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벌이 없었던’ 도루왕 정수근…사상 최초 '4년 연속 도루왕' 독주 시대

[이재국의 베팬알백] ⑬ ‘우동수 시대’의 도루왕 정수근 이야기

1995년 OB 베어스에 입단한 루키 정수근이 베이스를 향해 몸을 날리고 있다. ⓒ두산베어스
『LG 이대형이 22일 잠실 두산전에서 1회 선두타자로 나서 볼넷을 골라 출루한 뒤 도루를 성공시켰다. 올 시즌 40번째 도루로 이대형은 지난 2007년(53도루), 2008년(63도루), 2009년(64도루)에 이어 4년 연속으로 40도루 고지를 밟았다. 프로 통산 두 번째. 최다 기록은 정수근(은퇴)이 기록한 7년 연속(1996~2002년) 40도루.』 <2010년 7월 22일자 스포츠조선>

1982년 KBO리그 출범 이후 여러 명의 ‘대도(大盜)’가 뜨고 졌다. 그중 통산 505개의 도루를 성공해 KBO 개인통산 도루 부문 역대 3위에 올라 있는 이대형은 대도 중의 대도. 위의 기사처럼 이대형은 2010년 KBO 역대 두 번째로 ‘4년 연속 40도루’에 성공하면서 역사에 귀중한 발자국을 찍었다.

그러나 이대형도 기록을 더 이상 연장하지 못했다. 연속 시즌 40도루는 ‘4년’에서 끝나고 말았다. 여기서 새삼 정수근의 기록이 돋보인다. 그가 작성한 ‘7년 연속 40도루’는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누구도 범접하지 못하는 전설로 남아 있다.

[베팬알백_베어스 팬이라면 죽기 전에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시즌2-두산 베어스 시대’ 12번째 주제는 ‘KBO 최초 4년 연속 도루왕’과 ‘KBO 유일 7년 연속 40도루’의 전설을 쓴 정수근 이야기다. 이 기록들은 두산 베어스뿐만 아니라 KBO리그 역사에서도 도루의 이정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1995년 덕수고를 졸업한 뒤 OB 베어스에 입단한 정수근. 첫해 키 176㎝에 몸무게 70㎏이었다. ⓒ두산베어스

◆ 1995년 OB의 고졸 히트상품

“덕수고 졸업하고 OB에 처음 입단했을 땐 프리배팅을 해도 타구를 내야조차 잘 못 넘겼어. 치면 땅볼이었지. 그래도 발이 워낙 빠르고 외야 수비도 곧잘 하는 것 같아서 대주자, 대수비 요원으로 1군에 데리고 다녔어. 그런데 뭘 해도 눈썰미가 있고 습득력이 빠르더라고. 처음엔 대주자로 나가면 벤치에서 도루 사인을 내기도 하고, 뛰지 말라는 사인을 내기도 했는데 어느 순간 그냥 그린라이트를 주게 됐지. 도루 센스가 남달랐어.”

'국민감독' 김인식 전 감독은 덕수고를 졸업한 뒤 1995년 OB 베어스에 입단한 정수근의 신인 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정수근’ 이름이 나오면 자연스럽게 연관검색어로 떠오르는 단어가 ‘도루’다. 그는 베어스 구단 역사에서 도루왕의 시대를 처음 개척한 인물일 뿐만 아니라 KBO리그 도루 역사에도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기도 하다.

그해 삼성 이승엽이 두 자릿수 홈런(13홈런)을 때리며 거포로서 두각을 나타냈다면, OB에서는 정수근이 빠른 발을 앞세운 고졸 신상품으로 떠올랐다.

덕수고 시절 100m를 11초에 주파하는 빠른 발로 주목받은 정수근은 1995년 고졸 연고 자유계약을 통해 OB에 입단했다.

1995년까지는 연고 지역 내 고졸 선수는 숫자 제한 없이 자유롭게 계약할 수 있었다. 당시는 대졸 선수가 당연히 즉시 전력감으로 평가되던 시대. 그런데 1994년 LG 김재현, 롯데 주형광 등을 필두로 고졸 선수들이 곧바로 팀 전력의 핵으로 떠오르게 되자 각 구단마다 고졸 선수를 싹쓸이하려는 폐단이 발생했다. 반면에 다른 연고 지역의 고졸 선수는 지명조차 할 수 없는 맹점이 있었다.

