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국의 엘팬알백] ④LG 트윈스의 역사적 창단식과 1990년 트윈스 원조 멤버들 이야기
#1.
“MBC 청룡이 얼마까지 제시했습니까?”
“계약금 4800만 원에 연봉 1200만 원, 합쳐서 총 6000만 원까지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럼 저희가 계약금 5800만 원에 연봉 1200만 원, 총 7000만 원 채워드리겠습니다.”
김진석 씨는 깜짝 놀랐다. MBC 청룡보다 계약금만 1000만 원을 더 얹어주겠다는 게 아닌가. 곧바로 그 자리에서 입단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김 씨는 1990년 1차지명 포수 김동수의 아버지다. 김동수가 한양대 4학년 졸업반 학생인 까닭에 아버지가 구단과 입단 협상에 나섰다. 1989년 11월 1차지명 후 만났던 청룡 구단은 이면계약을 하더라도 계약금 4800만 원 이상은 어렵다는 입장이었지만, 럭키금성은 거기에 추가로 1000만 원을 챙겨줬다.
당시엔 이면계약이 성행하던 시절. 대외 발표용으로는 계약금 4000만 원, 연봉 1200만 원으로 총 5200만 원에 계약한 것으로 알렸다. 이는 다른 선수와 형평성 문제, 다른 구단과 시세를 맞추기 위한 그 시절 프로야구판의 관행이었다.
#2.
“108% 올려드리겠습니다. 2500만 원 괜찮겠습니까?”
1989년 MBC 청룡 신인으로 맹활약한 노찬엽은 이듬해인 1990년 1월 말 연봉 협상을 하기 위해 럭키금성 쌍둥이빌딩에 있는 구단 사무실로 찾아갔다. 당시엔 KBO 모든 신인의 연봉은 1200만 원에서 출발했고, 이듬해 연봉은 상한선 25%의 족쇄에 묶여 있었다.
그러니까 신인이 프로 첫해에 아무리 잘해도 2년째 연봉은 최대 1500만 원밖에 받을 수 없었다. 그런데 간판이 럭키금성으로 바뀐 뒤 구단에서 먼저 노찬엽에게 1000만 원을 더 얹어 2500만 원까지 주겠다고 하는 게 아닌가. 노찬엽은 그 자리에서 사인을 마쳤다.
KBO의 연봉 상한선 25% 제도가 신인에 한해 공식적으로 폐지된 것은 1994년 9월(KBO 이사회)이었다. 그 이전에는 특급선수들은 대체적으로 이면계약을 통해 실제 연봉과 언론보도용 연봉을 달리 처리해왔다. 하지만 언론에 대놓고 108% 연봉 인상을 과감하게 발표한 것은 LG 트윈스 노찬엽이 최초였다. 그러면서 KBO의 25% 연봉 상한선은 유명무실해지기 시작했다.
위 두 가지 사례는 1990년 MBC 청룡을 인수한 럭키금성이 속전속결로 연봉 협상을 펼쳐나간 대표적인 풍경이다.
다른 선수들의 연봉 협상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과거 MBC 청룡 구단의 예산은 크지 않았다. 그래서 청룡 시절 선수 몸값도 박한 편이었다.
하지만 MBC 청룡 구단을 인수한 럭키금성 그룹은 달랐다. 선수 연봉에서 가장 후한 대접을 해주면서 일사천리로 사인을 이끌어냈다. 선수들은 그야말로 부잣집으로 넘어 온 사실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1월 31일 연봉 재계약 데드라인에 앞서 계약을 모두 끝낸 LG 트윈스 선수단은 2월초부터 3월초까지 대만 스프링캠프를 소화하면서 시즌 준비에 돌입했다.
그리고는 3월 15일 서울 여의도 쌍둥이빌딩에서 세련된 줄무늬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뒤 마침내 역사적인 창단식을 열었다.
[엘팬알백-LG 트윈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이번 편에서는 1990년 LG 트윈스의 출항을 알린 창단식 전후의 풍경과 ‘쌍둥이 군단’ 최초의 전사들에 대해 살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한다.
◆청룡 1차지명, 럭키금성→트윈스…유니폼만 세 번 갈아입은 '트윈스 창단둥이' 김동수의 추억
1990년 KBO 신인드래프트부터 1차지명은 구단별로 2명씩 뽑을 수 있었다. 1년 전(구단별 3명)보다 1명씩 줄어든 상황. MBC 청룡과 OB 베어스는 1989년 11월 7일 KBO에서 열린 서울 지역 신인드래프트에서 추첨을 통해 1990년 신인 우선권을 가렸다. 결국 MBC가 이기면서 1순위와 4순위를 가져가고, OB가 2순위와 3순위를 뽑을 수 있었다.
