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란》…‘전(戰)’의 결과, ‘란(亂)’의 운명
임진왜란 배경으로 ‘혼란의 정국’ 속 갈등 다뤄
(시사저널=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올해 최고 화제작 중 하나로 손꼽혀온 《전,란》이 베일을 벗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지만 올해로 29회를 맞은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며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작품이다.
영화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조선을 배경으로 주인공들의 오랜 인연과 엇갈린 운명, 이들이 통과해야 하는 혼란의 정국을 다룬다. 연출의 메가폰은 《심야의 FM》(2010) 등을 연출한 김상만 감독이 잡았지만 그 전에 한국 영화의 간판 스타 여럿의 이름이 안팎에 드리운 작품이기도 하다. 박찬욱 감독이 제작과 각본에 직접 참여한 사극 대작이라는 점, 강동원과 박정민, 차승원 등 걸출한 배우들의 호화 캐스팅 역시 《전,란》에 한층 무게감을 싣는다.
한국 사극영화의 단골 시간 배경 중 하나인 임진왜란을 내세웠지만 《전,란》은 단순히 규모감 넘치는 액션 사극에 머무르려 하지 않는다. 영화는 인물들을 틀에 가두는 계급과 신분, 그들에게 닥친 난세의 운명을 고루 통과하며 더 깊은 이야기를 향해 성큼 나아간다.
극장에 가장 잘 어울릴 작품이라는 역설
영화는 두 남자의 사연에서 출발한다. 조선 최고 무신 집안의 노비 천영(강동원)과 그가 모시는 집안의 외아들 종려(박정민)다. 양인으로 태어났으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노비가 된 어린 천영은 종려의 집에서 갖은 고초를 겪고, 또래인 종려는 그런 천영을 남몰래 우정으로 보살핀다. 신분을 뛰어넘어 친구가 된 둘의 관계에 균열이 일어나는 것은 종려의 장원급제를 위해 천영이 이용되면서부터다. 천영은 면천의 약조를 받고 종려를 돕지만, 종려의 집안은 천영을 놓아주지 않는다.
때마침 발발한 전쟁의 흐름 안에서 두 사람의 상황은 더욱 악화된다. 왕의 피난길에 동행한 사이, 집안 노비들이 일으킨 반란 소식을 들은 종려는 그 주동자가 천영이라고 오해하고 뼈아픈 복수를 다짐한다. 의병이 된 천영과 군주인 선조(차승원)의 최측근 무관이 된 종려. 시간이 흘러 친구가 아니라 적으로 재회한 두 사람은 서로에게 분노의 칼끝을 겨눈다. 전쟁의 소용돌이와 불합리한 신분제도가 이들에게 각각 증오심만 남긴 것이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OTT 오리지널 영화를 개막작으로 선정한 것은 올해가 처음이다. 이를 두고 영화계 안팎에서는 영화제 개막작의 상징성을 퇴색시키는 결정이라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비판을 의식한 부산국제영화제는 "관객이 얼마나 즐길 수 있는지가 중요 기준이기에 넷플릭스 작품이라 해서 개막작에서 제외하는 일은 없다"고 못 박았다.
예견된 수순이기도 하다. 부산국제영화제는 주목할 만한 OTT 오리지널 콘텐츠를 소개하는 '온 스크린' 섹션을 2021년 신설하고, 최근 몇 년간 꾸준히 플랫폼의 경계를 허무는 작품들을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행보를 보여왔다. 올해만 해도 개막작 《전,란》을 포함해 《지옥》 시즌2 등 국내 작품뿐 아니라 《이별, 그 뒤에도》 등 넷플릭스의 해외 시리즈가 다수 부산에서 공개됐다.
부산에서 영화가 공개된 직후부터 분위기는 어느 정도 반전된 인상이다. 뚜껑이 열린 《전,란》은 대중성은 물론이고 작품 자체의 높은 완성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다만 못내 아쉬운 것은 스마트폰이나 노트북 같은 기기보다는 극장 스크린을 통해 만나는 것이 훨씬 생생하고 압도적인 체험을 선사할 만한 작품이라는 점이다. 애초 OTT 오리지널 영화라는 출발점을 생각했을 때 무색한 아쉬움이긴 하지만, 전통적 스크린과 가장 거리가 먼 작품이 극장에 가장 어울리는 포맷의 결과물이 됐다는 점은 《전,란》을 둘러싼 역설이다.
