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부터 여유롭게 일정잡기 좋은 전시회 5

안녕! 요즘 글만 쓰려고 하면 온몸이 뒤틀리는 객원 필자 전종현이야. 그래서 휴식을 취할까 했는데 역시 우리 에디터 H가 절묘한 타이밍으로 전시 추천 글을 써달라는 카톡을 보내왔더라고. 프리즈 서울도 끝나서 쓸 것도 없는디…아! 전시는 언제나 있다는 걸 깜박했어. 늘 ‘타발적’으로 글 쓰는 게 습관이 돼서 그런지 디에디트 독자를 위한 전시 추천은 생각도 안 하고 있던… 그래서 어떤 전시가 또 쫄리고 있나 찾아보려던 찰나! 에디터 H의 다급한 목소리가 카톡을 넘어 내 뇌를 뚫어버렸어. “이번에는 젭알!!! 여유롭게 볼 수 있는 리스트로!”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 전시 추천은 언제나 끝나기 전에 막차 타라고 외치느라 나도 급하고, 읽는 사람도 급했는데, 이번에는 편하게 갈 수 있는 넉넉한 전시를 골라야겠다는 현실 감각이 생겼어. 그래서 여유롭게 갈 수 있는 전시를 몇 개 간추려 봤지. 전적으로 내 관심사에 가깝지만, 개인적인 취향이 그리 별나진 않으니 아마 가면 땅을 치고 후회하진 않을 거야. 전시와 묶이는 긍정적인 연쇄 효과도 염두에 뒀어. 자, 그럼 떠나볼까?


[1]
《사물의 가정》
2023. 10. 13 ~ 2023. 12. 12

첫 시작은 가볍고 매력적으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 언제부터인가 자연스럽게 서울을 상징하는 랜드마크가 됐어. 늘 사람들로 복작복작거리고. 근데 DDP에 ‘비더비(B the B)’라는 공간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나 몰라? 처음 들어도 이해해. 나도 몇 달 전까지는 까맣게 몰랐어. 비더비는 서울시와 서울시 산하의 중소기업지원기관인 서울경제진흥원(SBA)이 운영하는 복합문화공간이야. 정확히 말하면 뷰티, 패션 관련 라운지라고 할 수 있지. ‘Beyond the Beauty, Be the Beautiful’의 약자로 화장품을 넘어 확장된 의미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공간이라는 뜻이래. 이렇게 풀 네임을 살펴보니 센스가 좀…(소곤소곤).

암튼 여기는 2022년 9월 개관한 이후 서울의 뷰티 관련 중소기업 브랜드를 접하고 뷰티 테크 기술을 체험하는 공간으로 활용 중이었는데, 올여름에 확 리뉴얼했어. 이제 서울 라이프스타일 브랜드와 문화예술을 결합한 다양한 상설 및 기획전이 열리는 콘셉트로 바꾸었나 봐. 말만 들어도 반갑…비더비에는 라운지가 총 3곳이 있는데, 그중 커뮤니케이션 라운지가 오늘의 주인공이야. 여기서는 서울의 로컬 브랜드와 아티스트와의 컬래버레이션을 통해서 새로운 관점으로 서울+라이프스타일을 조명하는 기획전을 열어. 7월에 스타트를 끊은 개관전이 바로 《서울의 멋: 반짝이는 좌대와 사물의 조각들》이었어.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진 권오상 작가가 서울의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10곳에서 영감받아 총 10개의 작업을 선보였는데, 브랜드와 서울에 대한 이미지를 특유의 사진 조각 형태로 해석해서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보였어. 나도 이 전시 때문에 비더비라는 공간을 처음으로 알게 됐지.

전시가 끝나고 ‘음, 그런가보다’ 싶었는데, 두 번째 전시가 10월 13일부터 바로 열린 거야. 이번 주인공은 무려 길종상가! ‘오, 여기 뭐지? 제대로 하려는 건가’ 생각이 들더라고. 길종상가를 운영하는 박길종 님은 내가 무척 좋아하는 창작자야. 10여 년 전부터 디자인과 예술의 경계를 오가면서 실제 쓸 수 있는 맞춤형 물건을 아주 재치 있게 만드는 모습에 반했는데, 올해 열린 개인전 《여름 그늘, 휴거》를 통해 완전 광팬이 됐어. 작품 수도 그리 많지 않았지만, 내 취향을 명치부터 가격해서 보는 내내 실실거렸다니까! 이런 길종상가가 비더비에 나타나서 협업의 결과물을 전시한다니 마음이 설레지 않겠어?