MBC는 1순위 카드로 공·수를 겸비한 아마추어 최고 포수 김동수(서울고-한양대)를 찍었다. OB는 2순위로 김동수의 서울고-한양대 동기인 내야수 임형석을, 3순위로 동대문상고(현 청원고)의 초고교급 투수 김경원을 뽑았다. 이어 MBC는 4순위로 선린상고-고려대 출신 외야수 이병훈(작고)을 선택했다.
“1차지명 받고 나서 MBC 청룡 유니폼과 모자를 지급 받았어요. 요즘엔 구단들이 당연히 1차지명 신인에게 새 유니폼을 입히지만, 당시엔 그렇지 않았죠. 신인들에겐 선배들이 입던 헌 유니폼과 모자를 지급해 주더라고요. 그걸 착용하고 건국대 야구장에서 훈련 중인 청룡 선수단에 합류했어요. 어쩌면 그땐 그게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절이죠. 요즘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겠지만요. 하하.”
김동수(현 서울고 감독)는 36년 전 MBC 청룡 끝자락의 추억 한 조각을 끄집어내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12월(15일)에 청룡이 럭키금성에 팔린다는 기사가 나오면서 신인 계약 협상도 올스톱되고, 백인천 감독님 지휘 하에 진행 중이던 훈련도 중단되고 그랬던 기억이 나요. 그러다가 1990년 1월(18일)에 럭키금성과 MBC 청룡이 인수 조인식을 했잖아요.”
옛 추억을 이야기하던 김동수는 정확한 날짜와 내용들을 끄집어내기 위해 당시에 썼던 일기장을 찾아내 뒤적거렸다.
“어릴 때부터 일기를 썼는데 당시 날짜별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적혀 있네요. 1월 22일에 팀 이름이 LG 트윈스로 발표됐고, 1월 23일에 아버지가 쌍둥이빌딩에 가셔서 입단 계약을 했고, 저는 1월 28일부터 건국대 야구장에서 럭키금성 임시 유니폼을 입고 첫 연습을 시작했고…. 그런 다음에 2월 5일에 대만 타이중으로 스프링캠프를 떠났고, 2월 13일에 구본무 구단주께서 직접 타이중까지 오셔서 선수단 저녁 식사를 사주셨고….”
꼼꼼히 기록돼 있는 김동수의 일기장 덕분에 LG 트윈스의 역사가 날짜별로 파노라마처럼 세세하게 복기됐다.
김동수는 1989년 11월 MBC에 1차지명을 받고 청룡 유니폼을 잠깐 입었다. 그리고는 이듬해인 1990년 1월 말부터 럭키금성 임시 유니폼을 입고 훈련을 시작했다. 이어 대만 스프링캠프를 다녀온 뒤 3월에 LG 트윈스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불과 몇 개월 사이 3가지 유니폼을 입는 역사의 과도기를 경험했다.
1990년 신인 최대어 유망주 김동수는 새롭게 시작하는 LG 트윈스 구단의 창단둥이라는 상징성을 갖고 있었다. 이로 인해 세상에 처음 선을 보인 줄무늬 유니폼의 모델로 발탁됐다. 그리고는 그해 신인왕에 오르면서 LG 트윈스의 성공적인 첫 출발을 함께했다.
◆연봉협상, 트레이드…숨가쁜 선수단 정비 작업
다시 시계를 1990년 1월로 되돌려 보자. 럭키금성은 1월 18일 MBC 청룡 인수 조인식이 끝난 뒤 백인천 감독을 중심으로 발 빠르게 선수단을 정비하고 규합했다.
[엘팬알백] ③편에서 소개했듯이, 선수단은 선수단대로 바빴고 프런트는 프런트대로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우선 KBO 규약에 따라 MBC 청룡에서 넘어온 선수단의 연봉협상을 1월 31일까지 마쳐야 했다. 사실 구단 인수 후 2주일도 채 안 되는 기간. 선수들과 연봉 협상 줄다리기를 할 여유도 없었다.
무엇보다 LG 트윈스로 새출발하는 만큼 사기 진작을 위해 선수들의 요구를 대부분 들어줬다. 김동수와 노찬엽의 사례처럼 구단이 알아서 먼저 파격적인 금액을 책정하기도 했다. 이는 “프로야구단에 전폭적인 지원을 하라”는 구본무 구단주의 의중이 반영된 결과였다.
