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의 표적이 된 장면
5회 초다. 게임이 아직 한참 남았다. 이제 겨우 절반 정도가 지났다.
그런데 믿을 수 없는 장면이 포착된다. 홈 팀 덕아웃의 한 켠이다. 누군가 눈을 감은 모습이다.
아니, 감은 정도가 아니다. 난간에 얼굴을 기댄 채, 정신없이 졸고 있다. 아예 꿀잠에 빠진 것처럼 보인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다. 눈을 크게 뜨며, 머리를 넘긴다. 그리고 애써 아닌 척한다. 그러나 눈에는 잠이 가득하다. 그런 모습이 전 세계에 생중계된 TV 화면에 잡혔다.
주인공은 월드 스타다. MVP를 몇 번이나 차지한 MLB 최고의 선수다. 바로 오타니 쇼헤이(30)의 모습이었다.
모든 팬들이 깜짝 놀랐다. 다른 사람도 아니다. 가장 모범적이라고 칭송이 자자한 인물이다. 그런 선수가 경기 중에 낮잠에 빠지다니…. 그것도 치열한 라이벌전이 한창인 현장이다. 다들 지켜보는 그라운드였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일찍이 들어본 적도 없다. 상상한 적도 없는 해프닝이다. 당연히 수많은 SNS의 표적이 된다.
하지만 다행이다. 대부분 이해가 된다는 반응이다.
당시 스코어가 이를 말해준다. 이미 2회에 10-0으로 벌어졌다. 싱겁기 짝이 없는 승부가 됐다.
잠이 들 무렵에는 14-1로 더 벌어진다. 최종 점수는 18-2로 마감됐다. 직전 월드시리즈를 치렀던 라이벌의 대결 치고는 영 맥 빠진 일전이었다.
데이브 로버츠 감독도 눈치를 챘는지 모른다. 다음 이닝에 교체해 준다. 4타수 2안타, 2득점으로 기여한 지명타자의 업무는 그걸로 끝났다.
경기 종료 10분 만에 퇴근
따지고 보면 그렇다. 피곤할 법도 하다. 요즘 하는 일이 하나둘이 아닌 탓이다.
우선 투수 복귀를 서둘러야 한다. 이날도 게임 전에 별도의 과정을 겪었다. 타자를 세워놓고 던지는, 이른바 라이브 피칭을 했다.
어디 그뿐인가. 집에서도 쉴 수 없는 일상이다. 얼마 전에 첫 딸을 얻었다. 밤낮 없는 육아에 힘을 쏟을 시기다.
누구보다 잠을 강조하는 루틴이다. 하루 10시간 이상을 자야 한다. 그런 믿음이 누구보다 강하다. 훈련 시간은 줄여도 그만이다. 수면 시간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신조다.
하지만 아이 앞에서는 어쩔 수 없다. ‘육아 슬럼프’를 우려한 전문가들도 여럿이다. 심지어 로버츠 감독조차 걱정을 비치기도 했다.
흥미로운 것은 일본 언론의 반응이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전하는 그들이다. 당연히 ‘낮잠’ 혹은 ‘꿀잠’ 소식은 흥미로운 뉴스다.
그런데 의외다. 대부분이 모른 척이다. 몇 개 매체가 간단한 언급으로 끝낸다. 그중 하나는 한국 미디어의 보도를 소개하는 정도다. 나머지는 ‘다저 네이션’ 등의 현지 매체를 인용하는 선에서 멈춘다.
대신 ‘다저스의 싱거운 대승’, ‘양키스의 굴욕적 패배’ 같은 키워드가 헤드라인을 장식한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경기였다’, ‘그도 인간이다’, ‘좀 자도 괜찮다’ 하는 투다.
이들은 오히려 퇴근 시간에 주목한다. ‘오타니가 경기 종료 후 11분 만에 신속하게 귀가했다’ 같은 사실을 전한다.
아끼는 후배의 맹활약
MVP의 안식을 보장한 요소는 또 있다. ‘아끼는 후배’의 맹활약이다. 바로 김혜성(26)의 맹타, 그리고 거듭된 호수비였다.
