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아파트가 부족하다” 다가온 ‘재건축 전성시대’[비즈니스 포커스]
여야가 모두 ‘주택 공급’을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주택 공급 문제는 올해 내내 불안하게 지속된 수도권 집값 상승세, 더 나아가 저출생의 원인으로도 지목되고 있다.
게다가 ‘얼죽신’(얼어 죽어도 신축 아파트가 좋다는 뜻의 신조어) 열풍에 실수요가 빈 땅이 없는 도심으로 집중되면서 재건축이 가장 유력한 주택공급 방안으로 떠올랐다. 이에 따라 정치권과 서울시는 앞다퉈 규제완화 방안을 내놓는 분위기다.
지난해부터 올해 들어서는 전에 없던 획기적인 조치가 연이어 나왔다. 아예 안전진단 통과 없이 재건축을 진행하거나 용도지역 내 법정 용적률 상한을 넘는 과밀 단지도 사업을 추진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이 국회의 문턱을 통과하고 있다. 부동산 규제 기조가 강했던 더불어민주당도 주택공급을 위한 완화에 대해서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어 정책이 지속될 전망도 밝은 편이다.
그러나 이 같은 흐름이 재건축 연한을 달성한 전국 모든 아파트에 호재가 되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개인이 보유한 아파트를 재건축하기 위한 핵심 요소는 결국 ‘사업성’이기 때문이다.
90년대 과밀 아파트도 재건축 대상
지난해 말 ‘노후계획도시 정비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노후계획도시 특별법)’ 국회 본회의 의결 이후 일명 ‘재건축 패스트트랙(노후 아파트단지 재건축 신속화)’ 법안까지 통과 절차를 밟아가며 1990년대 준공된 아파트 단지들까지 재건축을 추진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그간 국내 재건축 시장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 높이의 일명 ‘저층 재건축’ 중심에서 10층이 넘는 ‘중층 재건축’으로 급격히 넘어가는 추세였다. 반포주공, 개포주공 등 대표적인 저층 아파트는 재건축 사업 마무리에 접어들었다. 이제 중층 높이의 압구정, 여의도, 목동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여기에 최근 들어 1990년대 지어진 아파트까지 재건축 시장에 합류하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1기 신도시 아파트다. 1990년대 초에 입주를 시작한 경기도 성남시 분당신도시와 고양시 일산신도시 아파트가 재건축 연한인 30년을 넘겼다.
2년여 전까지만 해도 이처럼 30년 연한을 넘긴 아파트 상당수가 안전진단 허들을 넘지 못해 재건축 사업을 추진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재건축 안전진단을 통과하려면 구청이 실시하는 일명 ‘예비 안전진단’에서 E등급(불량)을 받거나 이보다 높은 D등급(미흡)을 받은 뒤 추가로 국토안전관리원 등의 ‘정밀 안전진단’을 거쳐야 했다. 2019년에는 이 정밀 안전진단에서 1988년 지어진 올림픽선수기자촌 아파트조차 고배를 마셨다.
그런데 2022년 12월 그동안 많은 재건축 희망 단지의 발목을 잡았던 구조안전성 비중이 50%에서 30%로 낮아졌다. 안전진단의 최종 결정권도 지자체로 넘어오게 됐다. 이때부터 재건축 안전진단의 부담이 상당 부분 해소됐다.
이제는 안전진단을 통과하지 않고도 재건축 사업을 진행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지난해 말 노후계획도시 특별법 제정으로 인해 조성 완료 후 20년 이상이 경과한 100만㎡ 이상 대규모 택지 내 아파트에 대해서는 안전진단을 면제받게 됐다. 초기에 법안을 계획할 당시 조성된 지 30년 이상이었던 적용 대상은 20년 이상으로 확대됐다.
내년부터는 이 같은 택지지구에 속하지 않은 1990년대 아파트 단지에 대해서도 재건축의 문이 열린다. 9월 26일에는 앞으로 재건축 안전진단 실시 시기를 기존 ‘재건축 사업 입안제안 전’에서 ‘사업시행계획 인가 전’까지로 미룬 ‘도시 및 주거환경 정비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의결됐다. 정비구역 지정, 건축심의 이후 절차인 사업시행계획 단계 전까지만 안전진단을 통과하면 된다는 것이다.
안전진단은 물론 재건축추진위원회, 조합 설립에 이르는 수년의 기간이 단축되며 ‘재건축 안전진단’이라는 명칭 역시 ‘재건축 진단’으로 바뀐다.
