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이 일으킨 '꽃가루 위기', 우리의 '먹거리 위기' 되는 이유
우리에게 꼭 필요한 농작물 다수는 열매를 맺기 위해선 수분(꽃가루받이)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그러나 기후 변화로 점점 기온이 오르면서 화분(꽃가루)이 파괴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에 과학자들이 해결책을 찾아 나섰다.
작년 6월 미국 북서부 워싱턴주에서 5대째 농사를 짓는 아론 플란스버그는 기온이 심상치 않게 치솟고 있음을 느꼈다. 그의 유채꽃밭엔 그리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플란스버그는 비교적 날씨가 시원한 초여름에 유채꽃이 필 수 있도록 파종 시기를 재고 있었다. 그러나 작년 갓 유채꽃이 개화했을 무렵 기온이 무려 섭씨 42도까지 치솟았다.
플란스버그는 "6월에 이 지역에서 이렇게 기온이 치솟은 전례가 없다"고 말했다.
노란 유채 꽃봉오리는 더위에 시들었으며, 제대로 수분이 이뤄지지 않아 카놀라유를 추출하는 데 필요한 씨앗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작년 플란스버그의 카놀라유 생산량은 1에이커(약 4046㎡) 당 약 272~363kg에 그쳤다. 날씨가 좋았던 그 이전 해에는 1에이커당 최고 1225kg까지도 생산했다고 한다.
플란스버그의 흉작에는 재배 기간 계속됐던 더위나 가뭄 등 분명 여러 요인이 있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고온 현상이 꽃가루를 죽인다는 건 놀라울 정도로 분명해지고 있다고 경고한다.
충분히 물을 주더라도 기온이 올라가면 꽃가루가 손상될 수 있으며, 유채꽃을 비롯한 옥수수, 땅콩, 쌀 등의 다양한 작물의 수분이 방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많은 농부들은 기온이 본격적으로 오르기 전에 작물이 개화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기후 변화로 전 세계적으로 32도 이상을 기록하는 날이 잦아지고 며칠간 이어지는 폭염이 더욱 흔해지면서 이 타이밍을 맞추기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이렇듯 점점 더 더워지는 미래에 대비해 과학자들은 화분이 더위에 파괴되지 않는 방법을 찾고 있다.
내열성이 좋은 품종 개발을 위해 작물의 유전자를 연구하기도 하고, 오히려 겨울을 견뎌 더위가 닥치기 전에 꽃을 피울 수 있는 품종을 연구하기도 한다.
화분의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연구하며 심지어 미리 화분을 대규모로 채집해 저장한 뒤, 이후 날씨가 좋을 때 작물에 직접 수분할 방법을 연구하는 이들도 있다.
한편 꽃가루에 닥친 위기는 우리 먹거리에 닥친 위기와도 같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웨이크포레스트 대학의 글로리아 무데이 생화학 교수는 우리가 먹는 모든 씨앗, 곡물, 과일 등은 수분 과정의 직접적인 산물이라면서 "식물의 번식기 중 최고 기온은 주요 변수"라고 언급했다.
한편 꽃이 열매를 맺기 위해선 수분과 수정 과정을 거쳐야 한다. 우선 한 식물의 수술에서 화분이 날아가 다른 식물의 암술에 착지하게 된다. 이때 화분이 잘 붙을 수 있도록 암술의 표면은 끈적거린다. 수분된 화분은 화분관(꽃가루관)을 뻗어 내린다.
이렇게 암술머리에서 암술대를 거쳐 꽃 내부의 씨방까지 화분관이 뻗으면서 유전물질이 전달돼 밑씨와 결합하고, 화분과 수정한 밑씨는 씨를 맺게 된다.
화분관은 세포 하나로 이뤄져 있는데, 화분관의 생장은 식물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빠른 세포 성장이라는 게 마크 웨스트게이트 아이오와 주립 대학 농업경제학 명예교수의 설명이다.
"화분관은 시간당 1cm까지 자라는데, 이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라는 것이다.
웨스트게이트 교수에 따르면 이렇게 화분관이 생장하기 위해선 에너지가 필요한데, 기온이 32도 정도가 되면 많은 작물에서 화분의 물질대사를 촉진하는 단백질이 분해되기 시작한다고 한다.
사실 고온은 화분관의 생장뿐만 아니라 화분의 다른 발달 단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 결과 화분이 아예 형성되지 않거나, 터지거나, 화분관을 만들어내지 못하거나, 화분관을 만들어도 화분관이 터져버리게 된다.
물론 모든 품종이 고온에 약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연구진은 같은 기온에도 왜 어떤 품종은 죽고 어떤 품종은 살아남는지 이해하기 위해 분자적 메커니즘을 연구하고 있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토마토 품종은 고온에 수정이 잘되지 않는 것으로 악명이 높은데, 현재 미국에서만 작년 기준으로 토마토 재배 면적이 약 1109㎢에 이른다.
만약 날씨가 너무 더워지면 "화분이 모두 타버릴 것"이라는 게 랜들 패터슨 노스캐롤라이나주 토마토 재배자 협회장의 설명이다.
