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문으로 넣을 줄은 몰랐다”…소량만 생산했는데 대박 난 ‘이 약’ [MK약국]

양연호 기자(yeonho8902@mk.co.kr) 2024. 10. 26.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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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올드보이의 한 장면. 최민식 배우가 의식이 없을때 강혜정 배우가 한미약품의 써스펜좌약을 넣어주는 장면이 나온다.
열이 펄펄 끓는 아이에게 해열제를 먹이려는 부모들 속은 타들어갑니다. 힘들어하는 아가에게 약을 먹이는 것도 고역이거니와, 애써 먹인 약을 토해버리기도 다반사니까요.

그래서 어린 아이가 있는 집이라면 반드시 갖춰야 할 필수 상비약이 있었으니, 바로 항문으로 넣을 수 있는 좌약(좌제) 해열제입니다. 매경 독자 여러분들도 다들 한 번쯤 ‘좌약의 경험’ 있으시죠?

국내에 좌제가 전혀 없던 1970년대, 해열제 좌제를 개발한 것은 한미약품 창업주인 고(故) 임성기 선대 회장입니다. 좌제는 먹는 약인 경구형, 혈관 등에 투여하는 주사제와 달리 직장(항문) 등에 투여하는 형태의 약이죠.

처음에는 수동식 기계로 소량을 생산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출시하고 나니 소비자들의 반응이 뜨거웠고, 바로 대량생산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한미의 써스펜 좌약은 단번에 ‘국민 상비약’으로 떠올랐고, 영화 올드보이에도 등장할 만큼 유명한 약이 됐죠.

고(故) 임성기 한미약품 회장, 새로운 제형 개발
故 임성기 한미약품 회장(1940.3~2020.8). <사진=한미약품/편집=매경헬스>
약의 제형은 단순히 제품을 포장하는 형식이 아닙니다. 어떤 제형이냐가 투약 편의성과 체내 흡수율을 좌우해 약효에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고 임성기 한미약품 선대 회장은 1973년 회사 창립 직후부터 독창적이고 혁신적인 제형을 줄줄이 내놓았습니다. 체내 흡수율이 좋은 ‘소프트캡슐’, 기체를 발생시켜 거품을 일으키는 ‘발포제’, 캐러멜처럼 씹어 먹는 ‘츄정’, 피부에 붙이는 ‘파프제’ 등 지금 익숙한 제형들이 모두 그렇게 나왔지요.

1976년엔 국내 최초로 좌제를 개발해 써스펜 좌약으로 출시하면서 어린이 해열진통제의 새 지평을 열었습니다. 좌약 해열제는 직장을 통해 흡수되기 때문에 경구 복용보다 빠르게 혈류에 들어가며 훨씬 빠르게 해열 작용을 한다고 합니다.

특히 구토가 있거나 경구로 약을 삼키기 어려운 유아, 어린이는 물론 의식이 불안정한 환자들에게도 투약할 수 있어 인기를 끌었습니다.

직장에서 직접 흡수…더 빠르고 뛰어난 효과
영화 올드보이에 한미약품이 선명하게 인쇄된 써스펜 좌약 포장지가 등장해 주목을 받았다.
써스펜 좌약은 1980년대 “직장에서 직접 흡수되는 써스펜은 해열효과가 아주 빠릅니다”는 문구로 TV 광고도 했습니다. 1990년대 초반에는 MBC 일요 아침드라마 ‘한지붕 세가족’에 출연해 인기를 끈 배우 이영범 씨가 광고모델로 나서기도 했습니다.

‘복합써스펜좌약’은 1991년 출시된 한미약품의 레거시 제품이자 유아용 의약품입니다. 아세트아미노펜, DL-메티오닌 제제로, 해열제를 삼키지 못하는 소아의 감기로 인한 발열 및 통증에 사용됐습니다.

특히 2003년 박찬욱 감독의 영화 ‘올드보이’에서는 한미약품이 선명하게 인쇄된 써스펜 좌약 포장지가 등장해 화제가 되기도 했지요..

“해열제 잘 듣네…‘좌약’이에요. 기절한 사람한테 약을 먹일 수가 있어야지.”

