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탄생을 응원합니다 [사유와 자유의 시간]
평일 낮, 한 소녀가 서점을 방문했다.
‘띠링띠링’ 익숙한 적막이 감돌던 서점의 공기 속으로 도어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서 오세요!’하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지만 서점을 찾은 이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이 또한 익숙한 풍경이라 괘념치 않았다. 서점에는 책을 보러 온 것이지 나를 만나기 위해 온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가 편하게 책을 살펴볼 수 있도록 시선을 모니터 화면으로 빠르게 옮겼다. 하지만 그녀는 2분도 되지 않아 떠나버렸다. 같은 건물에 있는 다른 상가를 들렸다 ‘여기 뭐 하는 곳이지?’하는 호기심에 잠시 문을 열고 들어왔을 거라 생각했다.
허리도 펴고, 흐트러진 책도 정리할 겸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도어벨 소리가 다시 울렸다. 금방 서점을 떠났던 그녀가 다시 들어왔다. 나를 보자 “혹시 핸드폰 충전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하며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한 채 떨리는 목소리였다. 그녀의 말이 달갑진 않았다. 책을 산 손님도 아니었고, 서점을 찬찬히 둘러보는 애독자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돕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어떤 급한 연락을 받게 되어 부랴부랴 서점을 나갈 수밖에 없었고, 다시 책을 살펴보러 돌아왔더니 배터리 충전이 급히 필요한 상황일 것이라 생각했다. 이내 마음이 편해졌다. 나는 그녀가 눈치를 조금이나마 덜 볼 수 있도록 무선 충전기를 제공했다.
그녀는 휴대폰이 충전 되는 동안 서점을 다시 둘러보기 시작했다. 3분 정도 흘렀을까. 그녀는 책을 책을 한 권 고른 뒤 내게 다가왔다. 공짜로 휴대폰 충전을 부탁한 미안함 때문에 급히 책을 고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불편한 마음을 최대한 감춘 채 결제를 하기 위해 계산대로 향했다. 계산을 위해 건내 받은 책은 매력적인 진한 분홍색 표지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만, 속에 든 이야기가 훨씬 매력적인 은유 작가의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였다. 그제야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 있었다. 아직 젖살도 제대로 빠지지 않은 앳된 소녀의 얼굴이었다. 십 대가 평일 오후 시간에 서점을 찾아오는 경우는 흔치 않아 한 번 당황했고, 그 친구가 고른 책이 이 책이라는 사실에 또 한 번 당황했다.
책 제목이 저를 대변하는 것 같아요.
어색함을 깨고자 “아직 학교에 있을 시간 아니에요? 어떻게 왔어요? 고등학생?” 하며 말을 건네자 그녀는 수줍은 목소리로 “중학생이요. 학교 마치고 왔어요.”라며 아까보다 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순간 ‘중학생이 은유 작가님의 책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을까? 이 나이라면 삶의 현실과 진실 속에서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이야기 아니라, 세상의 밝은 면을 보여주는 이야기를 읽어야 하는 것 아닐까? 혹시라도 제목만 보고 잘 못 선택한 것이라면 괜찮은 청소년 소설을 추천해줄까?’ 하며 머릿속으로 책방지기 필터가 빠르게 작동했다.
크레타에서 책을 사는 모두에게 하는 질문을 건넸다. “이 책은 어떤 이유로 선택했어요?” 그녀는 이번에도 나의 얼굴이 아닌 시선을 바닥을 향한 채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책 제목이 지금의 저를 대변하는 것 같아서요.” 그녀의 대답에 순간 나도 말을 잇지 못했다. 중학생 입에서 나오게 만들면 안 되는 대답처럼 들렸다.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한 사회를 살아가는 어른으로서 미안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어떤 일이 있었기에 삶과 싸우는 중인지 궁금했다. 이야기를 여기서 멈추게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책의 저자 은유 작가는 이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으로서, 엄마로서, 아내로서, 딸로서 살아가며 끊임없이 ‘나’라는 존재에 대한 물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고 해요. 이 책은 그런 질문이 생길 때마다 자기 자리를 찾고 지켜내기 위한 한 개인의 치열한 삶의 서사가 담겨있는 책입니다. 친구가 생각한 그런 내용과 맞는 책이었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어린 나이에 세상과 싸워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다니, 어른으로서 괜히 제가 죄송한 마음이 드네요.”
그녀는 잠시 고개를 끄덕이더니 답변을 이어갔다. “저도 비슷한 것 같아요. 다양한 고민과 생각이 있는데 그걸 혼자서 끌어 안고만 있으려고 하니 힘들더라구요. 그래서 저도 이 책의 작가님처럼 이런 글을 쓰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골랐어요. 제가 지금 겪고 있는 일들을 글로 정리하고, 그 글을 통해 작은 도움을 받는 이가 생기면 좋겠어요.”
대화를 나누며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누구는 답답함을 느낄 수도 있을 아주 작고 느린 말투를 가진 아주 내성적인 아이였다. 지레짐작일 수도 있지만 이런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특히 어른에게 말하는 것은 처음인 것 같았다. 하지만 아주 천천히, 또박또박, 자기의 생각을 전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이야기를 조금 더 이어가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마침 바쁜 업무도 마무리되었고, 휴대폰 충전이 충분히 되려면 시간도 필요했으니 질문을 이어갔다.