'전란(戰亂)', 즉 전쟁으로 말미암은 난리라는 뜻 대신 쉼표로 구분한 제목은 영화를 보고 나면 그 의미가 한층 또렷해진다. 본편은 여러 개의 장으로 나뉜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전(戰)', 그 아수라장의 풍경으로 이어지는 '쟁(爭)', 양반부터 천민까지 나라의 명운을 지키기 위해 맞서는 이들의 활약을 그린 '반(反)', 그리고 세상을 뒤엎으려는 이들의 '란(亂)'이 마지막을 장식한다. 전쟁이 아니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혼란과 애석하게 엇갈리지 않았을 운명들. 이들의 '란'은 '전'의 폭풍이자 결과다.
전장의 스펙터클이 아닌 난세의 갈등에 주목
《전,란》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현재와 과거의 시간을 오가며 천영과 종려 사이에 차곡차곡 깊어진 갈등의 골을 설득력 있게 풀어낸다. 전쟁터의 디테일은 오히려 '7년 후'라는 자막 하나로 과감히 생략하는 식이다. 대신 영화가 한층 공을 들이는 것은 전장의 스펙터클을 내세운 장르적 쾌감보다는, 난세에 휘말린 다양한 사람이 맞닥뜨리는 계급이라는 갈등 그 자체다.
우여곡절 끝에 천영이 합류한 의병대 안에는 다양한 입장 차이가 존재한다. 의병대장인 양반 김자령(진선규)은 백성들의 편에 서면서도 군주를 저버리지 않는 유교의 도를 다하고자 하고, 천영은 의병으로 활약한 사실을 통해 면천받길 소망한다. 이 집착이 이해되지 않는 천민 여성 범동(김신록)은 자신의 길을 새롭게 떠나 의병 활동 자체에 충실하고자 한다.
철저한 신분제로 나뉜 양반과 천민, 어떤 이유로 천영과 종려 모두에게 쥐어지는 어사검(무사 장원급제자에게 수여되는 검)과 농민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잡히는 대로 손에 쥔 농기구, 선조가 무모하게 밀어붙이는 경복궁 재건 계획과 폐허가 된 민가들의 풍경까지 이분적 대비는 《전,란》을 가로지르는 핵심이다.
결국 영화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전쟁의 자세한 면면이 아니라 그것이 가져온 역설의 파장이다. 명목뿐인 신분제는 무엇을 지킬 수 있었는가. 천하는 모두의 것이므로 주인이 없으며, 백성과 임금이 다를 바 없다는 사상을 주장했던 선비 정여립(1546~1589)의 이야기로 영화의 문이 열린 것은 단순한 설정이 아닌 셈이다.
전쟁 통에 '청의 검신'으로 불릴 만큼 빼어난 검술을 자랑하는 천영을 중심으로 한 액션 시퀀스들은 사극 액션에 기대하는 바를 만족스럽게 채워준다. 우연한 기회에 천영과 맞붙었던 왜군 장수 겐신(정성일)은 오래도록 그를 다시 만나 겨루기를 고대한다. 이윽고 극의 클라이맥스에서는 운명의 소용돌이가 모두를 한자리에 모이게 만든다.
해무 가득한 바닷가에서 천영과 종려 그리고 겐신까지 엉겨 붙어 벌이는 삼각 검투 액션은 《전,란》의 백미다.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현란한 액션이어서가 아니라, 지치고 분노한 자들의 시간과 감정이 처절하게 엉겨 붙는 장면이어서다. "검은 같되 분노가 다르다"는 겐신의 대사처럼 똑같이 칼을 휘두르지만 각자의 목적과 의지가 다른 이들의 사투는 비장한 동시에 치열하다.
민심과 국정 수습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문제적 캐릭터 선조를 포함해 박찬욱 감독 특유의 블랙코미디 향기가 짙게 묻어나는 유머의 구간들도 《전,란》에 매력을 더한다. 초반에 뿌려 놓은 씨앗들을 차곡차곡 잘 거두는 치밀한 각본, 모자람도 넘침도 없이 인물들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낸 좋은 연기, 섬세한 연출이 균형 좋은 삼각형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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