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SMC, 분업과 확산…반도체 생태계 조성 주도
삼성전자, 시대 흐름 못 읽고 혼자 하려다 실패
SK하이닉스 성공은 협업·상생·개방 문화의 결실
‘시대정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독일어 ‘차이트가이스트’(Zeitgeist)를 우리말로 번역한 것입니다. 독일 철학자 헤겔이 말한 ‘시대를 이끄는 추동력으로서의 시대정신’에서 유래했습니다. 한 시대를 지배하는 정신, 또는 한 시대의 본질적 가치나 사상을 뜻합니다.
내달 3일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여야 진영마다 시대정신 찾기에 몰두합니다. 시대정신은 사회 구성원들의 삶과 사고에 영향을 주며, 우리 사회 모든 영역에서 의사결정의 기준이 되는 만큼 정치인들에게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기업 경영에서도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애플 테슬라 TSMC 성공의 공통점은
한 기업의 성공은 단순히 인력이나 기술력, 자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시대정신과 얼마나 잘 부합하고 공명하는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성공하는 기업은 시대정신을 잘 읽고 구현하며, 선도하는 기업입니다. 시대정신은 기업에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반이자 혁신의 조건입니다.
애플이 성공한 것은 디지털 감성과 사용자 경험을 스마트폰에 담아 ‘디자인과 인간 중심의 기술’이라는 시대정신을 구현했기 때문입니다. 테슬라는 친환경과 전기차 흐름을 선도하며 ‘지속 가능한 미래’라는 시대정신을 구현해 성공했습니다.
대만의 반도체 기업 TSMC는 세계 반도체 산업 역사에서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한 기업입니다. ‘파운드리’(Foundry)라는 완전히 새로운 사업 모델을 정립하고 확산시킴으로써 반도체 생태계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1987년 TSMC 출범 당시만 해도 대부분의 반도체 기업들은 삼성전자나 인텔처럼 설계부터 제조, 테스트, 패키징까지 모두 자체 수행하는 ‘종합반도체회사’(IDM)였습니다. 이에 비해 TSMC는 고객이 설계한 칩을 위탁받아 제조만 전문적으로 하는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공장이 없는 소규모 팹리스(Fabless) 기업들도 엄청난 비용이 드는 제조 설비 없이 반도체 산업에 진입할 수 있게 됐습니다. TSMC는 반도체 산업에서 시대정신인 ‘분업과 확산, 생태계 조성’을 주도한 것입니다.
삼성전자, 파운드리 1등 선언했지만
지금은 애플, 엔비디아, AMD, 퀄컴 등 세계 유수의 반도체 기업들이 TSMC의 첨단 공정을 사용해 칩을 제조하고 있습니다. 종합반도체회사인 인텔조차 최근에는 일부 고급 공정에서 TSMC에 의뢰할 정도입니다. AI 시대 반도체 기업의 총아로 평가받는 엔비디아를 비롯 AMD나 미디어텍 등도 모두 TSMC와 협업을 통해 성장한 기업들입니다. TSMC는 삼성전자나 인텔의 반도체 수직 통합 모델을 수평 분업 모델로 바꾸어 반도체 글로벌 생태계를 확장시킨 기업이라는 역사적 평가를 받습니다.
