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승리라는 결과를 만들기 위해서, 점수를 내기 위해서는 뭐라도 해야 한다.
가장 빠르고 간편한 득점 방법은 타자가 시원하게 담장을 넘겨주는 것이다.
그 다음 방안은 연속 안타로 깔끔하게 주자를 홈으로 불러들이는 것이다.
공을 맞히지 않고도 점수를 만들 수는 있다. 상대의 제구 난조로 밀어내기로 점수를 만들 수 있다.
가끔 끝내기 폭투, 끝내기 보크가 나오기도 한다.
타자와 투수의 손이 아닌 주자의 발로 점수를 만들 수도 있다.
발로 만드는 점수는 홈런만큼이나 짜릿하기도 하다. 그만큼 상대의 허를 찔렀다는 것이니까.
루상에 나가 있는 것만으로도 “나 뛰어요”라고 선언한 것 같은 선수들이 있다.
KIA에서는 박찬호, 최원준 그리고 건강한 김도영이 그런 선수다. 나가면 귀찮은 선수.
상대 입장에서는 뛸 것 같은, 또는 뛰는 선수 범주에서 벗어난 이의 질주가 더 아찔하다.
김규성이 그런 아찔한 선수다.
185㎝의 장신 내야수인 김규성은 날렵한 이미지까지 보유한 ‘뛸 것 같은’ 선수다. 하지만 단순 스피드로는 보이는 것처럼 엄청 빠른 선수는 아니다.
그럼에도 김규성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강렬한 장면에는 주루가 있다.
김규성 스스로 “야구하면서 가장 큰 업적이라고 해야 하나? 그럼 느낌을 다시 느끼고 싶다”고 말하는 그 장면.
김규성이 꼽는 인생 장면은 2023년 4월 29일 KIA와 LG가 맞붙은 잠실야구장에서 연출됐다.
KIA가 5-3으로 앞선 9회초 2사 만루에서 김규성이 홈으로 뛰어 들어왔다.
덕아웃에 있던 동료들도 예상하지 못했던 홈스틸이었다.
만원 관중이 들어찼던 이날 김규성은 인생 최고의 달리기를 했다.
KIA가 시즌 첫 스윕승을 완성한 두산과의 주말 3연전 승리에도 김규성의 발이 있었다.
지난 17일 더블 헤더 1차전, 3-2에서 KIA의 7회말 공격이 전개됐다.
김선빈이 볼넷으로 출루하자 대주자 김규성이 투입됐다. 폭투에 이어 최형우의 볼넷이 나오면서 무사 1·2루.
타자 박정우와 주자 김규성은 초구 볼을 지켜봤다.
그리고 2구째 김규성이 3루로 달렸다.
포수 양의지가 급히 3루로 공을 던져봤지만 송구 실책이 나오면서 김규성은 홈까지 파고들었다.
이 경기는 5-2, KIA의 승리로 끝났다.
김규성은 극적인 주루 장면에 대해 “그렇게 빠른 선수가 아니라서 상대가 신경을 안 써서 성공할 수 있지 않았나”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상대의 방심을 이야기했지만, 어찌 됐든 시도를 했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다.
타격은 타자의 당연한 의무다. 10번의 타석에서 3번만 성공해도 좋은 타자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주루는 위험부담이 크다.
잘하면 상대를 흔드는 결정타가 되지만, 오히려 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50% 확률의 엄청난 실패가 될 수 있다.
김규성은 “실패가 됐든 성공이 됐든 뭘 해봐야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계속 시도를 하는 것 같다. 실패하면 그 영향이 크겠지만, 실패를 통해서 얻는 것도 있다”며 “실패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좋은 실패라고 생각한다. 두산전에서 실패했다면 다음 비슷한 상황이 왔을 때 템포를 더 빨리하거나, 이런 상황에서는 뛰면 안 되고 타자에게 맡겨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내야에 김선빈, 박찬호, 김도영이 버티고 있는 만큼 김규성은 기회가 오면 100%의 수비를 보여줘야 하고, 과감한 주루로 득점에 기여도 해야 한다.
자신이 해야 하는 역할이자 생존의 방안이기 때문에 김규성은 두려움 없이 달리고 있다.
처음부터 과감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이야기대로 실패로 배웠다.
김규성은 “원래 과감하지 못했는데 조재영 코치님이 오시고 나서 더 발전한 것 같다. 후반에 중요할 때 나가는데 점수 차가 어떻게 되고, 몇 회이고, 주자가 누가 있고 그런 상황을 계속 생각하면서 플레이하면 긴장도 덜 해지고 여유가 생긴다고 코치님이 많이 이야기해 주셨다”며 “가장 기억에 남았던 말은 ‘계속 실패해 봐라’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셨다.
실패해도 얻는 것이 있으니까 계속 시도하라고 하셨는데, 그것에 바뀌었다”고 말했다.
과감한 도전과 실패의 가치를 배운 김규성은 ‘강심장’ 주자로 이제는 ‘확률 싸움’을 하고 있다.
