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JMT 휘트니] 무언가를 추구하는 사람에겐, 바로 지금이 삶에서 가장 젊은 때

휘트니산Mount Whitney(4,421m)은 알래스카를 제외한 미국 본토 최고봉으로 시에라네바다산맥 남부에 있는 산이다. 1864년 이곳을 처음으로 측량 조사한 지질학자 J. D. 휘트니의 이름을 땄다. 북면은 만년설로 덮여 있는 빙하지형으로 산세가 무척 험하다.
많은 등산객들이 휘트니산을 올라가고 싶어하지만 입산을 위한 필수조건인 퍼밋을 받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렵다. 당일 퍼밋Day Permit은 추첨을 하는 야영 퍼밋Overnight Permit보다 조금 수월하긴 하지만 최소 등반거리가 22km, 해발높이가 4,421m이어서 고산병까지 염두에 두어야 하니 쉽게 도전하기가 어렵다.
이번 휘트니산행은 무척이나 오랫동안 갈망하던 존뮤어트레일John Muir Trail, JMT을 북진으로 시작하며 올랐다. 존뮤어트레일은 요세미티계곡에서 시작해 휘트니포털까지 이어지는 장장 358km의 트레일로 산행 중에 필요한 의식주를 모두 배낭에 메고 자신의 두 발로 걸어서만 갈 수 있는 길이다.
트레일을 걷는 동안에는 모든 문명의 이기와는 작별해야 한다. 먼 길을 계획하는 데 망설임이 없을 수 없었다. 걷기가 생활인 나이지만 필요한 모든 물품을 지고 최소 20km를 매일 걸어야 하니 쉽게 도전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진정으로 무언가를 추구하는 사람에겐 바로 지금이 인생에서 가장 젊은 때입니다"라고 말한 화가 모지스 할머니를 기억했다.

코튼우드 패스 트헤일헤드 캠프그라운드에서 크랩트리 메도까지(약 34.8km)
퍼밋 받기가 조금 수월한 휘트니포털 남쪽의 코튼우드호수Cottonwood Lakes에서 시작해 세쿼이아Sequoia국립공원을 지나는 PCT 구간을 걸어서 휘트니산을 다녀오기로 했다. 퍼밋 받기는 수월하지만 휘트니포털에서 바로 휘트니산을 오르는 것보다는 하루 반 정도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
LA에서 산행시작 지점인 코튼우드 패스 트레일헤드 캠프그라운드Cottonwood Pass Trailhead Campground까지 이동거리는 약 350km. 자동차로 4시간가량 소요된다. 도심구간을 벗어나니 서부 특유의 황량함이 드러나며 가슴이 뻥 뚫리는 경치가 이어진다. 덕분에 JMT에 대한 부담감도 살짝 숨을 죽인다. 오웬스호수Owens Lake를 지나고 차가 산으로 올라가면서 고도를 높이기 시작한다.
인요국유림Inyo National Forest으로 들어섰고 코튼우드 패스 트레일헤드 캠핑장에 도착했다. 이곳 해발고도가 무려 3,030m. 캠핑장에는 곰통이나 음식을 넣어놓을 수 있는 곰박스가 있다. 아직까지 곰이 사람을 공격했다는 자료는 확인되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다. 곰박스가 없는 곳에서는 가능하면 곰통은 텐트와 좀 먼 곳에 두어야 한다. 식량뿐 아니라 화장품, 치약 등 냄새나는 것들은 안전을 위해서 곰통에 넣는 것이 좋다.

