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년새 가입 폭증 7.5만명…법적지위 확보
경영에 토 달지 않는 ‘침묵 계약’시대 끝나
법 테두리 내 투쟁…전통·강성노조와 달라
성과급 액수보다 결정 방식·시스템 중시해
오래전부터 ‘신호’ 보냈지만 경영진은 방치
지난 23일 삼성전자 평택사업장 앞에서는 과거 삼성이라면 좀처럼 보기 어려운 장면이 펼쳐졌습니다. ‘초기업노조’가 주도한 투쟁결의대회에 무려 4만여 명이 모였습니다. 게다가 현장에는 이재용 회장과 주요 경영진의 얼굴 사진이 바닥에 놓였고, 참가자들이 그 위를 밟고 지나가는 퍼포먼스까지 벌어졌습니다. 삼성전자 핵심 사업장에서 이런 장면이 연출됐다는 사실 자체가 지금의 갈등이 어디까지 왔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장면을 단순한 과격 시위로만 봐서는 안 됩니다. 예전의 삼성전자 노조가 아닙니다. 2023~2024년 삼성전자 노사 갈등의 전면에는 한국노총 산하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 이른바 ‘전삼노’가 있었습니다. 실제로 전삼노 조합원 수는 2024년 5월 2만8000명 수준까지 늘었고, 같은 해 11월 임금협약 잠정합의안 투표 때 선거인 수는 3만436명이었다가 지금은 2만명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전삼노가 아닌 초기업노조가 주도하는 지금의 국면은 그때와 다릅니다.
현재 삼성전자 노동조합의 중심은 한국노총도 민주노총도 아닌 ‘독립 노조’인 삼성그룹 초기업노조 삼성전자지부입니다. 초기업노조는 2025년 9월 이전 6000명 수준이던 조합원이 노조 주장으로는 4월 현재 7만5000여 명까지 불어났고, 최근 고용노동부 확인 절차를 거쳐 과반수 노동조합으로서 법적인 ‘근로자 대표’ 지위까지 확보했습니다. 노조 설명대로라면 전체 조직률은 58%, 반도체를 담당하는 DS부문 조직률은 80%에 이릅니다. 삼성전자 노사 갈등은 2023~2024년 전삼노 중심의 교섭 국면을 지나 2025년 하반기 이후 초기업노조가 주도하는 전혀 다른 단계로 들어섰다고 봐야 합니다. 물론 초기업노조 가입이 폭증한 것은 SK하이닉스가 촉발한 성과급 갈등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삼성전자의 노사문화를 이해하려면 이른바 ‘삼성식 침묵 계약’부터 봐야 합니다. 이병철 창업주 시절부터 이어져 온 이 암묵적 계약의 내용은 단순했습니다. ‘노동조합이 없는 대신 높은 연봉과 복지를 준다. 대신 경영에는 토를 달지 않는다.’ 이 계약을 설계하고 관리해 온 조직은 옛 구조조정본부, 전략기획실, 미래전략실, 사업지원TF를 거쳐 지금의 사업지원실로 이어지는 삼성의 컨트롤타워였습니다. ‘위에서 결정하면 아래에서 실행한다, 보상 기준은 회사가 정하고 직원은 결과를 신뢰하면 된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EVA(경제적 부가가치) 기반의 OPI(초과이익성과급) 제도도 이런 철학의 산물입니다.
이재용 사진까지 밟는 삼성전자 노조원들
문제는 시대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삼성전자는 2001년 현재 OPI의 전신인 PS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당시 삼성전자의 영업이익은 2조3000억 원정도였습니다. 올해 예상 영업이익은 대체로 300조 원 수준으로 거론됩니다. 25년 사이 회사의 이익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졌습니다. 그러나 ‘연봉의 50%’라는 OPI 상한선은 그대로입니다. 회사가 수십조 원을 벌든, 수백조 원을 벌든, 직원 개인의 추가 보너스는 6개월치 월급에서 멈추는 구조입니다. MZ세대는 이 계약에 서명한 적이 없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납득할 수 있는 공식, 누구나 계산할 수 있는 기준, 예측 가능한 규칙입니다.