김규성은 “코치님이 처음에는 과감하게 하라고 이야기하셨다면, 지금은 확률적인 이야기를 해주신다. 투수의 투구 습관 등에 대해서 이야기 해주시니까 그것을 생각하면서 과감하게 하고 있다”며 “대주자로 한 번씩 이런 역할을 하면 짜릿하다. 팀에 도움이 됐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선수들에게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지만, 조재영 작전 코치는 사실 실패가 두렵다.
자신의 판단으로 경기 결과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는 만큼 실패는 두렵다.
주루·작전에서 실패가 나오면 화살은 선수가 아닌 코치에게 먼저 향한다. 하지만 가장 과감하게 판단하고 움직여야 승리 확률을 높일 수 있다.
조재영 코치는 “(선수는)죽어도 되지만 (코치는)죽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선수들이 실패하지 않게 선수들을 독려하고, 살 수 있는 확률을 높여줘야 하는 역할.
조재영 코치는 그래서 매년 자신만의 특별한 수첩을 만들고 있다.
확률을 높이기 위한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그걸 기록으로 남겨놓고 있다.
투수별로 견제 능력과 견제 동작, 슬라이드 스텝, 투수 습관 등을 빠짐없이 정리해 놓는다. 그 정보를 바탕으로 순간순간 판단하면서 확률을 높이고 있다.
조재영 코치는 “선수가 확률적으로 살 수 있는 타이밍을 잡아줘야 한다. 확률을 높일 수 있게 이야기해 준다”고 밝혔다.
김규성의 3루 도루 상황에서도 조재영 코치는 확률 계산을 했다.
수첩에 적어둔 데이터를 머리에 담고 있는 그는 경기 도중에는 눈으로 확률을 높인다.
넓은 시야로 타자·주자·투수·야수를 동시에 살피면서 실시간으로 확률을 생각한다.
조재영 코치는 “기습 번트 사인이 났는데 3루수가 앞에 있었다. 그렇게 되면 베이스로 들어오기 힘드니까 초구에 뛰라고 했었다. 그런데 2루 도루는 많이 했는데, 3루 도루는 많이 안 해봐서 규성이가 초구에 못 왔다. 다음에 더 강하게 오라고 했다. 규성이가 뛰었으니까 상대 실수가 나오고 쐐기점이 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뛰는 야구로 시즌 첫 4연승까지 이을 수 있었던 KIA지만 초반 흐름은 기대했던 것과는 달랐다.
조재영 코치는 “감독님이 나한테 거의 맡기시는 편이다. 팀 성적이 안 좋으면 적극적으로 뛰기 힘들다. ‘과감하게’가 어렵다. 흐름을 끊으면 안 된다. 뛰는 야구에서 돌파구를 찾을 수 있지 않냐고 하는데, 부상자도 많이 나오기도 했고 처음에는 복합적으로 못 뛰기도 했다”고 이야기했다.
올 시즌 KIA를 ‘우승후보’로 꼽는 요인 중 하나가 주력이었다.
도루왕 출신의 박찬호와 함께 공격적인 주루의 최원준, 리그 최고의 발을 보유한 김도영이 버티고 있는 ‘육상부’는 막강하다.
하지만 김도영이 개막과 함께 햄스트링 부상을 당하면서 김도영의 질주에 제약이 생겼다.
박찬호도 시즌 초반 무릎 부상을 당하면서 몸상태가 올라오는 데 시간이 걸렸다.
최원준은 기복 많은 시즌을 보내면서 뛸 기회 자체가 많이 없었다.
KIA가 올 시즌 성공한 도루는 29개로 전체 8위다. 가장 많은 도루를 기록한 한화(47개)보다 18개나 적다.
타격 부진과 부상으로 양으로 승부하지 못하고 있지만 대신 ‘성공률’에 집중해 도루 가치를 높이고 있다.
지난 시즌 KIA는 대부분의 공격 지표 1·2위 자리에 이름을 올려놨었다. 올해는 상황이 달라졌다. 그나마 올 시즌 2위 자리에서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2루타(94개)와 도루성공률(0.879)이다.
의미 없는 질주가 아닌 결정적이면서도 짜릿한 질주를 이야기하는 조재영 코치.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선수, 스스로의 믿음이 뛰는 야구의 바탕이다. 그리고 선수와 코치 사이의 믿음도 중요하다.
조재영 코치는 “팀 도루 성공률이 아무것도 안하고 선수들 한테 마음껏 뛰어라 했을 때 65%는 나온다고 생각한다. 70%가 넘어가는 경우는 코치가 얼마나 정보를 디테일하게 주느냐에 달렸다. 75%이상 올라갈 때는 선수와 코치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자유롭게 의견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된다. 해보면서 느꼈다”고 이야기했다.
뛰지 않으면 실패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실패 없이 성장은 없다. 누구나 100% 성공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등생들이 공부 잘하는 비결로 자주 언급하는 게 오답 노트다.
틀린 것을 공부하고 알아야 다음 시험에서 더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잘하는 것만 잘하다 보면 제자리걸음이다. 실패를 통해 부족한 것을 채우는 이가 앞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과감하게 도전하고 실패하자. 그리고 배우자.
<광주일보 김여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