연봉협상뿐만 아니었다. 멈춰 있던 선수단 정비 작업도 숨가쁘게 진행됐다. 거포 김상호를 내주고 OB 베어스의 재일교포 투수 최일언을 데려오는 트레이드도 1월 22일 마무리했다.
1988년 MBC에 입단한 김상호는 2년간 통산 홈런 20개를 때린 거포 유망주. 하지만 당시 삼진이 많고 3루수(OB 이적 후 외야수로 변신)로서 수비가 거칠다는 평가를 받던 선수였다.
최일언은 1985년 10승, 1986년 19승, 1987년 14승을 올리는 등 한때 OB 에이스로 활약했던 투수지만 하향세에 접어드는 베테랑이었다.
MBC 청룡은 1989시즌 가까스로 탈꼴찌(7개 구단 중 6위)를 할 정도로 허약했다. 백인천 감독은 MBC 지휘봉을 잡자마자 팀의 도약을 위해선 투수력 강화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미래 자원인 김상호를 내주고 경험 많은 베테랑 투수 최일언을 영입하도록 청룡 구단에 요청하면서 트레이드 이야기는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하지만 1989년 말 청룡 구단 매각 문제와 김상호의 미국 이민설 등으로 협상이 중단됐던 상황. 결국 해를 넘겨 LG 트윈스가 다시 협상을 재개하면서 잠실 라이벌 팀끼리 사상 최초로 선수간 트레이드를 단행하게 됐다.
1월 30일에는 태평양 돌핀스의 재일교포 잠수함투수 김신부를 데려오기 위해 같은 잠수함 유형의 투수 이길환과 맞트레이드를 했다. 같은날 우완 정통파 오영일도 현금 2700만 원의 이적료에 태평양으로 건너갔다. 이길환과 오영일은 MBC 청룡 시대 마운드의 주축을 이룬 투수들이었지만 1989년에 내리막길에 접어들면서 구단에서 은퇴를 권유하던 상황이었다.
<김상호, 이길환, 오영일에 대해서는 추후 MBC 청룡 시절 이야기에서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 대만에서 최초 스프링캠프…3월 15일 마침내 창단식
LG 트윈스는 연봉 협상을 마치자마자 2월 5일 대만 타이중으로 전지훈련을 떠났다. MBC에서 LG로 구단이 바뀐 뒤 최초로 실시한 해외 스프링캠프였다.
“MBC 청룡 시절부터 포함해 우리 구단이 대만으로 스프링캠프를 떠난 것은 처음이었어요. 그때만 해도 급조해서 공수한 럭키금성 임시 유니폼을 입고 훈련을 했는데, 구단 직원들과 고위 인사들이 수시로 대만으로 오셔서 필요한 부분들을 파악하고 전폭적으로 지원을 해줬던 기억이 납니다. 구본무 구단주께서도 직접 오셔서 회식도 시켜주시고 필요한 부분들을 직접 챙겨주시기도 했고요.”
당시 LG 트윈스 코치를 맡았던 ‘원조 악바리’ 김인식(현 연천 미라클 감독)의 이야기다. 그는 1982년 MBC 청룡 원년 멤버로 1988년을 끝으로 은퇴한 뒤 지도자의 길로 들어섰다.
LG 트윈스 선수단은 약 한 달 동안 진행한 첫 스프링캠프를 마치고 3월 4일 귀국했다.
KBO 시범경기 개막은 3월 10일(태평양 돌핀스-롯데 자이언츠 1경기)로 예정돼 있었다. LG 트윈스는 아직 창단식을 하지도 않은 상황이어서 KBO 일정상 3월 17일 마산구장에서 첫 시범경기(OB 베어스전)를 치르게 돼 있었다.
그 사이 3월 15일 오전 서울 여의도 쌍둥이빌딩에서 마침내 역사적인 창단식이 열렸다.
『LG 트윈스가 양 날개를 편 채 힘찬 도약을 시작했다. 럭키금성 그룹은 15일 상오 여의도 쌍둥이빌딩 동관 지하1층 대강당에서 지난 1월 18일 문화방송과 체결한 구단 매각에 따른 조인식 후 56일 만에 창단식을 갖고 프로야구 무대에 뛰어들 본격적인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이로써 럭키금성은 프로축구, 민속씨름, 남녀배구, 남자테니스, 여자조정 등을 포함, 7개 종목을 거느린 매머드 스포츠 군단으로 발돋움했다.』 <1990년 3월 16일자 스포츠서울>
럭키금성 그룹은 하루 앞선 3월 14일 저녁 창단식 전야제를 열었다. LG 트윈스 선수단은 물론 가족들을 쌍둥이빌딩으로 함께 초대해 저녁 식사를 하면서 축제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리고는 이튿날인 3월 15일 오전 이웅희 KBO 총재와 김종락 대한야구협회장, 럭키금성그룹 임직원, LG 트윈스 선수단 및 프런트 등 4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창단식이 펼쳐졌다.