SK하이닉스와의 비교가 결정적입니다. 지난해 SK하이닉스 노사는 영업이익 10%를 성과급 재원으로 명문화하고 상한도 폐지했습니다. 재무제표만 보면 대략적인 성과급 규모를 계산할 수 있습니다. 올해 실적이 증권가 전망대로 200조 원 안팎에 이르면 내년 초 지급될 평균 성과급은 1인당 6억 원 수준에 이를 것으로 전망됩니다. 반면 삼성전자 메모리 직원은 기존 OPI 50% 상한에 막혀 있습니다. ‘SK하이닉스는 원칙이 있고, 우리 회사는 없다’는 인식이 MZ세대의 마음을 흔든 것입니다.
삼성전자 노조의 등장은 대한민국 노동운동사에서도 낯선 풍경입니다. 그동안 대기업 노조의 얼굴은 현대차였습니다. 조합원 4만2000명, 50대 비중이 높은 생산직 블루칼라, 민주노총·금속노조 체제, 생산라인 점거와 연대 파업이 그들의 얼굴입니다. 요구도 “정년을 연장하라”, “일자리를 지켜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삼성전자 노조는 다릅니다. 조합원 7만5000여 명의 상당수가 반도체 엔지니어입니다. 평균 근속 13년, 평균 연봉 1억5000만 원의 전형적인 MZ세대 화이트칼라 집단입니다. 민주노총이나 한국노총 산하가 아닌 독립 노조라는 점도 다릅니다.
더 결정적인 차이는 투쟁 방식입니다. 최승호 초기업노조 위원장은 총파업을 예고하면서도 위법한 쟁의행위는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제조·기술 인력은 기존 단체협약상 파업이 불가능한 ‘협정근로자’가 아니며, 법무법인 검토에 따라 정당한 파업을 하겠다는 입장도 내놨습니다. 노조 가입 여부가 담긴 이른바 ‘블랙리스트’ 유출 사건에 대해서는 일부 조합원의 연관 사실을 인정하고 “분명히 잘못됐다”고 했습니다. 이들이 외치는 것은 “일자리를 지켜달라”가 아니라 “내가 일한 만큼 계산해달라”입니다. 합법의 테두리를 고집하는 것도 스스로를 전통적 강성 노조와 구분 지으려는 의식적 선택으로 보입니다. MZ세대의 감각이 노조의 투쟁 방식까지 바꾼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을 단순히 ‘강성 노조’로 규정하는 것 자체가 낡은 프레임입니다.
대한민국 노동운동사의 낯선 풍경
삼성전자 고위 관계자들에 따르면 경영진은 이번 수정안을 내놓으며 노조가 수용할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고 합니다. 실제 제안은 과거 기준으로 보면 파격적이었습니다. 임금 인상률 6.2%, 전 직원 자사주 20주 지급, 주택자금 지원 5억 원, OPI 산정 기준을 ‘EVA 20%’와 ‘영업이익 10%’ 중 선택할 수 있게 하는 방안이 포함됐습니다. 메모리사업부에는 경쟁사 이상 보상을 보장하고, OPI 50% 상한 초과분은 특별 포상으로 지급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노조는 거부했습니다.
이유는 특별 포상의 ‘지급 방식’에 있습니다. 상당 부분이 현금이 아니라 매도 제한이 걸린 자사주였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액수가 아니라 ‘결정의 방식’입니다. 경영진이 내민 것은 본질적으로 ‘재량’입니다. 올해는 특별히 이만큼, 경쟁사 이상으로 주지만 내년에도 그럴지는 보장되지 않습니다. 올해는 특별 포상으로 넘어가고 제도 개선은 추후 논의하자는 취지였습니다. 노조가 “요구를 긍정 검토한다고 해서 교섭에 참여했는데 사기였다”고 반발한 대목입니다. 반면 노조는 OPI 상한 폐지, 영업이익 연동 명문화를 공식으로 묶자는 것입니다. MZ세대에게 1회성 파격은 ‘회사의 기분’에 불과합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차기 경영진도 따라야 할 시스템입니다.