전시 제목인 ‘사물의 가정(Hypothetical Home)’은 중의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어. ‘사물로 이루어진 집(home)’이라는 뜻과, ‘사물에 대한 가설(hypothetical)적인 결과’라는 뜻이 묘하게 혼재됐지. 브랜드 제품을 재료 삼아 이리저리 결합하고 맞물려 새로 탄생한 사물은 전과는 전혀 다른 가상의 역할을 맡게 되는데, 이런 가구 10개가 빨강, 파랑, 초록 커튼으로 장식한 방 세 곳에 들어가서 공간을 형성하는 거야. 그게 곧 집(家庭)이자, 가정(假定)이자, 전시인 셈이야.

길종상가의 단호하고 매력적인 컬러 배리에이션이 돋보이는 사물은 비누와 브러시로 장식한 테이블, 사이사이 화장품을 끼워 넣은 선반, 물건과 닮은 꼴인 수납장, 제 위치와 방향에서 벗어난 조명 등으로 구성되는데, 연극적 분위기로 조성한 방 이곳저곳에 엉뚱하게 자리하며 별난 역할을 수행해. 도르르 구르고, 삐그덕 열리고, 빙그르르 도는 등 예측하지 못하게 움직이면서 장난스럽고 유쾌한 느낌을 풍기며, 실용성과 아름다움에 기반을 둔 사물의 테두리를 넘어 취향과 상상, 경험, 기억을 상기하는 존재가 가설적인 세계에 대한 실마리를 보여준다고 해. (이상 보도 자료를 잘 정리해 봤어ㅋㅋ)

행사 전시가 많은 DDP니까 이 전시 보러 갔다가 다른 걸 볼 수도 있고, 다른 일로 들렀다가 이 전시를 볼 수도 있고, 비더비에 다른 라운지도 있으니 함께 둘러봐도 되고, 여러모로 연쇄 경험에 적절해 보여. 아예 전시 트립으로 삼고 싶다면 《럭스:시적 해상도》 관람을 추천해.

  • 12시~20시 (월요일 휴관)
  • 서울 중구 을지로 281 동대문디자인플라자 DDP 마켓 내 비더비 커뮤니케이션 라운지
  • 무료 관람

[2]
《올해의 작가상 2023》
2023. 10. 20 ~ 2024. 03. 31

왔네, 왔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선정하는 ‘올해의 작가상’ 시즌이 이미 왔어요. 지난 2012년 출범 이래 한국을 대표하는 중견 작가를 차곡차곡 수상자로 선정하던 올해의 작가상. 매년 누가 후보군으로 선정되는지 미술계가 초미의 관심을 가지는데, 올해부터 제도를 대폭 개선했다는 소식. 제일 괄목할 만한 변화는 전시 구성과 작가군 선정이야. 매년 4명씩 뽑는 후보들은 늘 신작 위주로 전시를 구성해서 프로필을 찾아보지 않으면 원래 어떤 작업을 하던 작가인지 감이 잘 안 왔거든. 올해부터는 작가의 옛날 작업과 새로운 작업을 함께 펼쳐놓아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데 신경 썼다고 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공간을 큼직큼직하게 쓰는 걸로 유명한 전시니까 작가 구작까지 합쳐져서 앞으로 후보자의 미니 개인전처럼 기능하지 않을까 해.

그리고 한국인 작가에서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한국계 작가로 후보군을 확대했어. 이제 대한민국 국적이 아니더라도, 한국 핏줄을 타고나면 후보군에 들 수 있어. 신작 제작 지원비도 기존 4,000만원에서 5,000만원으로 늘어났고, 최종 수상자를 선정하는 2차 심사에는 미술계 전문가와 일반 대중이 참여하는 심사위원-작가 공개 워크숍을 포함한다고 해. 공개 워크숍은 나중에 인터넷으로 신청받는 형식이고. 올해의 작가상 최종 수상자는 내년 2월에 발표하니까 제도 개선이 어떤 변수를 만들어 낼지 궁금할 따름이야.