2019년 이재용 삼성 회장은 파운드리 분야의 엄청난 가능성을 파악하고 향후 10년 동안 133조 원을 투자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삼성전자는 2030년 파운드리 분야 세계 1등이 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은 TSMC 48%, 삼성전자 19%였습니다. 하지만 6년이 흐른 지금 시장 점유율은 TSMC 67%, 삼성전자 8% 수준입니다. 단순히 시장 점유율 격차가 확대된 것만이 아닙니다. 삼성전자는 사실상 파운드리 사업을 포기한 상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 이렇게 됐을까요? 여러 원인이 있고, 다양한 이유를 댈 수 있지만 한마디로 말하면 삼성전자는 시대 흐름을 읽지 못했습니다. 파운드리는 혼자 하는 비즈니스가 아니라 고객사와 함께하는 사업이며, 상호 협력의 생태계를 구축해야 성공하는 비즈니스입니다. 지금은 최고 AI 반도체 기업이 된 엔비디아가 1997년 재정 위기에 몰렸을 때 CEO 젠슨 황의 절박한 도움 요청에 기꺼이 손을 내민 사람이 TSMC의 창업자 모리스 창입니다. 이처럼 TSMC와 엔비디아는 특수 관계입니다. 삼성전자가 어떤 수단을 동원해도 뚫기 어려운 철벽입니다.
엔비디아 재정 위기 때 손 내민 사람은
애플, 테슬라, TSMC 외에도 시대정신에 맞춰 제품을 개발하고 고객 수요에 부응함으로써 날아오른 기업이 또 있습니다. 바로 SK하이닉스입니다. SK하이닉스가 대한민국 기업이라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SK하이닉스는 미국발 관세 충격에도 올 1분기 7조 4405억 원의 영업이익을 냈습니다. 매출액 대비 영업이익률이 42%로, TSMC의 48%에 버금갑니다. 반도체 시장 점유율은 36%를 기록해 삼성전자의 34%를 앞질렀습니다. 1992년 이후 33년간 반도체 1위 자리를 지켰던 삼성전자를 추월한 것입니다. 종합반도체회사일 뿐 아니라 스마트폰과 가전, 디스플레이 등의 비즈니스를 영위하는 삼성전자의 지난 1분기 영업이익은 6조 7000억 원으로, 메모리 반도체 사업만 하는 SK하이닉스에 밀리고 말았습니다.
SK하이닉스의 비상(飛翔)은 전적으로 HBM(High Bandwidth Memory, 고대역폭 메모리) 덕분입니다. HBM은 GPU, AI 가속기, 고성능 컴퓨팅 등에서 사용되는 차세대 메모리입니다. 기존 D램보다 훨씬 넓은 대역폭과 낮은 전력 소모에, 칩을 수직으로 쌓은 3D 구조로 설계돼 공간 효율성이나 속도 측면에서 탁월합니다.
HBM도 파운드리처럼 단일 기업이 혼자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아닙니다. SK하이닉스가 아무리 뛰어난 HBM을 만들어도 엔비디아의 요구 조건에 부합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되고 맙니다. 메모리 제조사(SK하이닉스), GPU 설계사(엔비디아), 반도체 패키징 업체(한미반도체)에 TSMC 같은 파운드리 기업까지 하나의 생태계를 이뤄야 제품이 완성됩니다. 오늘날 기술 산업이 개별 천재가 아닌 생태계 기반 집단지성으로 작동하는 현실을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결론적으로 HBM은 단순한 반도체 제품이 아닙니다. HBM은 기술 산업의 가장 깊은 요구를 담은 시대의 산물이며, 시대정신을 품은 결과물입니다.
‘무어의 법칙’ 수명 다하자 등장한 HBM
‘무어의 법칙’(Moore’s Law)이란 게 있습니다. 인텔의 공동 창업자인 고든 무어가 제안한 것으로 반도체 기술의 발전을 설명하는 핵심 이론입니다. 반도체 칩에 집적되는 트랜지스터 수가 18~24개월마다 2배로 증가한다는 무어의 법칙은 2010년대 들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됩니다. 폭증하는 인터넷 이용자와 메모리 용량, 그래픽 수요 등에 대처하려면 기존의 반도체 기술로는 어려웠고, 이에 칩 내부에 더 많은 트랜지스터를 집적하는 방식이 아닌 3D 적층 방식의 수직 확장이 요구됐습니다.