모처럼 만의 선발 기회를 잡았다. 그걸 놓치지 않는다. 무려 4타수 4안타다. 볼넷 1개를 포함해 5출루 경기를 했다. 타점 2개, 득점 3개가 따라온다.
특히 2회 두 번째 타석에 눈길이 간다. 시즌 2호 홈런을 터트렸다. 덕분에 스코어는 10-0으로 벌어진다.
주목해야 할 이유가 있다. 처음 좌완을 상대했기 때문이다. 불펜에서 나온 브렌트 헤드릭과의 승부였다. 카운트도 1-2로 몰렸다.
그러나 이걸 이겨냈다. 3개의 파울로 버텼다. 그리고 8구째를 맞았다. 92.2마일(148㎞) 짜리 몸 쪽 높은 코스로 오는 꽤 어려운 공이었다. 그걸 담장 밖으로 넘겼다. 시즌 2호째였다.
타구의 질도 최상급이다. 발사각도 31도의 이상적인 곡선을 그린다. 출구 속도 102.8마일(165㎞), 거리 412피트(126m)로 측정됐다.
홈을 밟으며 예의 세리머니가 또다시 연출된다. 영접을 나온 선배 오타니와 공손한 ‘두 손 하이 터치(하이 파이브)’가 팬들을 즐겁게 만든다.
하루 만에 각종 공격 지표도 수직 상승한다. 타율은 0.366에서 0.422로 급격히 올라갔다. 그냥 정확성만 증가한 것이 아니다. OPS(출루율+장타율)는 무려 1.058로 크게 높아졌다.
립 서비스는 최상급
그것 만이 아니다. 거듭된 호수비가 인상적이다.
첫 번째는 3회 초 유격수 자리에서 나왔다. 요르빗 비바스의 직선 타구를 잡아낸다. 그리고 몸을 날려 2루 베이스를 찍었다. 주자까지 잡아내려는 시도였다.
최초 판정은 세이프였다. 그러나 비디오 판독으로 결과가 뒤집혔다. 더블 아웃으로 게임의 흐름이 바뀐다.
이닝을 마친 뒤였다. 덕아웃 풍경이 중계 화면에 잡힌다. 선발투수 랜던 낵(27)이 김혜성 앞으로 달려온다. 그리고 90도로 고개를 숙인다. 고비를 넘기게 해 준 고마움에 대한 표현이다.
또 있다. 이번에는 중견수로 옮긴 6회였다. 애런 저지의 강력한 타구가 좌중간 펜스까지 날아갔다. 누가 봐도 당연한 2루타였다.
그런데 번개 같은 주력이 발휘된다. 어느 틈에 달려가 시간을 줄인다. 그리고 공을 잡아, 2루로 쏜다. 베이스 위로 완벽한 택배가 만들어진다. 다급한 저지가 슬라이딩까지 해봤다. 그러나 소용없다. 태그 아웃을 만들어낸 명장면이 탄생한다.
로버츠 감독도 입에 침이 마른다. 최상의 립 서비스를 날린다.
“혜성의 플레이에서 뜨거운 열정과 순수한 기쁨이 느껴진다. 그라운드에서 뛰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보인다. 그를 보는 우리 팀의 모든 선수들도 여기에 공감하고, 힘을 얻는다.”
왼손 투수를 상대로 한 홈런, 호수비에 대한 부분에도 감탄이다.
“어려운 카운트를 잘 이겨냈고, 결국 홈런까지 쳐냈다. 무척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또 수비에서도 좋은 플레이를 해냈다. 랜던(낵)이 덕을 많이 봤다. 전체적으로 좋은 운동 능력을 지녔다. 주어진 기회도 잘 살리고 있다.”
물론 입에 발린 말뿐이다.
4안타를 치면 뭐 하나. 좌투수 공을 넘기면 뭐 하나. 다음 날 경기는 또 빠져야 한다. 타순표에서 제외된 채, 벤치에서 출발해야 한다.
꿀잠이 필요한 것은 오타니가 아니다. DR(데이브 로버츠)도 좀 재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