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만 더 늦게 발병했다면, 너희들과 함께 학교 다닐 수 있었을까…”
지난여름 친구들에게 썼던 편지가 있다. 한 통도 부치지 못한 편지들이. 6월 말에 받았던 검사 결과가 좋지 않아서 시술 내지는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통보를 듣고 나서 나는 모래 위에 글자를 새기듯 아무도 받지 못할 편지들을 써댔다. 편지들은 심상하게 시작했다. 안녕, 나, 채윤이야, 하고. 나는 친구들이 나 없는 상황에서 편지를 읽는다고 상정하고는 내가 그들을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그들과의 순간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겼는지 썼다. 겁 많은 내가 지레 두려움을 품고 썼던 마지막 편지들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목숨이 위험할 확률은 낮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편지에서도 그 무엇도 남기거나 부탁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것들은 부끄러워서 부칠 수 없다는 점을 빼면 아주 명확한 수신인을 둔 평범한 편지가 됐다.
조현아 작가의 열 편짜리 단편 웹툰 ‘연의 편지’는 주인공 소리가 전학해 온 학교, 자기 자리에서 한 통의 편지를 발견한 뒤 편지를 통해 만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펼쳐지는 이야기다. ‘네게 이곳을 소개하기 위해 쓰인’ 첫 편지에는 도서관에 가거나 체육 수업과 등하교를 할 때 각각 가장 빠른 길과 ‘교장실과 가까우니 조심해야 하는’ 개구멍의 위치 등이 담겨 있다. 편지 말미에는 다음 편지가 있는 곳의 힌트가 있다. 소리는 편지를 쓴 사람이 이미 전학 간 ‘정호연’이라는 아이임을 알아내고, 편지의 도움을 받아 쉽게 반 아이들의 얼굴을 외우고 학교에 적응해나간다. 그리고 편지를 찾아 학교를 누비는 자신과 동선이 계속 겹치는 친구, ‘동순’과 친해진다.
‘연의 편지’에서 가장 근사한 장면은 학교에서 일하는 분들의 성함과 얼굴이 적힌 카드가 나올 때다. 자신이 다니는 학교의 기숙사 사감, 급식 조리원의 이름을 아는 아이가 몇이나 될까? 그중에서도 편지의 발신인과 가장 친했다던 경비기사인 ‘김순이’의 옆에는 작은 글씨로 ‘마녀’라고 적혀 있다. 소리와 동순은 호연이 전학을 가고 나서 연못이 된 자리에 편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연못으로 뛰어들어 편지를 찾는다. 그러나 편지는 이미 다 젖은 상태로 글씨가 번져 읽을 수 없다. 그들은 그 편지를 들고 김순이 기사님에게 간다. 기사님이 끓이던 찻주전자의 입구를 편지에 가져다 대자 물방울이 위로 솟아오르며 번졌던 글씨가 또렷해진다.
편지를 따라가던 그들은 호연이 사실 어렸을 때 앓았던 병이 재발해 마을을 떠나게 됐음을 알게 된다. 호연과 소리는 어렸을 때 같은 병원에 입원해서 친하게 지내며 같이 놀던 친구 사이다. 호연은 스스럼없이 다가와 호의를 베풀던 소리 덕에 병원에서 보냈던 날들을 버텨냈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기 전 자신의 반으로 전학 오는 사람이 소리임을 알게 된 호연은 우연이 아니라, 정확히 소리를 겨냥해서 편지를 쓴다.
마지막 화에서 편지를 쓰던 호연의 마음이 독백으로 드러난다. ‘조금만 더 늦게 발병했더라면 내가 사랑하는 이곳을 너희 둘과 다닐 수 있을 텐데. 아니 이런 생각은 말아야지. 수술이 잘 끝나서 만나면 되는 거니까. 그래도 역시 조금 아쉽다. 내가 죽기라도 하면….’ ‘몰랐으면 하는 마음, 알았으면 하는 마음, 너희가 상처받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응석 부리고 싶은 마음, 외로울까봐 무서운 마음. 편지를 찾았으면 좋겠다, 편지를 못 찾았으면 좋겠다. 나를 잊었으면. 나를 기억했으면. 나를 보러 왔으면.’
웹툰을 보다가 이따금 내 마음이나 상황과 꼭 들어맞는 장면을 발견하면 마음이 선뜩하면서도 위로받는 기분이 든다. 만화 속 호연은 울지도 않고 편지를 썼다. 나는 편지를 쓰며 내리 울었다.
신채윤 ‘그림을 좋아하고 병이 있어’ 저자
*“작은 말풍선과 등장인물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좇으며 몸과 마음이 아픈 순간을 흘려보냈다. 만화의 세계를 헤엄치며 맛봤던 슬픔과 기쁨, 내 마음을 콩콩 두드렸던 뜻깊은 장면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 희귀병 다카야스동맥염을 앓는 20대 작가가 인생의 절반을 봐온 웹툰의 ‘심쿵’ 장면을 추천합니다. ‘웹툰 소사이어티’는 웹툰으로 세상을 배우고 웹툰으로 이어진 것을 느낀다는 의미입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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