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오상열 성균관유도회 장기지부 회장 “효와 인의예지, 가정에서 시작”

황영우 기자 2025. 8. 19.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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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세월 속 유학의 길 지켜온 삶… “조모의 가르침, 내 인생의 뿌리”
삼년상 실천·서예 입선까지…“현대사회 갈등, 유교 근본에서 해법 찾아야”
오상열 성균관유도회 장기지부 신임 회장이 16일 경북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쓴 축문 등을 보이는 모습. 황영우 기자

'천륜(天倫)'이라 불리는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 간의 깊은 관계는 오늘날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가치로 남아있다. 최근 성균관유도회 장기지부 신임 회장으로 취임한 오상열(81) 회장은 "가정에서부터 부모와 자식이 살갑게 지내고 끈끈한 유대와 정이 있어야 유교의 가치가 시작될 수 있다"며 현대 사회의 갈등 해결책을 유교의 근본에서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격동의 시대를 살아온 그의 삶과 유교에 대한 깊은 통찰을 통해 인의예지(仁義禮智)의 가치가 더욱 중요해지는 현시대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격동의 시대를 견뎌낸 어린 시절
오상열 회장은 1945년 경북 청송 주왕산 갈밭에서 태어났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그의 조부 오종선 선생은 말을 타고 그곳으로 대피했다. 당시 그의 고모 네 분은 경주 최씨, 안동 권씨, 인동 장씨, 영천 이씨 가문의 남성들과 청송에서 결혼하며 첫 자리를 잡았다. 생사가 오가는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조부는 가문의 족보책을 가슴에 품고 다니며 '내 생명'이라 여겼다고 한다.

"우리 조부께서는 청송 경찰서에서 '우린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고향이 포항 장기면이고 만약 내가 공산주의자라면 여기서 죽어도 좋다'라고 강력히 항변하셨습니다."

청송에서 남의 셋방에 살며 힘든 시절을 보내던 가족들은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당시 9살이었던 오 회장은 가을에 주위의 도움을 받으며 포항 고향살이를 시작했다. 초등학교 학업은 마쳤지만 중학교는 가보지 못했던 그는 "한문만 알면 된다"는 주변 어른들의 조언에 따라 창녕 이씨 가문의 이동화 선생에게 3년간 한문을 사사받았다. 이 유학의 저력이 오 회장의 인생에 큰 힘이 되었다.
 
오상열 성균관유도회 장기지부 회장이 석전대제 때 이뤄지던 절차를 직접 기록해 만든 책 '축문'. 황영우 기자

△유림으로서의 기틀을 다지다
오 회장은 유교학도로서 기본을 다지는 데 조모인 김남곡 여사의 헌신이 컸다고 회상한다. 문중 어르신들이 집을 방문할 때마다 조모는 "우리 손자 글 좀 가르쳐 달라"고 청했다. 조모는 어린 오 회장에게 "글은 어렵다. 천 번 글을 쓰고, 천 번 글을 읽어야 그제야 원만한 글이 된다"라는 가르침을 주었다.

"조모님 말씀에 복종해 조모님이 살아계신 동안 붓을 손에 안 쥐어본 날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마당의 흙 위에 고사리 같은 손으로 한 획씩 글을 써내려갔죠."
 
오상열 성균관유도회 장기지부 회장이 과거 어린시절 나무 장작을 팔아 구입한 옥편. 황영우 기자

어린 오 회장은 산에서 나무 장작을 만들어 시장에 팔아 '옥편', '토정비결', '가정보감' 등 총 3권의 책을 구입한 후 부지런히 첫 공부를 익혔다. 이러한 자기주도적 학습 일화는 오늘날 학생들에게도 깊은 의미를 전한다.

실력이 향상되면서 오 회장은 공자 선생님의 제사인 '석전대제'에 참여하며 절차 등을 직접 기록해 책을 만들기도 했다. 제사의 축문을 쓰며 실력을 늘렸고, 이동화 선생으로부터 "넌 천재다"라는 칭찬을 받았다. 족제비 털로 만든 붓으로 익힌 계몽편, 명심보감, 소학 상·하권 등의 기본기는 서원 어르신들에게도 인정받았다.
 
