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 나와 한 달 초급 100만원도 안 주던 회사를 9년 다닌 이유

치과용 3D 스캐너·밀링 머신 개발 기업 ‘디오에프연구소’
창업 기업은 한 번쯤 자금 부족에 시달리는 등 큰 시행착오를 겪는 ‘데스밸리(죽음의 계곡)’를 지납니다. 이 시기를 견디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기술력, 서비스를 갖고 있다고 해도 생존하기 어려운데요. 잘 알려지기만 하면 시장에게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는 중소기업이 죽음의 계곡에 빠지게 둘 순 없습니다. 이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도록 응원합니다.
디오에프연구소 박현수 대표. 치과용 스캐너와 밀링머신을 개발한다. /더비비드

치과 치료 중 입안에 커다란 분홍색 껌 덩어리를 물어본 적이 있다면, 그건 ‘알지네이트’라고 하는 인상재다. 구강에 들어가는 보철물이나 교정기를 만들기 전 치아의 본을 뜰 때 사용한다. 치과 치료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이 분홍색 덩어리를 앞으로 안 보게 될 수도 있다.​

스타트업 디오에프연구소는 치아 모형을 스캔하는 3D 구강 모델 스캐너와 그 데이터를 받아서 보철물을 제작하는 밀링머신을 동시 개발했다. 이어 구강에 직접 집어넣는 3D 구강스캐너까지 개발했다. 박현수(45) 대표를 만나 창업기를 들었다.​

◇잇몸 구석구석 카메라로 찍어 보철물 제작

디오에프연구소의 구강 3D 스캐너와 밀링머신들. /디오에프연구소

치과에선 인상재로 본을 떠 환자의 구강과 동일한 형상의 모델을 만든다. 이 모델을 바탕으로 금이나 세라믹으로 보철물을 만들고, 치료한 부분에 씌운다.​

디오에프연구소가 개발한 치과용 3차원 구강 스캐너를 이용하면 본을 뜨지 않고도 환자의 구강을 정밀하게 형상화할 수 있다. 디지털 파일로 저장된 구강 데이터를 이용하면, 보철물을 컴퓨터로 디자인할 수 있다. 디자인한 보철물은 밀링머신에 바로 전송돼 실물 보철물로 가공된다.

(왼쪽부터)보철물을 스캐너에 넣어 환자의 구강 구조를 디지털 파일로 만드는 과정, 가공기로 치아 모형을 만드는 모습. /디오에프연구소

​이러한 과정을 ‘디지털 덴티스트리(Digital dentistry)’라고 한다. 치기공사가 모형을 직접 만지며 보철물을 만들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보철물 제작 과정을 디지털화하면 환자의 구강 구조를 데이터로 관리할 수 있어 정확도가 높고 효율적이다. 실물 모형을 치과에서 받아 치기공사에게 전달하는 과정이 생략돼, 기존 2주 이상 걸리던 보철물 제작과정이 하루로 단축된다는 장점도 있다.​

디오에프연구소는 연간 1200대 이상의 3D 구강 스캐너와 300대 이상의 밀링머신을 국내를 포함한 70개국에 판매하고 있다. 지난해 127억원의 매출을 올렸고, 올해는 170억원을 넘어설 전망이다. 2021년 서울시와 특허청이 주관하고 서울산업진흥원이 수행하는 글로벌 IP스타기업에 선정돼 해외 수출에 필요한 해외출원비용 및 지식재산권 관련 컨설팅을 받았다.

◇동기들 대기업갈 때 전 직원 9명 중소기업에 머문 이유

대학교 3학년 입사한 기업에서 9년 동안 3차원 스캐너 관련 업무를 했다. /박현수 대표 제공

박 대표는 고려대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다. 3학년이던 2003년 전공 교수가 운영하는 3차원 스캐너 개발 회사에 입사해 2012년까지 9년 동안 근무했다. “처음에는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일이었는데, 일이 재미있어 다른 기업으로 취업할 생각을 못 했습니다. 전공 수업에 ‘역설계’라는 과목이 있어요. 완성된 물건을 다시 도면으로 만드는 일이죠. 참 재밌었어요. 이 과정에 3D 스캔 기술이 꼭 필요한데, 회사에서 그 스캐너를 다루니 즐겁게 일했습니다.”​

100만원도 안 되는 월급에 매일같이 사무실 간이침대에서 자는 그를 보며 부모와 친구들은 늦게라도 대기업 면접을 보라고 아우성이었다. "하지만 저는 다른 회사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4학년 졸업과 동시에 생산팀장 자리가 주어졌는데, 회사에 인력이 부족해 개발팀, 영업팀도 동시에 이끌었어요. 저 혼자 3인분을 한 거죠.”​

입사 당시 전 직원이 9명이던 작은 회사는 2012년 그가 퇴사할 때 직원 50명, 매출 100억원 기업으로 성장했다. "내 회사라고 생각하고 다니다 보니 창업 역량이 자연스럽게 쌓였습니다. 이제는 창업할 때라고 생각이 들더군요."

퇴사 후 자본금 1000만원으로 디오에프연구소를 창업했다. 창업 아이템은 치과용 스캐너였다. “개발·생산·영업을 두루 경험했으니 업계에 아는 분이 많았습니다. 미국에서 스캐너 사업을 하던 지인이 여기선 치기공 산업도 디지털화되고 있다며, 구강 구조나 인상재 모형을 스캔하는 제품을 만들어 미국에서 팔아보자고 제안하셨어요.”