개식사와 경과보고, 선수단 소개에 이어 구본무 LG 트윈스 초대 구단주(럭키금성 부회장)가 프로야구단의 정식 출범을 알리는 단기를 조광식 초대 단장에게 전달했다.
곧이어 조광식 단장과 백인천 초대 감독이 단기를 맞잡고 흔들자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구본무 구단주는 기념사에서 “그룹이 ‘인간존중’, ‘고객을 위한 가치 창조’라는 새로운 경영이념을 내세운 채 제2의 도약을 꿈꾸는 것과 발맞춰 LG 트윈스가 태어난 만큼 뛰어난 스포츠정신을 바탕으로 보다 도전적이고 끈기있는 활기찬 경기로 팬들의 성원에 보답해주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구단의 발전과 나아가 프로야구의 질적 향상은 그룹 차원의 열성적인 지원, 프런트와 선수단의 희생적인 노력, 팬들의 사랑 등이 조화를 이룰 때 가능하다”며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1990년 LG 트윈스 최초의 전사들을 아십니까?
럭키금성 그룹이 원년부터 갖고 싶어했던 프로야구단은 이렇게 첫 출항의 고고성을 울렸다.
1990년 LG 트윈스 선수단은 쌍둥이 군단 역사의 초석을 놓은 원조 멤버들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그 이름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여기부터 트윈스의 역사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특히 올드팬들에게는 추억 어린 얼굴들이 많을 것이다. 벌써 35년의 세월이 흘러 일부 선수는 이름과 얼굴이 가물가물할지도 모르겠다. 1990년 LG 트윈스 팬북에 실린 최초의 전사들을 소개한다.
■1990년 LG 트윈스 최초 선수단
●코칭스태프
백인천(감독) 조창수(수석코치) 김인식(2군감독 겸 수비코치) 정순명(투수코치) 김봉기(주루코치) 최정기(배터리코치) 김용달(타격코치) 하기룡(2군 투수코치) 최정우(2군 타격 및 주루코치)
●투수
정삼흠 최일언 유종겸 김용수 김신부 이국성 김건우 김태원 예병준 이용철 문병권 차동철 김덕근 김기범 한명수 최우석 오정민
●포수
심재원 서효인 김동수 차동열 장호익
●내야수
김재박 김상훈 민경삼 김동재 유지홍 나웅 박성훈 이승범 김선진 김기홍 김성재
●외야수
이광은 노찬엽 박흥식 신언호 윤덕규 양승관 이병훈 김영직 최훈재 조필현 김성일
●2군
구동환 박승암 김종철 김성준 이헌상 김성원 이승배 오한빈 이재원 전태건 배현우 장주덕 윤주영 강정학 최달호 유창현 연제석
※덧붙이기
창단식 당시 깃발을 흔들고 있는 LG 트윈스 조광식 초대 단장과 백인천 초대 감독의 사진을 보면 어디선가 한 번 본 듯한 장면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데자뷔 같은 이 장면은 실제 과거에도 있었던 일이었다. 두 주인공은 8년 전 MBC 청룡 창단식에서도 함께 깃발을 흔들었기 때문이다.
두 번이나 창단식 역사의 한복판에 선 두 사람은 마치 영화처럼 MBC 청룡과 LG 트윈스의 역사를 잇는 중요한 가교 역할을 했다.
[엘팬알백]은 일단 여기서 LG 트윈스 이야기를 잠시 멈추고, 추억이 어린 이 사진을 통해 다음 편부터 LG 트윈스 구단의 뿌리이자 원류라 할 수 있는 MBC 청룡 시대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가려 한다.
청룡의 주요 인물과 역사, 기록과 기억은 트윈스 시대의 야구를 이해하는 데 밑거름이 되기 때문이다.
[엘팬알백] ⑤편에서 계속
이재국
야구 하나만을 바라보고 사는 ‘야구덕후’ 출신의 야구전문기자. 인생이 야구여행이라고 말하는 야구운명론자.
현 스포팅제국(스포츠콘텐츠연구소) 대표 / SPOTV 고교야구 해설위원 / 유튜브 '이재국의 와일드피치' 운영
전 스포츠서울~스포츠동아~스포티비뉴스 야구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