG 기반으로 변경되면서 사실상 신차에 가까운 변화를 이뤘다.

알루미늄과 마그네슘 합금 적용으로 약 130kg을 경량화했으며, 3.3리터 및 3.8리터 람다 V6 엔진을 탑재해 성능과 정숙성 모두 개선했다. 주행 질감과 상품성이 크게 향상되면서 시장의 평가도 달라졌다.
2009년에는 ‘오피러스 프리미엄’으로 또 한 번의 변신을 시도했다. 기아의 새로운 디자인 아이덴티티였던 호랑이 그릴을 적용하고 LED 등화류를 도입해 세련된 이미지를 강화했다. 6단 자동변속기와 함께 출력도 향상됐으며, 버튼 시동 스마트키와 통풍 시트 등 고급 사양을 대거 적용해 상품성을 끌어올렸다.

오피러스는 후륜구동 기반의 현대 제네시스가 새로운 고급 세단 시장을 개척하는 동안, 전륜구동 기반의 전통적 대형 세단을 원하는 소비자층을 흡수하며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했다. 초기의 혹평을 극복하고 재평가를 이끌어낸 사례로, 기아 브랜드 이미지 제고에도 일정 부분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2012년 오피러스는 단종되었고, 그 자리는 완전히 새롭게 개발된 후륜구동 대형 세단 K9이 이어받았다. 오피러스는 기아가 현대그룹 체제 안에서 새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의 산물이었다. 독자 개발 모델은 아니었지만, 변화를 통해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해낸 기아의 과도기적 플래그십으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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