안전진단뿐 아니라 용적률 규제도 대폭 풀렸다. 비교적 빽빽하게 지어진 1990년대 아파트들은 재건축 사업성이 낮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기존 재건축 규제에 따르면 정해진 용도지역 내에 법정 용적률 상한(제3종일반주거지역은 300%)까지만 아파트를 신축할 수 있다. 용적률은 전체 아파트 부지 면적에서 건물 각층 면적(지하·발코니 면적 등 제외)을 합한 면적의 비율을 뜻한다. 비교적 요즘 지어진 아파트일수록 기존 용적률이 높아 세대 면적을 넓히거나 일반분양을 많이 할 수 없어 사업성이 떨어진다.
이에 노후계획도시 특별법 시행령은 대상 재건축 단지의 용적률을 법적 상한의 150%까지 높일 수 있는 등의 인센티브를 제공할 수 있도록 명시하고 있다.
서울에선 노후계획도시 특별법 적용 대상이 아닌 아파트도 규제완화 혜택을 보게 됐다. 9월 26일 확정고시된 ‘2030 서울특별시 도시·주거환경정비기본계획’에 따르면 과밀 단지나 250m 이내 역세권 단지에 대한 용도지역 상향이 가능하다.
특히 2004년 도입된 현행 용적률 기준을 초과해 지어진 일명 ‘과밀단지’도 재건축이 가능해졌다. 즉 이들 단지는 기존 용적률 규제하에선 아파트 세대 면적을 줄여 용적률 기준을 맞춰야 해서 재건축이 사실상 불가하던 곳들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지금의 현황용적률을 공공기여 없이 인정받고, 현황용적률의 4분의 1까지 추가 용적률을 적용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또 지가, 기존 가구수, 과밀 정도가 적용된 사업성보정계수를 통해 재건축 사업성이 낮은 곳은 허용용적률 인센티브를 받을 수도 있다. 이처럼 높은 용적률을 적용받는 대신 향후 추가 재건축이 사실상 불가하다는 점에서 장수명 주택 ‘우수 등급’ 인증 등을 받아야 한다.
야권도 합의…관건은 사업성
이 같은 정책의 배경에는 국민 생활 수준이 높아지면서 수요가 급증한 새 아파트의 품귀현상이 자리하고 있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2008년 전국 주택보급률은 이미 100%를 넘겼지만 이 중 주거 수요자들이 ‘살고 싶은 집’의 비중이 낮다는 것이다.
일자리와 각종 인프라가 집중된 서울은 2022년 기준 주택보급률이 93.7%로 전국 102.1% 대비 10%포인트 가까이 낮았다. 경기도는 98.6%를 기록했다. 아파트뿐 아니라 최근 인기가 급락한 다세대·연립 등 비(非)아파트까지 포함한 결과다. 한국부동산원 집계 결과 서울은 평균 아파트 연식 또한 22.9년으로 전국에서 가장 노후했다.
서울이나 서울 인근 새 아파트가 수요 대비 절대적으로 부족한 가운데 오랫동안 ‘집값을 자극하는 원흉’으로서 규제의 대상이었던 재건축이 주택공급 방안으로 떠오른 것이다.
정부는 도심 내 신규주택 공급을 위해 지난해 1·10대책의 일환으로 재건축 패스트트랙 방안을 발표했다. 권영세 국민의힘 의원이 대표발의한 이 법안은 다수를 차지한 야당과 합의를 통해 국회 국토위에서 의결될 수 있었다.
민주당까지 협조에 나서면서 재건축 패스트트랙의 본회의까지 통과 가능성도 높을 것으로 보인다. 국회 과반을 차지하고 있는 민주당은 ‘부동산 규제’ 기조가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최근 주택공급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공급 방안’에 대해서만큼은 협조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노후계획도시 특별법 역시 지난해 말 야당 의원 상당수가 동의하면서 국회를 통과한 법안이다.
이렇게 지난해부터 재건축 규제완화에 급격히 힘이 실리는 데는 정치권이 ‘표’를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올해 4월 총선에 이어 2026년 6월 3일에는 지방선거를 앞둔 영향도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여야를 막론하고 아파트 재건축은 ‘지역 민심’을 돌볼 수 있는 대표 공약이기 때문이다. 재건축 패스트트랙이 국회 본회의까지 통과할 경우 빠르면 내년 상반기부터 시행이 가능할 전망이다.
