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집이 필요해요, 집이 있어야 해요“ [비장의 무비]

김세윤 2026. 3. 20. 0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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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티멘탈 밸류〉
감독: 요아킴 트리에르
출연: 레나테 레인스베, 스텔란 스카스가드, 잉가 입스도테르 릴레오스

※영화 〈센티멘탈 밸류〉의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선생님이 숙제를 내주셨다. 사물의 시선으로 글을 써보라고 하셨다. 집이 되어보기로 했다. 나라면 내가 텅 비어 있는 상태와 꽉 들어찬 상태 가운데 뭘 더 좋아할까? “그래, 집은 가득 찬 걸 좋아할 거야.” 6학년 노라는 그렇게 믿었다.

다툼이 잦은 엄마와 아빠. 싸우는 소리로 가득 찬 집. 하지만 곧 조용해졌다. 집이 소음보다 더 싫어한 건 그 침묵이라고, 노라는 썼다. “아빠가 떠난 뒤 집이 점점 더 가벼워졌다. 집은 아빠의 소리를 그리워했다.” 이렇게 끝맺은 숙제로 ‘A’를 받았다.

아빠가 집으로 돌아온 건 엄마 장례식 때였다. 어른이 된 노라(레나테 레인스베)와 동생 아녜스(잉가 입스도테르 릴레오스)가 어색하게 아빠 구스타브(스텔란 스카스가드)를 맞이했다. 이 집에서 새 영화를 찍을 계획이란다. 배우가 된 노라를 생각하며 시나리오를 썼단다.

“우린 같이 일 못해요. 대화가 안 되잖아요.” 시나리오에 손도 대지 않고 일어서 나가는 노라. 당황한 표정으로 주섬주섬 다시 시나리오를 챙겨 넣는 구스타브. 미련 없이 떠난 아빠가 이제 와 미련스럽게 매달리는 이유를 관객은 아직 모른다. 그가 주워 담은 시나리오엔 어떤 이야기가 들어 있을지 슬슬 궁금해진다. 노라를 대신해 캐스팅된 할리우드 배우 레이첼(엘 패닝)을 따라 한 장면 한 장면, 영화 속 영화의 세계로 이끌려 들어간다.

어느 정도는 요아킴 트리에르 감독 자신의 이야기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집을 어머니가 매물로 내놓은 게 시작이다. 몇 대에 걸쳐 가족의 역사가 쌓인 곳. 선대(先代)의 아픔과 당대(當代)의 추억이 구석구석 먼지처럼 내려앉은 공간. 집이란 무엇일까. 가족이란 어떤 걸까. 다툼과 화해, 상처와 치유, 죽음과 생존의 시간은 어떻게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나. 가볍지 않은 질문을 층층이 쌓아올려 영화를 완성했다. 〈센티멘탈 밸류〉라는 집을 지었다.

구스타브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어머니를 생각하며 시나리오를 쓴다. 언젠가 스스로 삶을 끝내려 한 노라에게 그걸 건넨다. 자신의 엄마를 자신의 딸이 연기해주길 바란다. 아빠의 뒤틀린 인생을 딸이 조금은 이해하길 기대하면서. 죽은 엄마의 이야기가 결국엔 딸을 살리는 영화가 될 거라고 믿으면서.

“도와주세요. 더 이상 못하겠어요. 혼자서는 못해요. 나에겐 집이 필요해요. 집이 있어야 해요.” 마침내 노라를 무너뜨린 이 독백에서 집은 ‘house’가 아니다. ‘home’이다. 〈만약에 우리〉에서 “그때 내 집이 되어줘서 정말 고마웠어”라고 할 때의 집. 〈노매드 랜드〉에서 “난 ‘홈리스’가 아니야. ‘하우스리스’이긴 해도(I’m not a homeless. I’m just houseless)”라고 말할 때의 바로 그 홈(home).

그렇게 영화가 우리에게 숙제를 내준다. 어떤 집이 되고 싶은지 물어본다. 가득 찬 ‘하우스’와 텅 빈 ‘홈’ 가운데 어느 쪽이 지금의 나일까. 내 마음속 굳게 닫힌 방 한 칸, 어떤 이가 열쇠를 쥐고 있을까. 그 어둠을 열어 보일 용기가 나에겐 있을까.

“같은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넌 왜 망가지지 않았어?” 조심스레 묻는 노라에게 아녜스가 돌려준 대답. “난 언니가 있었거든. 내 옆엔 언니가 있었어. 그게 안심이 됐어.” 아, 너무 아름다운 이 장면 덕분에 알게 되었다. 때론 자물쇠가 동시에 열쇠이기도 하다는 걸. 집을 떠난다고 집이 떠나는 게 아니라는 걸.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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