이런 시대적 요구에 부응해 탄생한 게 바로 HBM입니다. HBM은 무어의 법칙이 그 수명을 다한 현실에서 등장한 성능 스케일링의 새로운 길입니다. 기존처럼 칩 안에 트랜지스터를 더 박는 대신 메모리와 연산 자원을 수직으로 쌓고 빠르게 연결해 시스템 차원에서 고성능을 실현하는 기술이자 제품입니다.
엔비디아가 만드는 최신형 AI GPU 블랙웰의 가격은 개당 6만~7만 달러로 추산되며, 이 중 SK하이닉스가 만드는 HBM의 비용이 절반을 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엔비디아가 블랙웰 칩셋을 많이 팔수록 뒤에서 돈을 챙기는 것은 SK하이닉스라는 얘기가 됩니다. 그렇지만 HBM 개발 초기에만 해도 상황은 전혀 달랐습니다.
SK하이닉스가 HBM 개발을 시작한 건 2009년이며, 반도체를 설계하는 팹리스 기업 AMD와 협력해 2013년 세계 최초로 HBM1을 상용화합니다. 당시 성능은 분명 좋았지만 수율이 낮은 데다 가격도 너무 비싸 시장 반응은 싸늘했고 수요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SK하이닉스는 HBM 개발에 인력과 투자를 집중했습니다. SK하이닉스는 30년 넘게 늘 삼성전자에 밀리던 2등이었습니다. 따라서 HBM 이외에는 달리 탈출구가 없었고 그만큼 절실했습니다.
SK·TSMC 성공하고 삼성 실패한 이유
이에 비해 늘 1등만 해오던 삼성전자는 아쉬울 게 없었습니다. 김기남 부회장 시절이던 2019년경, HBM 개발을 일시 중단하고 우선순위에서 뒤로 미룹니다. 대신 돈이 되는 주력 사업인 D램과 낸드 플래시 메모리에 집중합니다. 2022년 말 챗GPT 출시를 계기로 인공지능 열풍이 불고, 고가의 HBM 수요가 폭증하자 삼성전자는 2023~2024년 다시 HBM에 집중했지만 이미 한참 늦었습니다.
SK하이닉스가 만년 1등이던 삼성전자를 누르고 AI 시대 반도체 산업의 핵심인 HBM 시장을 장악해 ‘혁신의 승자’가 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늘 2등만 해오다 보니 더 절실했고, 10년 넘게 주인 없는 회사로 있다 보니 잡초 같은 생명력도 갖게 됐습니다. 현대전자 시절부터 이어져 온 엔지니어들에 대한 우대문화는 SK그룹 인수 후에도 지속됐습니다. 특히 SK가 가진 개방과 토론, 협업의 문화는 SK하이닉스 비상의 절대적 원동력이 됐습니다.
마지막으로 결정적 요인 하나를 추가한다면 ‘협업과 분업을 통한 생태계 조성’이라는 시대정신을 품은 결과입니다. TSMC도 그랬지만 SK하이닉스도 주변 협력 기업들을 수직적 먹이사슬이 아닌 혁신의 파트너로 인정함으로써 AI 반도체 시대의 생태계를 조성했습니다. TSMC와 SK하이닉스가 ‘위대한 기업’이 된 것은 영업이익률이 40%를 넘어서기 때문이 아닙니다. AI 시대가 지속되는 한 파운드리와 HBM 시장이 앞으로도 무한 성장할 것이라는 전망 때문만도 아닙니다. 협력하고 상생하면서도 엄청난 수익을 거두고 위대한 기업이 될 수 있음을 입증했기 때문입니다.
공자는 ‘논어’의 마지막 장에서 “시대의 큰 흐름이자 추세인 명(命)을 알지 못하면 선견지명이 없으니 군자가 될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대정신을 읽어 여기에 부응하고 공명하지 못하면 절대 위대한 기업이 될 수 없습니다. SK하이닉스와 TSMC의 성공, 그리고 삼성전자의 실패가 이를 잘 보여줍니다.

박종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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