삼성전자 전·현직 임원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이번 갈등의 신호는 2024~2025년 위기 국면에서 이미 뚜렷했습니다. HBM 개발에서 뒤처지고 실적이 흔들릴 때 사내 게시판에는 회사와 경영진을 비판하는 글이 쏟아졌습니다. 위기가 오면 직원들이 결집해 경영진과 한 몸이 되어 이겨내던 문화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한 전직 임원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회고합니다. 경영진도 세대 간 문화 충돌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방치했습니다.
노조는 왜 파격 보상안을 거부했나
경영진의 계산은 위기가 지나가고 호황이 오면 소음은 잦아들 것이라는 과거 경험에 기반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습니다. 호황이 왔는데 직원들은 오히려 “이익이 어떻게 나눠지는지 설명하라”며 목소리를 더 높였습니다. 위기 때 ‘실력 비판’으로 나왔던 요구가 호황 때 ‘분배 요구’로 형태만 바꿔 나타났을 뿐입니다. 지금의 갈등은 2년을 미뤄온 청구서입니다. 반년 남짓한 기간에 7만5000명 수준의 노조가 만들어진 것은 2026년 봄에 갑자기 터진 사건이 아니라 2년 이상 축적된 결과물입니다. AI 반도체 호황이 기름을 부었을 뿐입니다.
이 갈등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지적도 돌아봐야 합니다. “성과급이 커지면 설비투자가 줄어든다”, “400만 주주의 배당이 먼저다”, “반도체 골든타임을 놓친다”, “삼성이 글로벌 고객사의 신뢰를 잃는다” 같은 지적이 대표적입니다. 각각은 개별로 보면 타당한 말입니다. 삼성은 이런 식의 여론 조성을 통해 노조의 요구가 수그러들기를 바라는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이런 여론이 삼성전자 노조 파업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지적들을 관통하는 전제도 문제입니다. 직원을 ‘비용’으로, 노조의 요구를 ‘회사의 손실’로만 보는 시각입니다. 반도체는 특히 ‘사람 산업’입니다. 성과급 몇조 원을 아꼈다가 핵심 인재를 빼앗기면 그 손실이 훨씬 클 수 있습니다. ‘배당이 먼저’라는 논리도 인재 유출로 장기 경쟁력이 무너지면 영업이익 자체가 줄어 배당 여력도 사라집니다. 엔비디아, 구글, 메타 같은 글로벌 기술기업들이 직원 주식 보상에 큰돈을 쓰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TSMC 역시 SK하이닉스처럼 10% 이익의 성과급 배분을 정례화하며 높은 보상으로 인재를 붙잡습니다.
노조 압박 여론조성 이젠 효과없어
물론 노조의 요구가 모두 합당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영업이익 15%를 성과급 재원으로 고정하라는 요구는 반도체 업황의 극심한 사이클을 고려하면 과도한 측면이 있습니다. 파운드리·시스템LSI 직원들에 대한 내부 형평성 문제도 있습니다. 5월 21일부터 6월 7일까지 18일간 예고된 총파업이 HBM4 양산 확대와 HBM4E 샘플 출하를 앞둔 시점에 반도체 산업 전체를 흔들 수 있다는 우려도 가볍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감안해도 이번 갈등의 책임은 근본적으로 경영진에 있습니다. 2~3년 전부터 신호는 계속 왔지만 이재용 회장도, 사업지원실도, 삼성전자 경영진도 이를 방치했습니다. 지금의 갈등은 그 방치의 청구서이자 대가입니다.
반년 남짓한 기간에 ‘과반 노조’를 만들어낸 세대는 이미 삼성전자의 주력입니다. 이들이 은퇴할 때까지 삼성식 침묵 계약의 복원은 불가능합니다. 과거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성과급 상한의 단순 조정이 아닙니다. 경영 철학의 전환입니다. 이재용 회장이 진정으로 ‘뉴삼성’을 원한다면 사업지원실로 상징되는 관리 중심 문화에서 벗어나 7만5000여 명이 납득할 수 있는 ‘경영자의 언어’로 먼저 말해야 합니다. 삼성전자의 다음 10년은 HBM의 수율만이 아니라 이재용 회장과 박학규 사업지원실장, 전영현 부회장·노태문 사장이 그 언어를 얼마나 빨리 익히느냐에도 달려 있습니다.

박종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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