올해 뽑힌 작가들은 권병준, 갈라 포라스-김, 이강승, 전소정 이렇게 네 사람이야. 이름을 보면 느낌이 오겠지만 갈라 포라스-김 작가가 이번에 합류한 한국계 작가지.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태어났대!) 미술관 측에서는 ‘인간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는 지점에서 네 사람이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 갈라 포라스 김과 전소정 작가는 거시적인 시선으로 인간을 바라보고, 권병준, 이강승 작가는 미시적인 개인의 이야기로부터 인간에 대한 질문을 시작하는데, 특히 과학기술이 발전한 후기 산업사회로 접어들면서 나타난 포스트 휴머니즘의 주제를 공유한다고! 문명의 역사, 인간과 자연의 관계, 제도의 뿌리와 작동 방식, 공동체의 정체성과 가능성에 대한 질문 등이 대표적이야. 작가별로 2전시실, 3전시실, 4전시실에 일정한 공간을 차지하고 여러 작업을 배치했는데 가장 중앙에 있는 게 신작이래.

<세월이 남긴 고색의 무게>

갈라 포라스-김 작가는 문화유산과 유물들이 박물관의 현대적 분류법에 따라 본래 의미가 잊히거나 재해석되는 지점에 의문을 던지며 그 간극을 좁히려고 노력해. 이번 신작인 〈세월이 남긴 고색의 무게〉는 고창 지역 고인돌을 소재로 삼았는데, 고인돌을 둘러싼 망자와 현재의 시각, 그리고 시간을 초월한 자연을 다루고 있어.

<싱코피>

전소정 작가는 영상, 사운드, 조각, 출판 등 다양한 매체를 바탕으로 현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환기하거나 물리적 경계의 전환이 일상 감각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중점적으로 파고들어. 이번 신작인 〈싱코피〉에서는 우리 일상 공간을 채우는 물체가 그곳에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기이한 상황을 청각과 촉각을 중심으로 표현해.

<라자로>

이강승 작가는 성소수자의 역사가 미술사와 교차하는 지점에 관심을 두고 배제된 타인의 서사를 미시적으로 발굴해 새롭게 드러내는 작업을 선보여. 신작 〈라자로(정다은, 네이슨 머큐리 킴과의 협업)〉은 셔츠의 등판이 연결된 셔츠 두 장을 입은 두 명의 무용수가 춤을 추는 영상인데, 싱가포르 출신 무용수와 브라질 미술가의 옷 설치 작업과 엮이면서 퀴어 역사의 연결을 상징한대.

권병준 작가는 사운드 하드웨어 연구자로 입체 음향을 적용한 소리 기록과 공간에서의 재현에 초점을 두고 음악, 연기, 미술을 아우르는 뉴미디어 퍼포먼스 작업을 하고 있어. 이번 전시에서는 기존에 진행한 퍼포먼스를 로봇에 대신 맡기면서 공동체 개념이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어떻게 확장할 수 있는지 탐구할 예정이야.

근데, 아리송하고 읽기만 해도 졸리는 설명을 있는 그대로 믿는 건 아니겠지? (후후후) 실제 보지 않고 보도자료를 정리하려니까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 그러니 이렇게 텍스트로만 접하지 말고 미술관에 얼른 가서 멍하니 작업을 쳐다보며 여러 가지 생각에 잠긴 채 현장 이곳저곳을 확인하자. 그게 훨씬 생산적일 거야!

  • 10시~18시(월, 화, 목, 금, 일요일), 10시~21시(수, 토요일)
  • 서울시 종로구 삼청로 30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지하 1층 2, 3, 4전시실
  • 입장료 2,000원

[3]
《오버톤》
2023. 11. 08 – 2024. 01. 07

이것은 지나가는 깍두기 정보입니다. 삼청동에 위치한 바라캇 컨템포러리에서 타이밍을 기가 막히게 맞춰서 올해의 작가상 후보인 전소정 작가의 개인전을 연다고 해. 글 쓰는 시점에서는 오픈 정보밖에 몰라. 이번 전시는 소리에 대한 작가의 천착이 더욱 깊게 발휘됐는데, 올해의 작가상 작품과도 굉장히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는 사실! 갤러리 측 자료에 따르면 “바라캇 컨템포러리 전시를 위해 처음으로 개발한 AR 앱 ‘싱코피’ 와 세 채널 신작 영상 작품 〈오버톤 Overtone〉(2023), 조각 작품 〈에피필름I Epiphyllum I〉 (2023), 〈에피필름III Epiphyllum III〉을 통해 시간과 장소, 현실과 가상 공간을 초월하며 조각과 영상, 디지털 데이터 사이의 유기적인 관계망을 만들어 내는 흥미로운 관점을 제안할 예정”이라고 하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전시를 보고 전소정 작가에 대해 궁금증이 생긴다면 찰떡같은 기회 같아. 바로 옆이니까 들러보길 바라!

