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니피치] 최초의 ‘고졸 신화’를 작성한 문희수

문희수는 가을만 되면 물 만난 물고기가 됐다. 특히, 한국시리즈에서는 통산 4승 무패 1세이브를 올렸다. (사진=KIA 제공)

‘고졸 신화’

이제는 KBO리그에서 듣기 어려운 말이지만, 1990년대 중반까지 흔하게 언급되던 상투어였다. 왜냐하면, 지금이야 고교 졸업 후 프로에 직행하는 게 당연한 길이지만, 1990년대 중반까지는 고교 졸업 후 대학을 거쳐 프로에 가는 게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고교 유망주가 곧바로 프로에 가는 확률이 적은 만큼, KBO리그에서 고졸 선수가 성공하는 사례도 극히 드물었다. 그렇기에 ‘고졸 신화’라고까지 극찬한 것이다.

KBO리그에서 최초의 고졸 신화는 문희수 전 영선고 감독이다. 문희수 전 감독은 광주일고 시절 에이스로 활약하며 팀을 전국대회 3관왕(대통령배·봉황대기·황금사자기)으로 이끌었다. 당연히 대학 간의 스카우트 전쟁이 펼쳐졌다. 여러 명문대에서 감독이 직접 광주로 내려와 영입을 제안했지만 동국대가 최종 승자가 되는 듯했다. 그런데 문 전 감독은 1983년 10월 27일 전격적으로 해태(현 KIA)에 입단했다.

“학교 측에서 동국대에 가라고 했거든요. 좋아서 야구를 시작했고, 즐겁게 야구했는데, 정말 야구가 싫어졌어요. 김인식 감독님(당시 동국대 감독)이 싫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죠. 그냥 가고 싶은 곳이 있었던 겁니다. 가고 싶은 대학을 갈 수 없으니까, 조금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해태에 간 거죠.”

계약금 1천7백만 원(발표액은 1천3백만 원)에 연봉 1천2백만 원. 그해 고교 최고 투수가 받기에는 다소 적은 금액이었다. “입단 동기로 원광대를 나온 조도연 선배님이 있었잖아요. 대학선발로도 활약했는데, 그 선배님과의 형평성 문제도 있으니까, 그 이상을 줄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정상적으로 대학을 거쳐 갔으면 더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을 테지만, 그때는 제가 해태 입단을 원했으니까 어쩔 수 없었죠.”

1984년 프로에 진출한 고졸 3인방

이해, 문희수를 비롯해 고교 최고 타자로 손꼽히던 포철공고 정성룡은 삼성에, 미완의 대기로 주목받은 경남고 조용철은 롯데에 입단해, KBO리그에 우수한 고졸 3인방이 탄생했다. 다만 이들 3인이 KBO리그 최초의 고졸 선수는 아니다. 프로야구가 출범한 1982년 대전고를 졸업하고 OB(현 두산)에 입단한 내야수 박종호가 있었다.

“조용철은 중학 시절 전국 최고 투수였죠. 키만 해도 중학생이니까 대부분 170cm 안팎이었는데, (조)용철이는 180cm를 훌쩍 넘었으니까요. 경남고에 진학해서 1·2학년 때는 좀 했는데, 3학년 때는 전혀 존재감을 나타내지 못했어요. 프로에서도 안타까운 사고로 다쳐 일찌감치 유니폼을 벗었죠.

(정)성룡이는 제2의 장효조라고 불릴 정도로 타격이 정말 좋았죠. 포철공고와는 봉황대기 결승에서도 맞붙고, 대통령기 4강에서도 맞대결을 펼쳤죠. 2번 다 우리가 이겼죠. (정)성룡이가 저한테 안타를 하나 쳤을 겁니다. 그 대신에 중요한 순간에 삼진을 잡아냈고요. 참 웃기게도 이 상대 전적이 프로에서도 이어지더라고요. 제가 (정)성룡이한테는 엄청 강했어요.”

광주일고 3학년 때, 문희수 전 감독은 군산상고 조계현, 세광고 송진우, 충암고 김기범을 라이벌로 꼽았다. 이 3인을 꼭 이기겠다는 목표를 현실로 만들어냈다. (사진=머니피치)

처음으로 고교 정상급 선수 3명이 대학이 아닌 프로에 곧바로 진출한 만큼, 큰 화제를 모았지만 프로에서 제대로 활약한 이는 문희수 전 감독뿐이다. 정성룡도 삼성과 해태에서 11년간 뛰었지만 단 한 시즌도 주전급으로 활약한 적은 없다. 문 전 감독도 12시즌을 뛰며 59승 49패 13세이브, 평균자책점 3.68 등의 통산 성적을 남겼다. 고교 최고 투수라는 이름값에는 미치지 못하는 기록이다.

“제가 좋았을 때 제 투구폼 기억하시죠. 제가 체격이 좋지는 않잖아요. 현역 시절, 키가 174cm에 몸무게는 66kg 정도였어요. 그 작은 체구에서 빠른 공을 던지려면 온몸의 힘을 다 써야 해요. 발가락부터 머리끝까지. 특히 손목부터 어깨를 써서 역동적으로 던졌죠. 한창 때는 들어 올리는 오른발도 제 머리 위로 넘어갔더라고요. 그런 탄력, 순발력으로 던진 거죠.”