재건축 가능 대상이 급격히 늘면서 사업지도 우후죽순 생길 가능성이 높다. 서울시에 따르면 재건축 연한이 되는 서울 아파트 단지는 2025년 기준 544개, 2030년 기준 875개에 달한다. 노후계획도시 특별법 적용 대상 재건축·재개발 규모는 총 215만 가구로 집계된다.
그러나 관건은 사업성이다. 이 가운데 실질적으로 재건축 추진 여력이 있는 곳과 아닌 곳 사이에 ‘옥석 가리기’가 완벽히 진행될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각 소유주들이 공사비 인상 등으로 늘어난 추가분담금을 감당할 수 있는 곳이나 사업에 투입되는 비용만큼 아파트 신축에 따른 집값 상승폭이 높은 핵심 입지 아파트 단지만이 재건축 사업을 진행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한 부동산 전문가는 “그동안 재건축 아파트가 수요자나 건설사에게 주목 받았던 이유는 안전진단 통과가 어려운 만큼 희소성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어느 단지나 재건축이 가능해진다면 이 같은 희소성이 사라진다”고 분석했다.
이은형 대한건설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최근의 규제완화로 인해 재건축 시장 전체가 들썩이지는 않을 것”이라며 “소유주들에게 자금력이 있거나 최근 높아진 공사비로 인한 추가분담금보다 재건축 사업으로 인한 집값 상승폭이 높을 만한 입지의 단지들이 집중적으로 수혜를 보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취소지 나온 신통기획, 서울시 “갈등·지연 심하면 거른다”
오세훈 서울시장의 역점 사업이자 민간 재개발·재건축 사업의 대표 규제완화 방안으로 꼽혔던 신속통합기획(신통기획) 재개발에서 첫 취소지가 나왔다. 주민반대가 심하다는 이유에서다. 기부채납 문제로 압구정, 여의도 등 상징적인 서울 핵심지역 재건축 단지에서도 신속통합 반대 의견이 증가하고 있는 가운데 나온 강경책이다.
서울시는 사업이 지체될 가능성이 큰 구역은 신통기획에서 배제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신통기획의 취지인 ‘신속한 사업진행’이 불가하다는 판단에서다.
서울시는 올해 2월 ‘도시·주거환경정비기본계획’을 개정해 정비계획 수립 단계에서 토지 등 소유자 25% 이상 또는 토지면적의 2분의 1 이상이 반대하는 경우 입안 취소를 할 수 있다는 기준을 세웠다. 이번에 후보지 선정이 취소된 강북구 수유동 170-1일대와 서대문구 남가좌동 337-8일대 재개발 2곳은 반대의견이 30%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10월 1일에는 자문요청-자문결과통보-주민공람-신통기획 완료-심의-정비계획 고시까지 신통기획의 각 단계별 기한(1~3개월)을 지키지 못한 구역도 대상지에서 제외한다는 ‘단계별 처리기한제’가 발표됐다. ‘서울시 1호 신통기획’으로 유명한 여의도 시범아파트도 12월 30일까지 단지 내 ‘데이케어센터(노인돌봄시설)’ 건립을 반영해 정비계획 결정 고시를 신청하라는 공문을 받았다.
여의도 시범아파트는 신통기획으로 용적률 상향 및 최고 65층 혜택을 받는 한편, 데이케어센터를 공공기여해야 하는 문제로 주민 반대가 이어졌다. 그러나 결국 서울시 요구대로 계획서를 만들어 영등포구청에 제출했다.
서울시는 이처럼 재건축 단지들이 사업 기간 단축, 용적률·층수 상향 등 신통기획을 통해 규제완화 혜택 받은 반대급부로 공공기여를 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주민 기대보다 공공기여 규모가 크더라도 손해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여의도 부동산 관계자는 “오세훈 시장이 ‘한강 르네상스’를 추진하던 이전 임기 당시에도, 아파트 부지 25%를 기부채납하라고해서 반발하는 의견이 많았다”면서 “그때 이후로 사업이 지금까지 지연됐던 점이 이번 정비계획서 제출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다른 핵심지역 신통기획 재건축 후보지 중 취소 사례가 나올 수 있어, 서울시가 타협점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강남 최고부촌인 압구정3구역(압구정 구현대)는 강북까지 이어지는 한강 보행교 및 덮개 공원 기부채납 문제로 반대 의견이 커지고 있다. 이 같은 공공시설을 조성하는데 사업비 3000억원이 더 들기 때문이다. 해당 단지 조합원 일부는 신통기획에 따른 초고층 설계 및 용적률 상향을 반대하면서 ‘1대 1 재건축’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민보름 기자 brm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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