결국 1996년부터는 신인 드래프트 제도에 손질을 가했다. 구단별로 연고지 내에서 고졸 우선지명을 3명까지만 선택하고, 나머지는 2차지명에서 다른 연고지의 구단도 지명할 수 있도록 개선했다.

정수근은 이에 따라 투수 여준홍(동대문상고), 김유봉(배명고), 최용호(배명고) 등과 함께 마지막 고졸 자유계약 선수로 OB 유니폼을 입었다.

배명고 출신의 최용호(계약금 7500만 원)와 김유봉(6800만 원), 동대문상고 출신의 여준홍(6800만 원) 등에 비하면 정수근의 계약금 6000만 원은 적다고도 볼 수 있지만, 투수와 외야수의 차이를 고려하면 정수근 역시 그 시절 섭섭하지 않은 대우를 받았던 셈이다. 1년 전 동대문상고의 심정수가 계약금 3800만 원으로 OB 구단 역사상 고졸 야수 최고액에 입단했는데, 정수근이 이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1994년 시즌 말미에 선수단 집단이탈 사태가 발생하면서 OB는 김인식 감독을 새 사령탑으로 선임한 상황. 김인식 감독과 정수근은 OB 유니폼을 새롭게 입은 '입단 동기'였다.

1995년 OB 베어스 감독으로 부임한 김인식 감독 ⓒ두산베어스

김 감독은 1994년 가을, 이천 마무리훈련과 1995년 일본 쓰쿠미 스프링캠프부터 정수근의 빠른 발과 동물적인 외야 수비 감각을 눈여겨봤다. 그러면서 고졸 신인 첫해 대주자와 대수비 요원으로 1군 엔트리에 포함시키면서 선수단과 동행하도록 했다.

그 시절 OB 팀 내에 도루할 수 있는 선수로는 유격수 김민호와 1995년 홈런왕 김상호 등이 있었지만 기동력이 약했다. 더군다나 OB는 그때까지 도루왕을 한 번도 배출하지 못했을 정도로 전통적인 느림보 군단. 이런 상황에서 정수근의 베어스 입단은 OB의 기동력 야구에 날개를 달아준 격이었다.

정수근은 1995년 입단 첫해 117경기에 나섰지만 178타석(경기당 1.5타석)에 불과했다. 주로 대주자와 대수비로 나섰다. 타율은 0.214(154타수 33안타). 그러나 제한된 출전 속에서도 무려 25개의 도루를 성공했다. 그해 주전 유격수 김민호가 47도루로 롯데 전준호(69도루)에 이어 리그 2위에 올랐는데, 정수근은 리그 9위이자 김민호에 이어 팀 내 도루 2위를 차지했다.

물론 가끔씩은 의욕이 넘친 나머지 뛰지 않아야 할 상황에서도 도루를 시도하다 아웃이 되는 일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벤치에서 ‘뛰지 마라’는 사인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타고난 스피드와 과감한 슬라이딩, 센스가 강점인 그는 경험과 요령이 붙으면서 스타트 타이밍에서도 발군의 솜씨를 보이며 대도의 길을 닦아나갔다.

정수근(8번)이 곰탈을 쓰고 장난을 치고 있다. ⓒ두산베어스
『OB 고졸 신인 정수근. 나이 18세 9개월. 프로야구 최연소 선수다. 1m76㎝, 70㎏. 프로야구 선수로는 볼품없는 체격조건. 그러나 김인식 감독의 평가는 다르다. ‘언제고 한몫할 친구’, ‘타율은 2할대지만 5할타자 이상의 역할을 할 선수’라고 치켜세운다.』 <1995년 10월 8일자 경향신문>

이는 하루 전인 1995년 10월 17일 열린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10회초 팀 승리를 부른 활약을 펼친 정수근에 관한 기사이다. 당시 7회초 대수비로 나섰던 정수근은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지만 연장 10회초 1사 2루서 우중간을 가르는 1타점 3루타를 치면서 영웅이 됐다. 1승1패 후 이날 정수근의 결승타로 3차전을 잡은 OB는 결국 4승3패로 대망의 우승까지 도달했다.

김인식 감독의 말처럼, 정수근은 1996년부터 OB의 주전 중견수 자리를 꿰찼다. 타격에서도 일취월장했다. 전 경기(126경기)에 출장해 타율 0.253(490타수 124안타)에 2루타 20개와 3루타 6개를 때렸다. 힘도 붙으면서 내야를 넘기기 힘든 타자에서 홈런까지 1개를 곁들이는 타자로 변모했다.