패터슨 회장은 낮 32도 이하, 밤 21도 이하로 가장 오랫동안 유지되는 기간에 개화 시기를 맞추기 위해 파종 시기를 재고 있다.
일 년에 2번 토마토 농사를 짓는다는 패터슨은 보통 3~5주 정도 날씨가 따라주는 기간이 있다고 했다. "이보다 더 더워져서, 즉 밤 기온이 21도를 넘어가는 날이 많아지면 이 기간이 줄어든다는" 뜻이라고 한다.
무데이 교수는 혹시 이 기간을 길게 유지할 수 있는 단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고 토마토 돌연변이의 화분을 연구해왔다.
그렇게 지난 2018년 무데이 교수의 연구진은 '플라보놀'로 알려진 항산화물질이 '활성 산소종(ROS)'이라고도 불리는 고 반응성 산소 함유 분자를 억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발표했다. 활성산소종(ROS)은 높은 열에 노출되면 그 농도가 파괴적인 수준으로 증가한다.
무데이 교수는 이제 여러 대학의 연구진과 함께 토마토 화분이 고온을 이겨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분자적 메커니즘과 유전자가 무엇인지 밝혀내는 데 집중하고 있다. 이들 연구진은 유전자 연구가 기온에 더 탄력적으로 버티는 새로운 토마토 품종 개발로 이어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다.
초기 연구에서 얻은 성과 덕에 무데이 교수는 플라보놀 함유량이 높은 토마토 품종을 개발할 수 있었다. 무데이 교수는 "이 새 품종은 고온 환경에 더 잘 견디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궁극적으로 무데이 교수는 플라보놀과 활성산소종(ROS) 등을 넘어 고온이 화분 파괴로 이어지는 과정에 관여하는 여러 요인을 밝히길 기대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잠재적으로 많은 해결책을 기대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토마토를 비롯한 여러 농작물 재배업자 또한 이미 내열성이 좋은 품종 개발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미국 워싱턴주 풀먼에 있는 '미 농무부 농업 연구소'의 식물 유전학자이자 두류 작물을 재배하는 레베카 맥기는 "미국의 중서부 지역에서 완두콩을 재배한다고 할 때 기온은 더 올라갈 것이고, 그렇다면 열에 더 잘 견디는 완두콩 품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두류(pulse) 작물'의 어원은 '걸쭉한 수프'를 뜻하는 라틴어 'puls'에서 유래했으며, 강낭콩, 완두콩, 렌틸콩, 병아리콩 등이 이에 포함된다.
두류 작물은 재배 시 물이 많이 필요하진 않지만, 기온이 너무 올라가면 꽃가루가 맺어지지 못한다는 게 토드 숄츠 '미국 강낭콩 및 렌틸콩 협회(USADPLC)' 연구 부원장의 설명이다.
작년 플란스버그의 유채꽃 농사를 망친 그 폭염은 두류 작물밭도 덮쳤다. 이에 렌틸콩과 완두콩 수확량은 평균 생산량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으며, 병아리콩 수확량은 이보다 상황이 더 심각해 60% 이상 감소했다.
맥기는 고온에 더 잘 견딜 수 있는 완두콩과 렌틸콩을 연구 중이다.
그는 이와 동시에 다소 직관에 반대되는 연구도 추진하고 있다. 바로 추위에 잘 견디는 품종의 개발이다.
미 북부지역 농부들은 보통 봄에 두류 작물을 심는다. 그러나 맥기는 가을에 파종하는 완두콩, 렌틸콩, 병아리콩을 연구한다. 씨앗이 겨울을 무사히 보내면 평소보다 앞선 초여름에 빨리 꽃을 피울 것이고, 이렇게 되면 폭염이 들이닥치기 전 수분할 시간을 벌 수 있다는 전략이다.
작년 맥기는 처음으로 가을에 파종하는 식용 완두콩 씨앗 3종을 종자 생산업자들에게 일부 공개했다. 보통 봄에 심는 완두콩에 비해 이들 품종은 대략 2주 정도 먼저 개화하며, 수확량도 2배나 더 많다고 한다.
물론 이들 품종이 폭염이 찾아오기 전 개화한다는 확실한 보장은 없지만,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맥기의 설명이다.
한편 미시간 주립대학의 제나 월터스는 온도가 과일 작물의 화분과 꽃가루 매개자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한다.
2018년 5월 마지막 주 '메모리얼 데이' 주말, 미시간주 남서부 지역은 기온이 35도를 맴돌았다. 이때 작고 하얀 블루베리꽃 주변엔 벌들이 윙윙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후 수확철이 찾아왔지만 블루베리는 평소보다 크기가 작거나 모양이 온전치 않았다. 1년에 평균 4만5359톤을 생산하던 미시간주의 그해 블루베리 생산량은 2만9937톤에 그쳤다.
곤충학과 생태학을 이중 전공했으며 현재는 박사과정 중인 월터스는 당시 정확히 무엇이 잘못됐는지 조사하고 있다.
