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미국엔 있고 한국엔 없다…생존형·권력형 ‘탄핵 남용’ 방지책
현 정부 출범 후 장관·검사·판사 등 13회 탄핵 시도, 한 직책 연속 3회 전무후무 사례도
최근 ‘탄핵소추권(이하 탄핵)’ 제도를 둘러싼 개선·보완 요구가 빗발치고 있다. 행정·사법부에 대한 입법부의 마지막 견제 수단이라는 취지가 무색할 정도로 무분별하게 남발하는 식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특히 국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될 경우 탄핵 대상은 곧장 직무가 정지된다는 점에서 행정공백에 따른 국민 피해가 무차별적으로 발생하고 있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현 정부 들어 국회 과반 이상의 의석을 보유한 야당 주도로 발의된 탄핵소추안은 무려 13건이나 된다.
“탄핵 추진할 때 사유·증거 명확하게 밝혀라” 상식을 법으로 규정해야 하는 부끄러운 현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인 박준태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달 26일 ‘국회 탄핵소추 권한의 남용 방지’를 골자로 한 국회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다. 개정안에는 탄핵소추안을 발의할 때 탄핵소추의 사유와 증거를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제시하도록 하고 탄핵소추의 권한을 행정권 및 사법권의 행사에 부당하게 관여할 목적으로 남용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담겼다. 탄핵 제도 본연의 취지는 지키면서 정치적 목적에 의해 악용되는 것을 막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실제로 현 정부 출범 후 여소야대(與小野大) 정국이 지속되면서 야당 주도의 고위 공직자 탄핵 시도가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다. 21대 국회는 물론 22대 국회에서도 과반 이상의 의석수를 차지한 야당은 장관, 장관급 공직자를 비롯해 현직 검사, 심지어 판사를 대상으로도 탄핵을 시도했다. 그 횟수는 무려 13번에 달한다. 특히 방통위원장 직책에 대해서는 이동관·김홍일 전 방통위원장과 이상인 방통위원장 직무대행에 이어 임명된 지 불과 하루 밖에 되지 않은 이진숙 현 방통위원장까지 무려 4번이나 탄핵을 시도하고 있다.
국회의원 의무와 관련된 내용이 담긴 헌법 제65조에 따르면 탄핵은 국회재적의원 3분의 1이상의 발의가 있어야 한다. 탄핵안 의결은 국회재적의원 과반수의 찬성을 필요로 한다. 단, 대통령에 대한 탄핵은 국회재적의원 과반수의 발의와 국회재적의원 3분의 2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한다. 또한 국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되면 피소추자는 탄핵심판이 있을 때까지 그 권한행사가 정지된다. 야당 단독으로 국가 중대사를 책임지는 자리에 오른 고위 공무원을 ‘식물’ 상태로 만들 수 있는 셈이다.
통상 탄핵 의결 이후 헌재 판결까지 최소 2개월에서 최장 8개월까지 걸린다. 만약 탄핵 대상이 주요 부처 장관 등이라면 이 기간 동안 해당 부처는 수장 공백 상태가 된다. 부작용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의 몫이다. 일례로 과거 이상민 행안부 장관 탄핵안 의결 이후 직무가 정지되는 동안 김포도시철도 과밀화 이슈가 불거졌지만 행안부는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행안부가 중심이 돼 김포시와 국토교통부, 서울시 등 관계기관 대비 관련 대책을 마련했어야 했지만 소극적인 대처에 그쳤기 때문이다.
탄핵안 가결 되도 최종 심판까진 직무정지 없는 미국, 반면 한국은 곧장 ‘식물 장관’ 신세
정치권과 시민사회단체 안팎에선 이번 박 의원의 탄핵 남용 방지 법안 발의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이 우세하다. 입법부가 사법부와 행정부를 견제할 수단인 탄핵 제도 자체는 존중받아 마땅하지만 헌법에서 명기한 ‘헌법 또는 법률위배’와 무관하게 정치적 목적에 의해 무분별하게 탄핵 시도가 이뤄지고 국민 피해까지 발생하는 것을 막을 최소한의 제재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미 해외 선진국에도 무분별한 탄핵 시도를 막기 위한 적절한 제재 장치가 존재한다는 점은 이러한 주장에 힘을 싣고 있다. 일례로 상원·하원의 양원제를 채택한 미국의 경우 탄핵안 처리 절차는 하원에서 진행하지만 탄핵 혐의에 대한 판단은 상원이 심판한다. 탄핵심판 주재는 연방대법원장이 맡는다. 하원을 장악한 정당이 무분별하게 탄핵을 시도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다. 더욱이 하원에서 탄핵안이 가결되더라도 피소추자의 권한 행사는 정지되지 않는다. 행정공백으로 인한 부작용을 최소화 하겠다는 취지다.
참의원(상원)·중의원(하원) 양원제인 일본은 탄핵 추진 자체를 참의원과 중의원이 동시에 하도록 하고 있다. 국민이나 최고재판소(대법원)의 청구를 받으면 중의원과 참의원 각 10명씩 총 20명으로 구성된 국회의 탄핵소추위원회가 입건하고 조사에 들어가 탄핵 소추 여부를 결정한다. 미국과 일본 모두 한 정당이 상·하원 의석을 독차지하지 않는 한 탄핵 자체가 불가능할 뿐 아니라 상대 정당에 역공의 빌미를 제공하는 계기가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탄핵 선택에 상당히 신중한 편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헌법 또는 법률을 위배했다는 법원 판단이 내려지기도 전에 단순히 ‘고발’ 단계에서도 탄핵이 추진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때 한 정당이 국회의석수 150석 이상만 차지하면 탄핵안 처리까지 거의 100%라고 봐도 무방하다. 심지어 탄핵안 표결 전에는 ‘관례’를 이유로 다수 정당의 독주를 막기 위한 최소한의 견제 장치인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도 허용하지 않고 있다. 양원제와 단원제의 차이를 감안해 우리나라 특성에 맞는 견제·제재 장치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일반 대중들의 사이에서도 국회 과반 의석만 차지하면 쉽게 탄핵을 추진할 수 있는 구조적 문제 해결이 시급하다는 반응이 나온다.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직장인 양승현 씨(43·남·가명)는 “요즘 야당에서 장관에 검사, 판사까지 전부 탄핵해 일을 못하게 하는데 그 공백을 누가 메우나”라며 “결국 공무원이 일을 못 하면 국민이 피해를 입는 것인데 지금까지 단 한 명도 탄핵되지 않은 것을 감안하면 탄핵이 정치 도구로 전락해 버렸다고 볼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정치평론가는 “미국이나 일본처럼 양원제는 아니지만 우리나라도 우리 실정에 맞는 무분별한 탄핵 견제 장치가 필요하다고 본다”며 “헌법에 명기된 대로 직무상의 과실, 그리고 법 위반 행위가 법원 등 제3자의 의해 객관적으로 명백하게 판명됐을 때 등의 조건을 철저히 지켰을 때만 탄핵 추진이 가능하고 만약 그렇지 못했을 땐 패널티를 부여하거나 최대한 빠르게 탄핵안을 기각시켜 탄핵 추진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방법 등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겠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