무엇보다 풀타임 출장을 하자 도루수가 급격하게 늘었다. 무려 43개의 도루를 기록하면서 단숨에 해태 이종범(57도루)에 이어 리그 2위에 올랐고, 팀 내 최다 도루 선수로 우뚝 섰다.

1996년의 43도루는 KBO 역사상 유일한 ‘7년 연속 40도루’의 전설을 쓰는 역사의 시작점이었다.

정수근은 이어 1997년 50도루 고지를 밟으며 다시 한번 이종범(64도루)에 이어 리그 2위에 올랐다.

8번을 달고 LG전에서 도루를 성공하는 정수근. LG 유격수는 류지현. ⓒ두산베어스

◆ 이종범 이후 정수근 독주 시대…4년연속 도루왕+7년연속 40도루

‘바람의 아들’ 이종범이 1997년을 끝으로 일본프로야구(주니치 드래건스)에 진출하면서 KBO리그 도루 부문은 정수근의 독무대가 됐다.

1998년 44도루로 생애 첫 도루왕에 올랐고, 1999년 57도루, 2000년 47도루, 2001년 52도루로 4년 연속 도루왕을 휩쓸었다.

OB 시대 마지막인 1998년부터 두 번째 우승을 차지한 2001년까지, 정수근의 4년 연속 도루왕은 KBO 전인미답의 고지였다. 초창기 ‘원조 대도’로 꼽힌 김일권은 1982~1984년 3년 연속 도루왕에 올랐다. 해태 도루왕의 계보를 잇는 이순철은 1991~1992년 2년 연속 도루왕을 차지한 바 있다. 이어 이종범도 1996년과 1997년 2년 연속 도루왕에 오른 뒤 일본 무대로 떠났다.

도루를 하면 선수의 체력 소모가 심할 수밖에 없다. 늘 부상 위험이 뒤따른다. 여기에 발 빠른 경쟁자들은 끊임없이 나온다. 그래서 도루왕을 한 번은 할 수 있지만, 연속 시즌 도루왕을 하기는 힘들다. 작은 체격에도 불구하고 KBO리그에서 누구도 해내지 못한 4년 연속 도루왕에 오른 정수근의 성과는 그래서 더욱 눈에 띌 수밖에 없다.

정수근 이후 LG 시절 이대형(2007~2010년)과 삼성 시절 박해민(2015~2018년) 두 명이 4년 연속 타이기록까지 도달했을 뿐이다. 다시 말해 KBO리그에서는 연속 시즌 도루왕은 정수근이 최초로 작성한 4년 연속이 최고 기록이다.

특히 이종범이 KBO리그 무대에서 사라지자 시대를 함께할 경쟁 상대조차 없었다. 정수근이 4년 연속 도루 맨 위를 점령한 사이, 해마다 도전자가 나섰지만 2위 자리의 얼굴은 매년 바뀌었다. 1998년에는 호타준족의 현대 박재홍(43도루), 1999년에는 삼성의 외국인타자 빌리 홀(47도루), 2000년에는 해태의 외국인타자 헤수스 타바레스(31도루), 2001년에는 한화의 김수연(42도루)이 도루 부문 2위에 돌아가며 올랐지만 정수근의 발을 넘어서지 못했다.

해태 이종범이 일본 무대로 떠난 뒤 정수근은 도루 라이벌도 없이 KBO 최초 4년 연속 도루왕에 올랐다. 사진은 2002년 KBO리그에 복귀한 KIA 이종범 ⓒ두산베어스

정수근은 2002년 잦은 부상 여파로 고전했다. 전년도 3할대(0.306)를 기록했던 타율은 0.235(426타수 100안타)로 급전직하했다. 출루율 0.310은 데뷔 이후 가장 낮은 수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회만 생기면 달렸다. 2002년 39개의 도루를 기록하고 있던 정수근은 시즌 최종전에 극적으로 40도루를 완성했다.