  • 10시~18시 (월요일 휴관)
  • 서울시 종로구 삼청로 58-4 바라캇 컨템포러리
  • 무료

[4]
《국보》
2023. 10.31 ~ 2024. 03. 31

이번에는 깍두기로 치부하기엔 내용이 좀 있어서 단독으로 소개하도록 할게. 전소정 작가와 함께 올해의 작가상 후보에 오른 갈라 포라스-김 작가가 리움미술관 고미술품 컬렉션을 선보이는 M1 2층에서 작지만, 색다른 전시를 열어. 전시 이름처럼 국보를 다루는 작업들의 연출이 흥미로워.

신작인 〈국보 530점〉은 남한의 국보와 북한의 국보 유적을 한데 모아 나란히 배치해서 그린 작품이야. 등재 순서대로 남북한 국보를 나열했는데, 남과 북으로 나눠지기 이전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가지고 있던 문화유산이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 둘로 나누어지고, 서로 다른 체계에서 분류 및 관리된 역사가 작품 속에서 결합하며 ‘국보란 무엇일까?’ 생각하게 만드는 대형 작품이야. 특히 리움미술관이 소장 중인 국보 10점과 함께 나란히 전시하며 이곳에서 유물을 어떤 방식으로 보존하는지 간접적으로 보여줘. 이런 디스플레이는 리움미술관밖에 할 수 없기에(일단 컬렉션이 없잖아!) 존재감이 극대화되는 느낌이야.

〈일제 강점기에 해외로 반출된 한국 유물 37점〉은 말 그대로 국내에서 반출되어 해외 여러 곳에 소장 중인 우리나라 유물을 한데 모아 놓은 그림이야. 이 작품은 리움미술관 고미술품 컬렉션의 근간을 이룬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가 일본에서 들여온 고려 불화 〈아미타여래삼존도〉와 나란히 배치되어 문화유산 반출 문제와 더불어 문화유산이 인류 공동 유산인지, 민족 고유 유산인지 생각하게 만들어.

〈청자 동채 표형 연화문 주자의 연출된 그림자〉는 리움미술관의 대표적인 국보 컬렉션 중 하나인 〈청자 동채 표형 연화문 주자〉의 디스플레이 방식이 만들어 내는 그림자를 모티브 삼아 작업했어. 어두운 분위기 속 좌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해당 작업을 보면 작품 연출 방식이 관람객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직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어. 리움미술관의 고미술 컬렉션과 갈라 포라스-김 작가의 작업을 유기적으로 연출한 큐레이팅이 돋보이는 전시야. 참고로 전시 트립을 하고 싶다면, 리움미술관에서 열리는 김범 개인전 《바위가 되는 법》과 강서경 개인전 《버들 북 꾀고리》를 놓치지 말길!

  • 10시~18시 (월요일 휴관)
  • 서울시 용산구 이태원로55길 60-16 리움미술관 M1 2층
  • 입장료 무료

[5]
《가을 Herbst》
2023. 09. 08 ~ 2024. 01. 31

짠. 이제 마지막 전시야. 오래 기다렸지? 대전에 있는 신생 복합문화공간 헤레디움에서 지금 독일 신표현주의 거장 안젤름 키퍼의 작품 17점을 선보이는 전시를 열고 있어. 사실 이 전시를 소개해도 괜찮은지 많이 고민했는데 전시 작품이 2022년 서울에서 열렸던 다른 전시와 상당히 많이 겹치거든. 안젤름 키퍼의 전속 갤러리인 타데우스 로팍에서 서울 지점을 통해 2022년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이라는 제목의 개인전을 열었는데, 여기에 선보였던 작품 중 상당수가 헤레디움 전시에 다시 걸려 있는 상황이야. 1년 전에 노출한 작품을 지금 다시 전시한다고 소개하는 게 괜찮은지 자기 검열에 들어갔는데 결론적으로는 문제없을 것 같아. 왜냐하면 타데우스 로팍에서 열린 전시를 놓친 사람이 분명히 있을 테고, 작업이 무척 훌륭하기 때문이야. 물론 무료였던 갤러리 전시에 비해 헤레디움 전시는 입장료가 꽤 되기 때문에 금전적인 계산을 하면 배가 조금 아파진다는 점은 고려해야겠지!

