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세영이 잠시 코트에서 물러난 사이, 여자 배드민턴 판도가 이렇게까지 빠르게 흔들릴 줄은 많은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공백의 한가운데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강하게 존재감을 드러낸 이름이 바로 천위페이다. 중국 여자 단식의 간판이자 오랫동안 안세영과 라이벌 구도를 형성해온 이 선수는, 인도네시아 마스터스에서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코트를 지배하고 있다. 경기 내용과 결과를 차분히 들여다보면 ‘운이 좋았다’거나 ‘대진이 쉬웠다’는 말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흐름이다.

이번 대회에서 천위페이가 보여주는 모습은 단순히 승리를 쌓아가는 수준을 넘어선다. 32강과 16강, 그리고 8강까지 모두 2-0 완승이다. 더 인상적인 건 경기 시간이다. 이틀 동안 두 경기를 치르는 데 걸린 시간이 53분에 불과했다. 웬만한 선수라면 한 경기 소화하기에도 빠듯한 시간이다. 상대가 약했기 때문이라고 넘기기엔 점수 차와 경기 내용이 너무 일방적이다. 율리 다왈 야콥센을 상대로 한 16강전에서 21-7, 21-9라는 스코어는 천위페이의 현재 컨디션과 집중력이 어디까지 올라와 있는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사실 천위페이는 안세영 시대 이전부터 세계 최정상급 선수였다. 도쿄 올림픽 금메달, 수차례 세계선수권과 월드투어 우승을 거치며 이미 커리어는 완성형에 가깝다. 다만 최근 1~2년 사이 안세영이라는 절대 강자가 등장하면서, 천위페이는 ‘넘어야 할 선수’라기보다는 ‘넘어야 할 벽 앞에 서 있는 선수’라는 인상을 줬다. 실제로 지난 시즌 안세영이 70승이 넘는 압도적인 성적을 쌓는 동안, 천위페이 역시 패배를 거듭 경험했다. 그럼에도 두 선수의 통산 상대 전적이 14승 14패라는 점은 여전히 의미가 크다. 안세영을 상대로 끝까지 맞설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선수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이번 인도네시아 마스터스는 그런 천위페이에게 주어진, 말 그대로 숨 고르기이자 반등의 무대다. 안세영뿐 아니라 왕즈이, 한웨 등 상위 랭커들이 연초 빡빡한 일정 끝에 휴식을 택하면서 대진표는 확연히 가벼워졌다. 그렇다고 해서 이 무대를 아무나 지배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톱 랭커가 빠진 자리는 언제나 누군가 채우게 돼 있지만, 그 자리를 ‘압살’이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채우는 건 결국 실력이다.
푸살라 신두와의 8강전은 천위페이의 노련함이 빛난 경기였다. 신두는 올림픽 메달리스트이자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선수다. 한때 세계 2위까지 올랐던 경험도 있다. 그러나 천위페이는 경기 흐름을 절대 빼앗기지 않았다. 1세트는 단 한 번의 리드도 내주지 않았고, 2세트에서 잠시 흔들리는 듯 보였지만 인터벌 이후 다시 자신의 리듬을 찾았다. 판정 항의로 신두가 흔들린 틈을 놓치지 않고, 차분하게 점수를 쌓아 올리는 모습은 경험 많은 강자의 전형이었다.

이 대회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천위페이의 몸 상태다. 말레이시아 오픈에서 안세영과의 맞대결을 앞두고 어깨 통증으로 기권했을 때만 해도 우려의 시선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움직임을 보면 부상 여파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체력과 스피드, 수비 반응이 한층 가벼워 보인다. 이는 지난해 말 월드투어 파이널에 출전하지 못하며 상대적으로 체력을 비축한 효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모두가 달릴 때 잠시 멈춰 섰던 선택이, 지금은 분명한 이점으로 돌아오고 있다.
중국 현지 반응이 긍정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안세영 없는 대회지만 반드시 우승해야 한다”는 말은, 단순한 기대를 넘어 다시 주도권을 되찾고 싶다는 바람에 가깝다. 중국 배드민턴은 오랫동안 여자 단식을 지배해왔지만, 최근 몇 년간 그 자리를 안세영에게 내준 상황이다. 천위페이가 이번 대회에서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린다면, 그것은 단순한 슈퍼 500 타이틀 하나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하반기에 예정된 세계선수권과 아시안게임을 향한 자신감 회복, 그리고 안세영과의 재대결을 준비하는 중요한 신호가 될 수 있다.

물론 냉정하게 보면 이번 대회의 무게감은 제한적이다. 상금 규모나 랭킹 포인트, 출전 선수 면에서 슈퍼 1000이나 750급 대회와 비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스포츠에서 흐름이라는 것은 숫자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연승이 쌓이고, 경기 시간이 짧아지며, 코트 위에서 여유가 생기기 시작하면 선수의 표정과 플레이는 확연히 달라진다. 지금 천위페이가 딱 그런 국면에 있다.
안세영이 빠진 자리는 비어 있는 듯 보이지만,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기회의 자리다. 천위페이는 그 자리를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확실하게 차지하고 있다. 중요한 건 이 흐름을 어디까지 이어갈 수 있느냐다. 준결승과 결승에서도 지금과 같은 경기력을 유지한다면, 이번 우승은 ‘안세영이 없어서’가 아니라 ‘천위페이가 준비돼 있었기 때문’이라는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여자 단식의 구도는 다시 한 번 흥미로운 긴장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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