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 부실 대응’ 김광호 1심 무죄…유족 “한 편의 코미디”
"피해자는 친구, 연인, 가족과 이태원을 방문한 평범한 시민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신체 보호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기능을 잘 수행할 것이라는 신뢰를 바탕으로 사건 당일 이태원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할 거란 믿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믿음은 처참히 부서졌습니다."
오늘(17일) 오전, 10·29 이태원 참사 당시 서울경찰청장이던 김광호 전 청장의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에 대한 서울서부지방법원 재판부가 한 말입니다.
검찰은 지난 1월 김 전 청장이 이태원 참사 당시 인파가 많이 몰릴 거란 보고를 받고도 부실하게 대응해 대규모 사상자가 발생했다며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로 기소하고, 재판부에 금고 5년을 선고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와 함께 참사 당일 서울경찰청에서 112 상황관리관이었던 류미진 전 서울청 인사교육과장, 당직 근무자였던 정 모 전 112 상황팀장도 기소했습니다.
이후 약 9개월이 지난 오늘, 이들에 대한 1심 선고가 내려졌습니다.
결과는 '무죄.'
지난달 30일, "사고를 충분히 예견해야 했고, 인적 물적 대책을 마련하고 대응 조치를 취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안일한 인식 하에 대응에 소홀하였고 결국 이태원 참사라는 참혹한 결과를 초래했다"며 용산경찰서 이임재 전 서장에게 금고 3년, 송 모 전 112상황실장에게 금고 2년, 서울경찰청 박 모 전 112치안종합상황실 3팀장에게 금고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 것과 상반되는 결과입니다.
재판부가 이런 결정을 내린 이유는 무엇일까요.
■ "직접적인 주의의무 위반 있었다고 인정하기 어려워"
김 전 청장에 대한 무죄 판결의 핵심 근거는 '용산경찰서 책임이 크다'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재판부는 김 전 청장의 유죄 여부를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따져봤고 무죄 판단을 내렸다고 설명했습니다.
첫째, 예측 가능성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재판부는 김 전 청장이 용산경찰서의 종합 치안 대책을 보고받았지만, "이태원 일대에 다수의 인파가 상당히 집중될 것이라고 하는 내용을 넘어, 대규모 인파 사고가 발생할 여지도 있지 않은가에 대한 우려나 그에 관련된 대비가 필요하다는 정보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었던 거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또 "서울 세계불꽃축제 등 행사를 대비해 본 경험이 있다는 것만으로 일반적 예측 정도를 넘어서 이 사건 사고 등 대규모 사고 위험성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고 단정하긴 쉽지 않다"고 했습니다.
둘째, 김 전 청장의 사전 조치 또한 유죄 수준은 아니었다는 겁니다. 재판부는 김 전 청장이 사전에 마포·용산·강남경찰서에 사전 대비책 마련을 지시했고, 이후에도 경비과나 용산경찰서 등에서 추가 경력 요청이 없었다며 "용산경찰서 관할 내 사고는 원칙적으로 용산서 소관이고, 서울 전체를 관할하는 서울경찰청장으로서 해당 지역 총책임자인 용산서장 판단을 신뢰할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용산경찰서가 마련했다고 하는 치안 대책을 보고받고 더 이상 지시를 내리지 않았던 것이 소속 경찰서에 대한 감독 책임을 회피한 거라고 평가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 덧붙였습니다.
셋째, 참사 당일의 대처도 업무상 과실로 보긴 어렵다고 했습니다. 재판부는 "이태원 치안 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용산경찰서 측에서, 오히려 용산서장의 지휘를 받는 기동대 등의 해산을 요청하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며 "사고를 인지한 직후에는 서울경찰청 경비과장에게 기동대 급파 지시도 내린 점까지 고려했을 때, 피고인 김광호의 업무상 과실로 이 사건 사고가 확대됐다고 보기도 쉽지 않다"고 했습니다.
재판부는 김 전 청장에 관해 "직무 수행에 매우 유감스러운 측면이 있음은 분명히 있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지만, 우리가 판단하는 건 형사 책임을 인정하기 위한 업무상 과실에 대한 부분"이라며 "검사가 제출한 증거를 종합해서 고려하더라도 사전 단계나 사건 당일 단계에서 서울경찰청장으로서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주의의무 위반 행위가 있었다고 인정하기는 증명이 부족하다"고 했습니다.
재판부는 이러한 취지로, 김 전 청장과 류 전 과장, 정 전 팀장 3명 모두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습니다.
"사고의 위협성을 예상한 사람은 경찰 내외를 막론하고 아무도 없었고 예측할 수 있었다는 건 사후 확증편향에 의한 착각"이라며 무죄를 주장했던 김 전 청장은, 재판 후 유족에게 전할 말이나 참사 책임에 대한 취재진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청사를 빠져나갔습니다.
■ "한 편의 코미디, 납득할 수 없어…검찰, 항소해야"
그제(15일)부터 재판이 열린 오늘까지 서울서부지법 앞에서 시위를 이어온 유족 측은 법원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검찰을 향해 즉시 항소해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 이정민 회장은 재판 후 기자들과 만나 "정의를 밝히는 공판이 아니라 한 편의 코미디였다. 문제는 있어 보이는데 죄는 없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라며 "112 신고로 살려달라고 그렇게 외치고 이야기했는데, 112 신고를 받고도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고 출동도 안 한 게 아무 죄가 없다면 국민은 구조 요청을 어디에 해야 하나"라고 따져 물었습니다.
참사를 예측할 수 없었다는 재판부 판단에 대해 "얼마 전 불꽃 축제 때 100만 명이 왔는데 경찰이 몇 명 갔나. 그건 예상하고 간 건가"라고 했고, 검찰에 대해서도 참사 후 1년 넘게 기소하지 않았다며 "국민의 편에 서 있는 게 아니라 정부의 편, 권력의 편에 서서 권력을 위해 존재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백민 변호사는 "검찰이 기소하지 않으려 했던 사건을 재판부도 덩달아 소극적 판단으로 면죄부를 줬다. 국가기관이 참사에 책임을 묻는 데 소극적인 것에 대해 유감"이라며 "우리가 일반적으로 다루는 업무상 과실치상을 봐도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 면죄부를 준 게 아닌가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시민대책회의 또한 논평을 내고 "이번 판결은 기존 사회적 참사에 관한 사법부의 판단과 달리 피고인들의 업무상 과실을 인정하지 않아 면죄부를 주고 말았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어 오늘 재판을 받은 김 전 청장 등 3명에 대해 "참사 발생 전부터 이태원 일대에 대규모 인파가 몰릴 것이라는 정보를 접하였고, 참사 당일 오전에는 이태원파출소 112신고 건수가 역대 최고치라는 보고를 받았다"며 "저녁 9시부터는 '압사될 분위기이고, 통제가 필요하다'라는 신고가 반복 접수되었음에도 적절한 안전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명백히 예견할 수 있는 인명사고 위험에 대한 대비를 단계별로 소홀히 한 업무상 과실이 인정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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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재훈 기자 (mr.chu@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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