오상열 성균관유도회 장기지부 회장이 과거 공부할 때 쓰던 벼루와 붓. 황영우 기자

△일상에서 실천하는 유교의 가치
오 회장의 유교적 소양은 일상생활의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되었다. 이북 출신인 김남식 건축자와 함께 신재집(새 집)을 짓는 일에 참여해 한옥 건축 기술을 배웠다. 일반 가정집뿐만 아니라 불교 사찰을 짓는 데도 동참할 정도로 실력을 쌓아 도목수(도대목)로 활동했다.

"이동화 선생님께 사사할 때, 매일 아침 식전에 새벽에 일어나서 2㎞ 거리를 걸어 다니며 3년 공부했던 근면함이 건축 일에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23살에 결혼한 오 회장은 아내의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제문 읽기에서 처가 어른들로부터 "과연 이 집 사위는 잘 봤다. 어떻게 저 나이에 공부해서 이런 실력을 가지다니 참 훌륭한 사람"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이는 당시 유학이 사회 속에서 가치를 인정받고 조상과 후대 사이의 중요한 연결 고리 역할을 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오 회장은 존경하고 사랑했던 조모가 돌아가시자 '삼년상'을 치렀다. 매일 세 끼 식사 때마다 음식을 올리고 담배를 태워 올렸으며, 매월 초하루나 보름(상망)에는 시장에서 포, 어물, 과일, 쇠고기 국거리 등을 제물로 준비했다.

"아침에 자식은 '에고, 에고', 손자는 '어이, 어이' 곡을 했습니다. 상망 다음날에는 산소에 가서 성묘를 하고 절을 한 뒤 '할머니 덕분에 공부를 잘해 제문글도 읽었습니다'라고 정성껏 보고했죠."

삼년상 기간에는 삼베옷(구지복)과 유건을 착용하고 대나무 지팡이를 짚었다. 어머니는 버드나무 지팡이를 사용했고, 남자는 다리에 행장을 착용했다. 행장 묶음은 남성이 돌아가시면 바깥쪽(외상)으로, 여성이 돌아가시면 안쪽(내상)으로 맨다고 설명했다.
 
오상열 성균관유도회 장기지부 회장이 2024년 제7회 포은서예국제대전(교류전)에서 받은 상장. 황영우 기자

△현대사회에 전하는 유교의 메시지
19살부터 장기향교를 중심으로 오늘날까지 많은 서원과 교류해온 오 회장은 최근 종손자의 권유로 서예 작품을 출품해 2024년 제7회 '포은서예국제대전'에서 입선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서예를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았지만, 그간 쌓아온 유학정신이 인정받은 것이다.

중절모를 쓰고 양복 차림으로 인터뷰 내내 곧은 자세를 유지한 오 회장은 오늘날 사회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고 강조했다.

"지금 유교는 저출산으로 인해 학교 학생들도 줄어들고 있는 현실에서 발전하기 어려운 환경입니다. 태어난 아이가 부모 젖이 아닌 소 젖을 먼저 먹고 격리되는 점부터 고쳐야 합니다. 부모와 살갗을 맞대고 서로의 냄새를 맡고 유대의 시간을 충분히 가져야만 그 다음 단계인 손님에 대한 예절, 인의예지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유학의 길을 찾는 데 많은 분들의 도움이 필요한 때입니다."
 
2024년 제7회 포은서예국제대전(교류전) 입선 작품. 황영우 기자

장기향교를 비롯한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에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을 교육하고 교화하기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고급기관인 향교가 중심이 되어 각 문중이 세운 서원과 교류하면서 유학을 발전시키고 배워나가는 구조였다. 그러나 전성기 때 200여 명에 달했던 성균관유도회 장기지부 회원이 현재는 45명 정도에 불과한 실정이다.

오상열 회장은 급변하는 현대사회에서도 유교의 근본 가치인 효(孝)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정신이 여전히 중요하며, 이는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의 삶은 격동의 시대를 거치며 유교의 가치를 지키고 실천해온 한 유림의 모습을 보여주며, 오늘날 우리 사회가 직면한 여러 갈등과 문제의 해결책을 전통적 가치 속에서 찾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