​◇제품 조기 개발, 렌털로 매출 안정

직원들과 제품에 대한 개발 회외를 하는 모습. /박현수 대표 제공

제품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고객을 먼저 영입한 격. 전공지식을 살려 하드웨어 개발은 박 대표가 직접하기로 하고, 소프트웨어 개발과 전자 회로 개발을 할 수 있는 지인 2명을 영입했다.​

처음엔 사무실이 없어 서울산업진흥원이 진행하는 ‘청년창업 1000’이라는 프로그램에 지원해 마포구청의 작은 사무실을 2년 동안 썼다. 그 공간에서 연매출 20억원을 만들었다. “운이 좋았어요. 치과 산업의 디지털 전환이 싹트던 시기에 진출했으니까요. 미국 시장에 처음 제품을 판매하기 시작해 한국, 일본, 독일 순으로 스캐너 제품을 판매했죠. 제가 직접 만든 제품을 돈 주고 사는 고객이 있다는 것에 엄청난 쾌감을 느꼈어요.”

디오에프연구소의 밀링머신, 스캐너 공장. /디오에프연구소

주문이 쌓여가는데 생산이 따라가지 못했다. 금형과 시제품을 무료로 제작해줄테니 생산을 전량 맡겨달라는 제조사가 나타났다. “초기 창업자에게  좋은 기회였습니다. 이전 직장에서 일감을 맡겼던 분인데, 악바리 근성으로 일하던 제 어린 시절 모습을 좋게 봐주셨나 봐요. 창업 이후 투자를 받은 적이 없는데요. 대신 좋은 비즈니스 파트너를 만난 게 큰 도움이 됐어요. 지금도 양산 부품을 이 회사가 제작하고 있죠.”

​사업이 순탄하기만 했던 건 아니다. “치과 산업에 스캔 기기들이 뒤늦게 진출한 이유를 알겠더라고요. 치과용 기기는 의사나 치위생사, 치기공사가 조작법을 배워서 사용하니 이용법이 간편해야 합니다. 기계가 알아서 치아 모형이나 구강 구조를 인식하고 완성도 있는 결과물을 내야 한다는 뜻입니다.”

경쟁제품과 달리 카메라를 회전시키는 방식의 스캐너. /디오에프연구소

사업 초기에 만든 제품에서 오류가 발생하면 직접 출장을 가서 고치고 리콜도 했다. 고질적으로 고장나는 부분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통해 내구성을 개선했다.

​소비자의 후기에서 새로운 사업 아이디어를 얻기도 했다. “5년 전쯤 일본 치과용 기기 전시회에서 만난 고객이 ‘기계 고장 한번 없이 잘 쓰고 있다’며 감사인사를 전하더군요. 무척 뿌듯했지만 동시에 걱정도 됐어요. 신규 제품이 계속 판매돼야 회사가 유지될 텐데 고장 없이 제품을 계속 사용하면 언젠가 회사가 어려움을 겪을 것 같았죠. 그때부터 렌탈 모델을 구상했습니다. 기계를 대여해주고 유지 보수를 무료로 하는 대신, 매달 비용을 받는 거죠. 렌탈 비즈니스를 시작한 이후 회사 수익구조가 안정화됐고, 치과는 초기 비용이 적게 드니 기기를 더욱 적극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했어요.”​

◇700만불 수출탑, 매출 20% 이상 R&D 투자

2017년 독일통일의 날 행사에서 우수 수출기업 대표로 발표하는 박 대표의 모습. /박현수 대표 제공

디오에프연구소는 매출의 절반을 수출로 벌어들이는 외화벌이 역군이다. 지난 5일 제59회 무역의 날에서 ‘700만불 수출의 탑’을 받았다. 3D 스캐너와 밀링머신, 소프트웨어까지 모두 개발하고 직접 판매하는 기업은 세계적으로 몇 안되고 국내에선 유일하다.

​빠른 성장의 비결엔 과감한 연구개발 지원이 있다. 매출이 발생한 이후로 매년 매출의 20% 이상을 연구개발비에 사용한다. “직원의 절반이 연구원이고, 한국·미국·독일·일본에 직영 판매망을 구축했습니다. 기술 영업을 위한 사내 치기공사가 10명이죠. 제품을 설치할 때 직접 기술 교육하러 가기도 하고, 소비자 피드백을 직접 수렴해오는 역할도 합니다. 치아 기공 산업에서 쓰이는 모든 제품을 디오에프연구소가 개발하고 생산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한 명의 소비자 의견도 놓칠 수 없죠.”

작은 규모라도 빠르게 수익 구조를 정립하라고 조언한 박 대표. /더비비드

많은 후배 창업가가 그에게 조언을 구한다. 그럴 때마다 회사의 최우선 순위는 ‘매출’과 ‘이익’이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매출을 만들어보라고 권합니다. 경제가 호황이든 불황이든 상관없이 회사는 계속 가야 하니까요. 호황기에 외부 투자를 유치해 사업을 진행하겠다는 건 ‘한 철 장사’에 불과해요.”​

/김영리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