자동차로 고도 3,000m가 넘는 코튼우드 패스 트레일헤드 캠프그라운드까지 편하게 이동한 것은 좋았지만 고소적응 할 시간이 충분치 않았는지 자고 일어나니 영 컨디션이 안 좋다.
어둠 속에서 트레킹을 시작했지만 오래지 않아 어둠은 물러가고 세상이 밝아졌다. 첫날부터 긴 거리를 걸어야 하는 부담감보다는 앞으로 어떤 길이 펼쳐질지 궁금증과 기대감으로 흥분이 앞선다. 코튼우드 패스(3,392m)까지는 계속 오르막이다. 배낭의 무게가 온몸으로 느껴진다.
코튼우드 패스를 지나면서부터는 내리막. 속도가 조금 붙는다. 치킨스프링레이크를 지나니 초원지대가 펼쳐진다. 마치 분지처럼 펼쳐진 초원지대가 신비스럽다. 예상치 않았던 빙하도 만났다. 해발 3,000m가 넘으니 한여름인데도 눈이 상당하다. 지난겨울에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고 하더니 이제야 실감이 든다. 다행히 빙하구간은 태양열 덕분에 살짝 녹아 있어서 아이젠 없이 스틱에 의존해서 건넌다. 크랩트리 메도Crabtree Meadow에 도착할 무렵 멀쩡한 하늘이 회색빛으로 변하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우박이 쏟아진다. 산 정상에는 눈이 점점 많아진다. 걱정이 조금씩 쌓여간다.
야영지 락크릭 도착! 박배낭을 메고 고산적응을 한 첫날은 생각보다 순조롭게 끝났다. 이젠 새벽까지 쉴 수 있으니 너무나 감사하다.

락크릭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나니 엄청나게 불어난 계곡물이 시작부터 우리의 발목을 잡는다. 기존에 건너던 징검다리 길은 모두 물속에 잠겼다. 쓰러진 나무를 타고 건너가야 하는데 그 나무가 계곡 건너편까지 이어지지 않거나 다리로 대신할 만큼 안전하지는 않았다. 박배낭을 메고 미끄러운 통나무를 건너야 하는 건 참으로 부담스럽다. 만에 하나 계곡물에 빠진다면? 물에만 젖으면 다행인데 부상이라도 입으면 팀에 엄청난 피해를 주게 된다.
함께한 산우들이 계곡 양쪽 나무를 이용해 로프를 맸다. 혹시 모를 만일의 경우에 대비한 로프가 이렇게 사용되다니? 산행은 언제나 모든 상황에 대비해야 함을 몸으로 느끼는 순간이다.
기욧패스Guyot Pass를 지나니 러셀산, 휘트니산, 뮤어산 등 하얀 고깔모자를 쓴 고산들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올라갈 부담감보다는 휘트니에 올라서면 360도로 펼쳐질 산군들의 모습에 가슴이 쿵쾅거린다.
크랩트리 메도. 초록의 습지가 참으로 아름답다. 그 앞으로 흐르는 계곡물을 건넌다. 그리 깊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발이 시리다. 모기는 기다렸다는 듯이 맹공격을 해온다. 휘트니 산행 내내 모기는 우리들을 무척이나 괴롭혔다.

오늘 일정은 기타레이크Guitar Lake까지 갈 예정이었지만 오전에 계곡을 건너느라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해 크랩트리 메도 캠프그라운드에서 자고 내일 휘트니산까지 왕복하기로 했다. 내일 산행거리가 좀더 길어졌다는 부담감보다는 오늘 일찍 쉴 수 있어서 마음이 조금은 편하다.
산행이 일찍 끝나니 계곡물에 발도 담그고 망중한을 즐기고 난 후 저녁식사는 완전 꿀맛이다. 하루 세 끼 중에서 그나마 식사다운 식사를 하는 시간이다. 라면에 밥과 햄, 북어까지 넣어서 끓인 저녁식사이다. 종일 걸었으니 무엇인들 맛이 없으랴.
내일은 새벽 1시부터 산행을 시작한다. 긴장과 기대가 교차된다.