“그런데 제 몸무게가 가벼우니까, 빠른 공을 던져도 맞으면 크게 뻗어 나간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체중을 불리라고 했어요. 지금처럼 체계적으로 웨이트 트레이닝 등을 하며 몸무게를 늘린 게 아니에요. 많이 먹어서 갑자기 체중을 늘린 거라서, 몸의 탄력과 순발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죠. 공 스피드도 나오지 않고 무릎도 아파서 힘들었어요,”

가을에는 강한 에이스 모드를 발동한 문희수

지금은 프로와 아마추어인 고교·대학과의 격차는 여러모로 크다. 지도 방식은 물론이고, 선수 관리 등도 체계적이고 세세하다. 또 코칭스태프와 선수들과의 관계도, 선후배 간의 관계도 엄격한 상하복명식 조직 문화와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프로야구가 출범한 1980년대는 군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프로에 들어가서 기억나는 건 무서웠다는 것밖에 없어요. 당시는 실업야구의 연장선상에서 프로야구가 있다가 보니까 선후배 관계가 엄격했죠. 선배들이 뭔가 지시한 거를 곧바로 하지 않으면 주먹부터 날아왔으니까요. 당시 무등야구장에는 샤워 시설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광주 MBC 옆에 가불탕이라는 목욕탕을 썼어요. 거기서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일반인이 있는데도 때리곤 했죠. 정말 맞은 이야기만 해도, 몇 날 며칠을 쉬지 않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프로야구에서 좋은 활약만 펼치면 전국적인 스타가 될 수 있지만, 문희수 전 감독은 “욕심이 없었다”라고 한다. “신인 때 연봉이 1천2백만 원이었는데, 그때는 25% 상한선이 있었잖아요. 아무리 잘해도 전년도 연봉에서 최대 25%밖에 못 오르는 거죠. 프로는 돈이고, 그게 동기부여가 되는데 그런 환경이 아니었죠. 첫 해 5경기에 나와 12.2이닝밖에 던지지 못하니까, 얄짤없이 연봉을 삭감하더라고요. 50만 원이었나 150만 원을요.”

자신이 활약할 때와 달리, 지금 KBO리그는 노력한 결과만큼 보상을 받게 됐다. 그런 만큼 문희수 전 감독은 선수들이 철저한 자기 관리 능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사진=KBO 제공)

그래도 2년 차인 1985년에는 두자릿수 승리(12승)를 올리며 팀의 주축 투수로 성장했다. 당연히 고교 시절처럼 에이스로 한 단계 더 성장할 것이라는 기대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다시 두자릿수 승리를 올린 것은 1992년이었다. 그전까지는 대체로 7~8승을 올리는 데 그쳤다. 다만 그가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 것은 한국시리즈였다. 1988년 한국시리즈에서 2승 1세이브를 올리는 대활약을 펼치며 시리즈 MVP를 받았다.

“저는 야구를 시작한 후로 결승전에서 진 적이 한 번도 없어요. 팬들이 열광하고 져서는 안 된다는 큰 경기에서는 아드레날린이 막 뿜어져 나오는 체질인 것 같아요. 아무리 던져도 힘들다는 생각이 안 들더라고요.”

“한국시리즈와 같은 큰 경기에 강한 이유는 자신감인 것 같아요.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면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죠. 그리고 게임을 즐기는 거죠. 좋은 활약을 펼치면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재밌더라고요. 한국시리즈만이 아니라 포스트시즌에서는 점수를 내준 적이 거의 없을 겁니다.”

그의 말처럼 한국시리즈에서는 모두 9경기에 나와 4승 무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0.68을 기록했다. 여기에 한국시리즈만큼이나 그가 기억하는 경기가 있다. 1988년 9월 1일 전주에서 열린 롯데와의 경기다.

“그날 더블헤더로 열렸거든요. 첫 경기에서 상대 선발은 안창완 선배님이었고, 최동원 선배님이 2회부터 구원으로 나와 쭉 던졌어요. 우리는 김정수 선배님에 이어 방수원 선배님이 던지다가, 제가 2-2 동점 상황에서 9회에 마운드에 올랐어요.

김인식 감독님(당시 투수 코치)이 2차전에 선발이니까 몸 푼다는 느낌으로 마운드에서 던져보라고 하셨죠. 제가 9회를 막고 무승부로 끝나겠지 싶었는데, 9회 말에 한대화 선배님이 끝내기 안타를 쳐서 이겼어요. 그리고 2차전에서는 선발로 나가서 승리를 거뒀어요. KBO리그에서는 역대 최초로 더블헤더에서 연속 승리를 거둔 거죠.”

곱상한 외모로 ‘꽃돼지’라는 애칭으로 사랑받던 문희수 전 감독은 1995년을 끝으로 유니폼을 벗었다. 그때 나이는 서른 살. 한창 선수로 뛸 시기에 은퇴를 결심한 것은 “(지도자로부터) 투수로는 모욕적인 말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은퇴 후, 1998년부터 2003년까지 해태와 KIA에서 투수 코치를 맡았다. 2004년부터는 동강대 감독에 올랐고, 2016년에는 고창 영선고에서 2019년까지 지휘봉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