인천 문학구장에서 열린 SK전. 이날 정수근은 사실상 40도루에 욕심을 내지 않았다. 전상렬에게 선발 중견수 자리를 물려주고 벤치에 앉아 있었다. 팀이 2-7로 끌려가던 7회초 2사 1루. 여기서 김인식 감독은 정수근을 전상렬 대주자로 내보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기회. 하필이면 SK 마운드에는 7회부터 왼손투수 가득염이 올라와 있었다. 포수는 양용모. 투수가 1루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상황에서 시동을 걸어야 했다. 점수 차가 컸지만, 누구나 정수근이 달릴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초구에 운명을 걸었다. 2번타자 장원진이 헛스윙을 해주는 사이, 정수근은 날렵하게 2루에 미끄러져 들어갔다. 최수원 2루심이 힘차게 양팔을 옆으로 벌렸다. 세이프. 마침내 시즌 40도루를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이로써 1996년부터 2002년까지 정수근은 7년 연속 40도루 작성하는 대역사를 썼다.

정수근의 7년 연속 40도루는 현재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영역에 들어가 있다. 이 부문 역대 2위가 4년 연속 40도루일 뿐이다. 앞서 전문에 기술했듯이, ‘대도’의 계보를 잇는 이대형이 2007~2010년 기록했다.

하지만 ‘발에는 슬럼프가 없다’지만 세월 앞엔 장사가 없다. 모든 도루왕들은 세월을 이기지 못한다. 정수근 역시 마찬가지였다. KBO 역사에서 누구도 해내지 못했고, 어쩌면 누구도 해내지 못할 ‘7년 연속 40도루’를 달성한 뒤로 도루 부문에서 내리막길을 걸었다.

2003년 하와이 전지훈련 도중 폭력 사건에 휘말렸고, 크고 작은 부상 속에 89경기 출장에 그쳤다. 타율은 0.321(262타수 84안타)로 도약했지만 도루는 데뷔 후 최소인 15개에 그쳤다. 그리고는 2003시즌 후 프리에이전트(FA) 자격을 얻은 뒤 롯데와 6년 계약을 맺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롯데 유니폼을 입은 뒤 한 시즌 최다 도루가 24개였다.

정수근이 승리 후 맨 앞에 서서 동료들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 뒤로 최경환, 홍원기, 전상렬, 홍성흔, 안경현 등이 보인다. ⓒ두산베어스

◆ 거포 ‘우동주 트리오’ 사이에서 도루의 묘미 알려준 날쌘돌이

흔히 ‘야구의 꽃은 홈런’이고 한다. 그러나 홈런만으로 야구가 완성되지는 않는다. 시대에 따라 가치와 비중이 달라지고 있지만, 도루는 예나 지금이나 야구에서 중요한 공격 옵션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특히 다른 스포츠에 비해 다소 정적인 면과 쉼표가 많은 야구에서 도루는 스피드와 박진감을 입히고 동적인 생명력을 불어 넣는다.

도루는 발만 빠르다고 되는 건 아니다. 과거 육상 국가대표 선수 출신으로 100m 달리기 국내 최고 기록(10초34)을 보유하고 있던 서말구가 대주자 요원으로 롯데에 입단했지만 도루를 1개도 성공하지 못했던 것은 달리는 능력과 도루 능력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흔히 도루는 스피드(Speed), 스타트(Start), 슬라이딩(Sliding)에 센스(Sense)까지 4S가 버무러져야 성공할 수 있는 종합예술이라고 한다.

두산 시절 김평호 1루코치가 정수근과 도루 타이밍에 관해 얘기를 나누고 있다. ⓒ두산베어스
“역대 도루왕과 비교해 보면 다들 비슷비슷한 능력을 갖추고 있죠. 정수근은 타고난 스피드에 스타트 타이밍도 좋았고, 슬라이딩과 센스까지 모두 갖춘 선수였습니다. 역대 도루왕 중에 정수근이 가장 빠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가장 돋보인 것은 센스였습니다.”

KBO리그 주루 분야 지도자로 명성을 얻은 김평호(현 롯데) 코치의 얘기다. 김 코치는 1996년 OB에서 코치 생활을 시작해 2003년까지 베어스에서 김인식 감독을 보좌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대도로 성장하는 정수근을 지도하고 지켜봤다.

“당시는 나도 정수근 때문에 깜짝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처음엔 너무 과감해 놀랐죠. 장점이기도 했지만 자신을 너무 믿었어요. 상대가 견제하고 대비할 것이란 걸 몰랐죠. 그때 상대 벤치나 배터리의 견제구 사인, 피치아웃 사인, 홈 투구 동작 등등을 알려줬어요.”