헤레디움은 라틴어로 ‘물려받은 유산’이라는 뜻이래. 일제 강점기 시절 우리나라 경제를 수탈하던 동양척식주식회사 대전지점이 건물의 전신이야.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전국 요지에 총 9개가 있었는데, 해방 후 하나둘 사라지고 지금은 대전, 부산, 목포 등 세 곳에만 남아있어. 이중 대전 건물은 체신청 등으로 쓰이다가 민간에게 매각되어 상점들이 들어선 상태에서 국가등록문화제 98호로 지정됐지. 이런 건물을 대전에 기반을 둔 도시가스 공급업체인 씨엔시티에너지가 사들여서 복원하고 복합문화공간으로 재개관한 게 바로 헤레디움이야.

개관 기념 전시의 주인공, 안젤름 키퍼는 생존 독일 예술가 중 가장 뛰어난 거장 중 한 명이야. 1945년생인 키퍼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탄이 떨어져 박살 난 집에서 태어났대. 탄생과 동시에 폐허를 경험한 거나 마찬가지라 작가로 활동할 때부터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구 문명을 꾸준히 그렸어. 작품에 있는 존재들은 무너지거나 망가진 상태로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경우가 많아. 이런 주제 의식이 예술과 문화, 삶과 죽음, 인간과 우주에 이르는 근원적인 방향으로 고도화되면서 시적인 서정성을 띤 그의 작품은 보는 사람을 울컥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어.

이번 전시에 나온 작품들에는 공통점이 존재해. 키퍼가 사랑하는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가을날」, 「가을」, 「가을의 마지막」에서 영감을 얻었대. 그는 릴케 시를 줄줄 외우는 ‘릴케 마니아’야. 유난히 볕이 좋았던 어느 가을날 런던 하이드파크를 걷던 중 가을 낙엽을 비추는 빛과 폭발적인 색감에 압도당한 나머지 얼른 호텔로 뛰어가서 카메라를 가지고 나와 그 장면을 사진으로 남기고, 가을을 소재로 한 릴케의 시에서 받은 영감을 버무려서 시리즈를 주르륵 작업했대. 그래서 작품을 잘 보면 「가을날」 마지막 연, 첫 번째 행의 구절인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라는 문장을 옮겨 적기도 했고, 반대로 릴케에게 보내는 편지 말을 적어두기도 했어.

가을을 주제로 변화와 덧없음, 부패와 쇠퇴를 노래하는 릴케의 시처럼 키퍼의 작품은 어스름한 나무의 윤곽, 가을빛으로 물든 나뭇잎, 시간이 흐르며 속절없이 떨어지는 낙엽, 서서히 회색빛을 머금는 겨울나무를 담고 있어. 하지만 그 표현 방식은 아주 황홀할 정도로 섬세하면서도 거칠고, 외로우면서도 반짝여. 왜냐하면 두꺼운 물감과 납, 금박을 활용해 나뭇잎 형상을 만들어서 캔버스 위에 입체적으로 붙였거든. 물감으로 그린 회화가 아니란 뜻이야. 특히 연금술에서 납과 금은 시작과 끝을 상징하는데, 이런 두 요소를 함께 놓는 것은 파괴와 탄생, 황폐함과 풍성함이 공존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 결국 폐허로 끝나지 않고 다시 새로운 시작이 피어나는 메시지를 담은 거지. 거대한 캔버스 앞에서 이런 그림을 마주하면 아름다움과 서글픔이 찬란하게 빛나며 사그라들다 왠지 코가 시큰거리며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들어. 정말 놀라울 정도로 멋진 작업이야. 하지만 전시 하나 보려고 대전에 간다는 건 엄청난 결심이 필요하잖아. 그러니 전시 트립을 넘어 리프레시 트립의 일부로 대전 곳곳의 흥미로운 곳도 구경하는 방향을 추천하는 바야! (근데 대전에 뭐를 보러 가면 좋을까? 너무 궁금하다!)

  • 11시~19시 (월, 화요일 휴관)
  • 대전광역시 동구 대전로 735 헤레디움
  • 입장료 1만 5,000원

아. 이번에도 어김없이 너무 길게 썼네. 그래도 마음은 편안하다. 기간에 쫄려서 아둥바둥하지 않고 마음 놓고 보러 갈 수 있는 전시 리스트니까, 생각날 때 천천히 소환해도 되잖아. 역시 여유로운 삶은 장수의 지름길이다! 다음 글은 크리스마스 때 갈만한 전시, 혹은 연말에 끝나니까 얼른 가야 할 전시 쪽으로 쓸 것 같은데, 만약 12월에 전시 글을 쓰면 그때도 반겨주길~! 끝까지 읽어줘서 고마워. 그럼,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