낙지를 먹다 고열로 갑자기 기절했다 깨어난 오대수(최민식 분)가 ‘한미약품’이 선명하게 인쇄된 약 포장지를 들고 당황스러워하자, 그를 자기 집으로 데려온 미도(강혜정 분)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설명하죠. 오대수가 들고 있던 약이 한미약품의 좌제 해열제인 써스펜 좌약입니다.

출산율 저하와 생산비용 증가로 생산 중단
시럽제 인기에 밀려 역사 뒤안길로 사라질 뻔한 써스펜 좌약.
써스펜 좌약의 인기에 다른 좌제 해열제도 속속 출시됐습니다. 아세트아미노펜 성분의 파세몰좌약(신일제약), 아세펜좌약(에스트라) 등과 이부프로펜 성분의 삼일부루펜좌제(삼일제약) 등이 80~90년대 출시됐습니다.

한미약품은 1991년 아세트아미노펜에 DL-메티오닌 성분을 더한 복합써스펜좌약을 추가로 출시하는 등 지금까지 국내에서 모두 22종의 좌제 해열제가 국내 품목허가를 받아 출시된 바 있죠.

하지만 좌제 해열제는 연령이나 체중에 따른 투약 용량 조절이 어려운데다, 개별 포장형 시럽제의 인기가 높아지고 물 없이 녹여 먹을 수 있는 가루(파우더) 형태 해열제도 출시되는 등 투약 편의성을 높인 제품들이 등장하면서 하나둘씩 사라져 갔습니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대부분 제약사들이 좌제 해열제의 생산을 중단했습니다. 2019년 1월 삼일제약이 삼일부루펜좌제 품목허가를 취하하면서, 한미약품의 복합써스펜좌약이 국내 유일한 좌제 해열제로 남게 됐습니다.

그러던 한미약품도 위탁 단가 상승에 따른 채산성 저하를 버티지 못했습니다. 한미약품이 ‘복합써스펜좌약’의 공급 중단을 결정한 것은 지난 6월입니다. 더 이상 수익성을 개선하기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었죠.

제약업계 관계자는 “출산율 저하로 사용량은 줄어든 반면 좌약 생산에 드는 비용이 계속 증가하면서 더 이상 제품을 제조하는 것이 어려웠다”고 전했습니다.

당시 공급 중단 소식이 알려지자 ‘(해열제를 경구로 복용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약인데 안타깝다’는 반응이 이어졌습니다.

이르면 연내 전국 약국에서 구매 가능할듯
송영숙 한미그룹 회장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가 싶었던 써스펜좌약이 다시 약국으로 돌아온다고 하네요. 한미약품은 최근 국내 유일의 좌약 생산 수탁 업체인 HLB제약과 복합써스펜좌약 공급 재개를 위한 계약을 완료했다고 밝혔습니다.

한미약품 관계자는 “채산성 이슈로 공급 중단을 결정했지만 한미의 레거시 제품이자 유일한 좌약 해열제 의약품으로 복합써스펜 좌약의 지속적인 유통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다시 생산해 공급하기로 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번 결정은 의약계와 환자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진 것이자,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제약기업 본연의 역할에 충실한다는 한미약품의 경영이념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인간존중’을 경영이념으로 삼고 있는 한미약품의 결단과 생산 수탁 업체와의 전향적인 단가 협력, 그리고 식약처에서 양측 회사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수렴하고 조율해 얻어낸 결과인 셈입니다.

송영숙 한미그룹 회장은 “입으로 해열제를 삼키기 어려운 환자들에게 복합써스펜좌약은 꼭 필요하다. 이익을 많이 볼 생각하지 말고 생산을 다시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라”고 지시했고, 실무진은 즉각 공급 재개를 위한 재검토에 착수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식약처도 좌제 해열제 공급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 행정지원과 약가 인상 건의 등의 조치를 내렸다고 합니다. 그 결과 한미약품은 수탁사와 전향적인 단가 협력에 합의했고, 연내 전국 약국을 통해 제품이 다시 유통될 전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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