나는 혹시 지금 본인의 상황을 글로 쓰고 있는지 물었고, 그녀는 조금씩 쓰고 있다 말했다. 어디에 쓰냐는 물음에는 노트에 쓰는 중이라 답했다. 블로그나 브런치, 인스타그램 등 온라인 공간에 글을 쓰는 중인지 묻자 아직은 혼자서 쓰는 중이라 말했다. 도대체 어떤 경험과 생각을 글로 쓰는 중인지 묻고 싶었지만, 그건 선을 넘는 질문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꾹 참았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건 ‘글’이 그녀에게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버팀목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참았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말을 더 보태고 말았다.
공개 된 공간에 글쓰기, 그것이 '작가의 탄생'
“그렇군요. 조금은 주제넘은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자기만 볼 수 있는 노트에 쓰는 글을 저는 이렇게 불러요. ‘일기’라고. 또 다른 말로는 ‘독백’이라고 하죠. 그건 글이 아니에요. 책을 파는 사람의 입장이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글’이라는 것은 내가 아닌 타인이 읽는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성립되는 것 같아요. 내가 쓴 글에 대한 다른 사람의 평가와 판단이 분명 두려울 수 있지만, 그 두려움의 울타리를 스스로 넘어서겠다는 결심을 하고 행동으로 옮긴 이들에게만 주어지는 영광 같은 거죠.”
그녀의 시선이 처음으로 땅이 아닌 내 눈을 향하기 시작했다. 조금 더 얘기해주길 바라는 그 눈빛을 마주하자 부여잡고 있던 이성의 끈을 놓치고 말았다. 결국, 이야기를 조금 더 이어가게 되었다.
“글을 쓰다 보면 알 수 없는 해방감을 느끼는 순간이 오는 것 같아요. 아마 친구도 그런 느낌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 같아요. 저도 학창시절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제 일기장이 있었거든요. 처음엔 그 기록이 저를 지켜주는 것 같았지만 나중엔 오히려 저를 좀먹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어요. 감정 쓰레기통처럼 되더라구요. 그래서 한동안 글쓰기를 멈췄어요.
그러다 20대가 되어 책을 읽게 되고 독서모임을 하게 되면서 감정이 아닌 생각을 글로 써야겠다는 계기가 있었어요. 그때부터 SNS에 글을 조금씩 쓰기 시작했어요. 처음엔 저의 부족하고 찌질하고 나약함을 보여주게 될까 봐 걱정했고, 쓸데없이 글을 써서 괜한 오해로 있던 친구도 떠나갈까 불안했어요.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친구가 공감, 위로, 응원해주는 것을 경험하면서 ‘진짜 내 생각을 얘기해도 괜찮구나.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며 얘기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하며 글을 통한 진짜 해방감을 느꼈던 것 같아요.
이름이 공개된 글쓰기가 두렵다면 필명을 써도 괜찮아요. 사실 이 책의 저자인 은유 작가님도 본명이 아닌 필명이거든요. 필명을 쓰더라도 공개된 공간에 글을 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 같아요. 온전한 내 생각과 경험이 타인을 헤치지 않는다는 것, 때로는 누군가에게 더욱 큰 힘과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공개된 공간에 글을 쓰는 것을 저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작가의 탄생’이라고.”
싸울 때마다 질문은 탄생한다.
더 얘기하면 꼰대가 되어버릴 것 같아 말하기를 멈췄다. 그녀에게 차를 한 잔 대접했고, 편히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배경 음악을 잔잔한 피아노 연주로 바꿨다. 그녀는 20분 남짓 책을 읽었고, 휴대폰 충전도 어느 정도 되었는지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서점을 떠났다.
그녀가 떠난 뒤 오래전 읽었던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를 다시 펼쳤다. 밑줄 치고, 책 끝을 접고, 별표까지 해두었던 문장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은유 작가는 책에서 이렇게 전한다.
“싸울 때마다 질문은 탄생했다. 집안일부터 세상일까지 나의 울컥은 생의 질문이 되었다. 끝도 없고 두서없는 물음의 연쇄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에 대한 질문으로 귀결되었다. 내가 구상하는 좋은 세상은 고통이 없는 세상이 아니라 고통이 고통을 알아보는 세상이다. 이는 아주 일상적으로는 끼니마다 밥 차리는 엄마의 고단함을 남편과 아들이 알아보는 것이고, 음식점이나 경비실에서 일하는 사람과 눈을 마주하는 것이다. (중략) 고통이 고통을 알아보고 존재가 존재를 닦달하지 않는 세상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 물음을 내려놓지 않는 한, 나는 계속 무언가와 싸우며 글을 쓰고 있을 것 같다.
”은유「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p. 12
그녀는 어떤 싸움을 하고 있는지, 그 싸움 속에서 자기만의 질문은 찾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내가 한 괜한 말 때문에 글을 쓰고 싶다는 의지가 다시 사라진 것은 아닐지 뒤늦은 후회가 밀려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가 이 책을 제대로 읽고 이해한다면 어딘가에서 매력적인 이름으로 공개된 공간에 자기 이야기를 시작했을 거라 믿는다. 새로운 작가의 탄생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싶다.
* 사유와 자유의 시간
골목에서 작은 서점을 운영하면서, 책과 사람이 만나 펼쳐지는 소소하지만 진솔하고, 일상적이지만 이상적인 이야기를 전하려 합니다.
* 글쓴이 - 강동훈
부산 전포동에서 '크레타'라는 작지만 단단한 서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책을 파는 사람이 아니라 책을 읽게 만드는 사람이 되려 노력하는 중입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책을 잘 파는 서점인이 꿈이자 목표입니다.
* 인스타그램 : www.instagram.com/bookspace.cre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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