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에 잘 어울리는 필름 현상소, 망우삼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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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보정하다 보면 ‘취미 사진가’와 ‘프로 사진가’의 차이가 극명하게 보이는 듯하다. 장비의 차이, 좁히기 어렵다. 촬영하는 순간의 감각, 빛을 이용하는 기술, 멋진 보정술의 영역까지 넘보자면, 얼른 욕심을 버리는 게 슬기로운 취미 생활을 위한 지름길이다.
그래도 보정에 쓸 시간을 줄이는 방법은 있다. 필름 카메라를 들고 나가는 거다. 필름에 알아서 맺히는 이미지의 느낌에는 사진 앱의 필터 효과나 템플릿으로 전부 재현할 수는 없는, 종이 한 장 같은 차이가 있다.
을지로 현상소 ‘망우삼림’. 필름 카메라를 쓰는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현상소가 몇 군데 있는데, 망우삼림도 그중 하나다. 벚꽃 철이라든가 휴가철이 되면 사진작가이기도 한 사장님이 며칠씩 밤샘 작업을 하고 눈물의 피드를 올릴 만큼 작업 의뢰가 쏟아진다고 한다.
사진관에서 필름 스캔을 할 때 사용하는 스캐너는 후지필름과 노리츠, 대체로 두 종류인데, 이곳은 두 장비 모두 갖추고 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고, 스캔하는 해상도 옵션도 물론 다양하다. 일단 현상소 내부 분위기가 필름카메라 사용자들 특유의 감성을 후려친다. 대만 혹은 홍콩의 80년대랄까, 시간의 흐름에서 불룩 튀어나와 있는 작은 정류소 같다. 사장님이 수집가의 면모도 있는 게 분명하다.
커피는 팔지 않지만, 작은 거실에 테이블들이 놓여 있다. 필름을 맡긴 사람들은 그곳에 앉아 잠시 재정비의 시간을 가진다. (혹은 남은 몇 컷을 여기서 소진하고 필름을 맡긴다.) 인화한 사진을 찾으러 온 사람들도 같은 곳에 앉아 사진을 훑어보고, 즐거워하고, 개중 마음에 드는 건 크게 재인화를 해달라고 요청한다. 사실 그러는 분을 실제로 본 적은 없는데, 이곳은 그런 훈훈한 상상을 하게 만든다.
연료용 가스는 원래 무향인데 누출을 대비해 자연계에 존재하지 않는 향을 만들어 입힌다고 한다. 필름 현상액 냄새에도 그런 화학적인 면이 있다. 다행히 가스 냄새보다는 훨씬 나은 달착지근한 향이고, 망우삼림에 들어설 때 맡는 그 냄새가 적막한 우주를 떠돌다가 모선에 돌아온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나 역시 괜스레 자리에 앉아 렌즈도 닦고 짐도 정리하고 이곳저곳 사진을 찍으러 다니느라 축낸 체력도 되찾는다.
요즘 필름 가격은 그야말로 금값이다. 안 그래도 꾸준한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었는데 코로나19 이후 필름 생산이 더 줄어들어 불과 3~4년 전보다도 4~5배는 비싸졌다. 그럼에도 필름을 더 자주 맡기는 이유는 하나다. 필름으로 찍는 사진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고급 필름이 아니면 선명도가 떨어지긴 하지만, 그 특유의 색감이 좋아 필름 사진을 계속 찍게 된다. 여러 장 모아서 붙여 두면 못 찍은 사진도 잘 찍은 것처럼 보인다. 금값을 치르며 필름이라는 매체가 견인하는 힘에 얹혀 가려는 거다.
망우삼림의 가파른 계단을 내려오고, 새로 산 흑백 필름을 장전한 사진기를 꺼낸다. 을지로 아무 골목 속으로 들어선다. 인쇄용지를 나르는 지게차, 인쇄소에서 나온 폐지를 잔뜩 실은 리어카, 탈탈거리며 질주 아닌 질주를 하는 골목 산업의 필수 운송수단 삼발이를 찍는다.
어느덧 충무로에 가까워지면, 필름 맡기는 날의 의식처럼 ‘사랑방 칼국수’로 들어선다. 8천 원짜리 반 마리 백숙을 시켜 닭을 꼼꼼하게 발라먹고, 국물에 밥을 말고서 따로 나온 파 접시를 쏟아붓는다. 금값이 된 필름 가격과는 정반대의 이유로 새삼, 이 한 끼의 가격이 믿기질 않는다.
식당을 나와 기록 삼아 사진을 찍으려는데, 간판 위에 86년도 영화 「고래사냥2」 포스터가 그려져 있다. 영화의 캐치프레이즈는 “고래사냥2는 확 다릅니다”. 이 동네에 남은 식당, 출력소, 제본소, 삼발이, 사진 현상소의 존재는, 그게 당연했던 시대를 훌쩍 지나고 나자 정말 ‘확 다른 일’이 되어버렸다.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동네. 지난 시간을 눈앞에 되돌려 놓은 현상소. 나의 렌즈는 어느 시절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글·사진 신태진
브릭스 매거진의 에디터. 『진실한 한 끼』『꽃 파르페 물고기 그리고 당신』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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