김 코치는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나중엔 제가 또 놀랐어요. 어느 순간부터 알려주지 않은 것도 스스로 찾아내 알고 있더라고요. 투수가 세트포지션에 들어갈 때 손 위치나 그립 등을 보고는 감각적으로 변화구 타이밍과 견제 타이밍 등을 포착하더라고요. 투수와 포수만 보는 게아니라 상대 덕아웃도 보고…. 그만큼 상대 팀에 대해 연구도 많이 했던 거죠. 어떤 때는 일부러 견제구를 유인한 뒤에 달리는 승부수를 띄우더라고요. 배짱과 센스는 최고였습니다. 저도 정수근 때문에 공부를 많이 하게 됐습니다.”

정수근은 에너지가 많은 선수였다. 깨끗한 유니폼으로 집에 돌아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런 정수근의 발야구와 허슬플레이는 ‘우동수 트리오’로 상징되던 베어스의 거포들 틈바구니에서 야구의 색다른 맛을 팬들에게 선사했다. 베어스 야구도 1990년대 중·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장타뿐만 아니라 기동력까지 가미한 짜임새 있는 두산만의 색채를 만들며 강팀으로 도약했다.

1999년 생애 첫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는 정수근 ⓒ두산베어스

정수근 베어스 역사에서 중견수 계보의 축이 되는 선수이기도 하다. 1980년대에는 최초 신인왕 박종훈이 호타준족 주전 중견수로 자리 잡았지만 부상으로 꽃을 피우지 못했다. 그 이후 이렇다 할 중견수가 나타나지 않던 시점에 1990년대 중반 정수근이 출현했다. 정수근은 베어스 역사상 최초의 도루왕으로 성장하면서 공격과 수비, 주루가 되는 주전 중견수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그 뒤로 이종욱, 민병헌, 정수빈 등이 공·수·주를 갖춘 주전 중견수 계보를 이어 베어스의 중원을 지켜왔다.

개성 넘치고 톡톡 튀는 스타일. 그라운드에서 무거움과 엄격함이 중요시되던 그 시절, 귀고리를 하고 야구장에 나타나는가 하면 물들인 헤어스타일로 그라운드를 휘젓기도 했다. 이는 개성을 존중하고 용인하는 덕장 김인식 감독을 만난 덕분에 시도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야구 외적으로만 튄 것이 아니었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국가대표팀에 발탁되고, 골든글러브를 두 차례(1999년, 2001년) 수상할 정도로 KBO리그를 대표하는 외야수로 성장했다.

정수근은 그라운드의 장난꾸러기였다. 2002년 올스타전에서 SK 와이번스를 상징하는 비룡 마스코트와 씨름을 하고 있다. ⓒ두산베어스

팬서비스에도 진심인 선수였고, 넘치는 끼와 화려한 액션, 재밌는 말투로 팬들을 야구장으로 불러 모으는 ‘스포테이너’로 각광받았다. 롯데 이적 후 2004년과 2007년 두 차례나 올스타전 MVP에 오를 정도로 큰경기와 이벤트에 강한 선수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넘치는 끼와 에너지가 종종 그라운드 밖에서 잘못 발산돼 크고 작은 사건·사고를 일으켜 팬들을 안타깝게 만들었다. 그 탓에 충분히 자신의 기량을 펼치지 못하고 불명예스럽게 서둘러 유니폼을 벗었다.

1995년부터 2009년까지 KBO리그에서 15년간 활약하며 통산 타율 0.280, 1493안타, 24홈런, 450타점, 866득점의 성적을 남겼다. 무엇보다 통산 474도루로 역대 도루 부문 4위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그가 선수 생활 말년에 야구에 더 집중했더라면 이보다 훨씬 더 좋은 숫자를 채울 수 있지 않았을까. 정수근은 라이벌조차 없는 도루왕 독주 시대를 열어간 주인공이었지만, 결국 술이 야구인생의 가장 큰 라이벌이 돼버렸다. 그의 화려했던 커리어를 스틸해버렸으니 말이다.

정수근이 베이스를 향해 힘차게 슬라이딩을 하고 있다. 그는 그라운드에서 몸을 아끼지 않는 허슬플레이어였다. ⓒ두산베어스

이재국

야구 하나만을 바라보고 사는 ‘야구덕후’ 출신의 야구전문기자. 인생이 야구여행이라고 말하는 야구운명론자.

현 스포팅제국(스포츠콘텐츠연구소) 대표

SPOTV 고교야구 해설위원 / OBS라디오 프로야구 해설위원

전 스포츠서울~스포츠동아~스포티비뉴스 야구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