우선 월터스는 블루베리 화분이 견딜 수 있는 온도의 한계를 정확히 밝혀내고자 했다. 이에 화분을 페트리 접시 위에 옮겨 담고 다양한 온도에 노출시킨 뒤 24시간 동안 관찰했다.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된 내용은 아니지만, 관찰 결과 35도 이상의 환경에서는 블루베리꽃에 화분관이 생장하지 못했다고 한다.
월터스는 또한 37.5도로 올려 4시간 동안 기다린 뒤 20시간 동안 25도로 유지하는 실험도 진행했다.
짧게 폭염이 덮친 상황을 가정한 해당 실험에서 "기본적으로 회복은 없었다"는 게 월터스의 설명이다.
"단지 4시간 열에 노출됐을 뿐인데도 (화분은) 영구적인 손상을 입었습니다."
현재 월터스는 각기 다른 온도로 설정된 생장실에서 실제 블루베리 덩굴을 키우며 이러한 실험 결과를 검증하고 있다.
월터스는 만약 연구 결과가 검증된다면, 기온이 35도가 되면 블루베리밭에 쿨링 시스템을 가동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또한 장단점을 따져봐야 한다.
우선 "특히 개화 시기에 많은 병원균이 수분을 통해 퍼진다"는 점을 지적했다. 또한 계속 쿨링 장치가 작동해 물을 뿌려대면 벌과 같은 수분 매개자가 작물을 찾아오지 않을 수 있다는 단점도 있다.
또한 월터스는 블루베리밭 주변 기온이 너무 올라가면 블루베리 수분 매개자의 숫자가 줄어들 수 있다고 설명했다.
월터스와 동료들은 열에 노출된 화분과 그렇지 않은 화분 간의 영양 성분을 분석 중이다. 단백질이나 탄수화물 등 벌의 건강에 중요할 수 있는 요소의 함량이 열에 따라 차이가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다.
올해 월터스는 1.8m x 3.7m 크기의 그물로 된 상자를 8개 준비해 각 상자에 블루베리 덩굴 20여 개와 '푸른 과수원 벌' 암컷 몇 마리를 함께 넣을 계획이다. '푸른 과수원 벌'은 블루베리 꽃의 수분을 돕는 여러 벌의 일종이다.
그리고 4~5주간 매일 4시간씩 상자 안에 들어가 벌들이 알을 낳고 꽃가루를 찾아 헤매는 과정을 지켜볼 계획이다. 꽃이 막 필 때 상자 4개는 고온에 노출시킨다.
월터스는 만약 고온으로 꽃가루가 파괴된다면 영양분이 부족해져 암컷 벌들이 생장하는 데 화분을 덜 필요로 하는 수컷 벌을 더 많이 낳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푸른 과수원 벌' 수벌은 블루베리 생장에 비교적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오직 암컷 벌만이 수분하고 알을 낳아 대를 이어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월터스는 이렇게 부족한 꽃가루를 보충하기 위해 열에 더 강하고 벌에게 추가적인 영양분을 줄 수 있는 야생화를 몇 줄 심을 수도 있다고 밝혔다.
한편 기술에서 해결책을 찾는 이들도 있다.
웨스트게이트 교수는 아이오와에 본사가 있는 농업테크 기업인 '파워폴른'의 최고과학책임자이기도 하다. 파워폴른사는 40도 이상이면 수분이 되지 않는 옥수수 교배종의 수분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트랙터에 부착된 붓처럼 생긴 장치로 성숙한 꽃가루를 밭에서 대량으로 채집한 뒤, 이 꽃가루를 통제된 환경에서 잘 저장해둔다.
그 뒤 파워폴른사는 보통 채집 후 5일 이내에 수분하기 좋은 날씨인 날을 골라 수분 작업을 시작한다.
성공 가능성은 적어 보이지만, 해당 기술로 농부들은 폭염을 피해 수분할 수 있다.
현재 파워폴른사는 꽃가루 채집 후 5일 이상도 버틸 수 있는 방법과 옥수수가 아닌 다른 작물에도 이 기술을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 중이다.
한편 어떤 이들은 재배하는 농작물 종류를 완전히 바꾸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본다.
숄츠 부원장은 "열대기후에서 잘 자라는 두류 작물도 있다. 그래서 이러한 품종으로 바꿔 재배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숄츠 부원장은 누에콩이나 동부콩처럼 열에 잘 견디는 두류 작물도 있지만, 이러한 작물은 미 중서부 지역 농부들이 조달할 수 있는 물의 양보다 더 많은 수분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한편 플란스버그는 재배 작물을 바꾸고 싶지 않다고 했다. 플란스버그는 자신이 노력한다면 유채꽃 등 가족이 대대로 재배해온 기존 작물을 계속 기를 수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걱정이 없는 건 아니다. 플란스버그는 "기후가 대체로 변하고 있고, 계속 사람들의 먹거리를 조달하기 위해선 이 변화에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작물이 견딜 수 있는 열에 한계가 있다는 뜻이니까요."
*이 기사는 비영리 농업 및 환경 조사 기관인 '식품 및 환경 리포팅 네트워크(FERN)'와의 협업으로 작성된 것으로, 'Yale e360'에서 게시한 기사를 허가받아 재게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