크랩트리 메도에서 휘트니산 왕복(약 29km)
새벽 1시 기상. 헤드랜턴에 의존해 어둠 속을 걷는다. 얼마 걷지 않았는데 하늘의 별이 너무나 총총하다. 맞은편에는 은하수가 맨눈으로 선명하게 보인다.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다. 은하수를 처음 보았다는 분도 있으니 참으로 역사적인 순간이다. 전혀 예상치 않았던 자연의 선물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지. 한 사람씩 은하수 사진을 찍었다. 아마도 이때 은하수 사진을 찍지 않았다면 휘트니 정상에서 일출을 보았을지 모르지만….
빙하가 녹으며 만든 계곡물은 그리 어렵지 않게 잘 통과했는데 기타레이크 주변의 빙하가 길을 막는다. 피해서 갈 길이 없으니 그대로 눈을 가로지른다. 다행히 눈길은 많이 미끄럽지 않았지만 어둠 속에서 빙하구간을 걷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어제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기타레이크까지 왔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아이젠을 일행 모두 가져온 것이 아니라서 아이젠을 신은 사람이 선두에 서서 길을 만들어 주었다. 앞서 간 사람의 발자국만 밟고 걸으니 후미는 조금 편하게 빙하구간을 건널 수 있었다. 정상으로 향할수록 빙하구간이 점점 더 많아진다. 특히 경사면의 빙하구간은 너무나 무섭다. 뒤에서 올라오던 외국인이 우리를 추월해서 사뿐하게 빙하구간을 통과하는 모습을 보니 무척 부럽다.
올라가는 등로 맞은편 바위산 위로 은하수가 다시 보였다. 어찌나 반가운지. 힘들다고 하면서도 다시 은하수 사진을 찍고 부지런히 선두를 좇는다. 빙하구간이 끝나는가 싶었는데 이젠 스위치백길이다. 워낙 경사도가 심하니 등로를 지그재그로 만들어놓았는데 이를 스위치백이라고 부른다. 스위치백을 오르며 저 멀리 뾰족하게 솟아오른 바위산이 휘트니산 정상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 산은 바로 휘트니산 옆에 있는 러셀산Mount Russel이었다. 산 높이는 휘트니보다 조금 낮은 4,296m.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스위치백을 걷는 것은 생각보다 너무 힘들다. 게다가 해발고도가 4,000m 가까이 되니 쉼쉬기도 수월하지 않다. 그나마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시에라네바다산맥 주변이 푸른빛으로 밝아지니 위로를 받는다.

눈이 쌓인 기타레이크도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장엄하게 내 앞에 우뚝 선 마운트히치콕Mount Hitchcock 주변이 붉은 여명의 빛으로 물드는가 싶더니 바위산은 어느새 화려한 황금빛 옷으로 갈아입었다. 장엄하고 화려한 산군들의 모습을 보고 어떻게 반하지 않을 수 있을까?
드디어 트레일크레스트정션Trail Crest Junction. 이곳은 휘트니포털과 기타레이크 길이 만나는 삼거리이다. 이곳까지 박배낭을 메고 온 사람들은 배낭을 놓고 휘트니 정상으로 향한다. 정상이 코앞인 줄 알았는데 정상은 보이지 전혀 보이지 않고 쉼 없이 올라가기만 한다. 무서우리만치 뾰족한 뮤어산Mount Muir을 스치니 휘트니산 정상으로 오르는 킬러니들Keeler Needle 구간이다. 얼마나 뾰족한 바위들이 즐비하면 이름도 킬러니들이라고 붙였을까? 너무나 눈이 부셔서 사진도 제대로 찍지 못했지만 바로 그 킬러니들 사이로 일출을 아주 잠깐 마주했다.
세상이 모두 밝아지니 휘트니산 건너편의 풍광이 제대로 시야에 들어온다. 아직은 눈이 많이 보이는 강물 저편에는 숲이 있다. 그 곳은 컨캐니언Kern Canyon이다.
드디어 마운트휘트니Mount Whitney 정상에 도착. 제일 먼저 대피소 앞으로 갔다. 대피소의 정식 명칭은 스미소니언 인스티튜션 쉘터Smithsonian Institution Shelter지만 일반적으로 휘트니 정상 대피소Mount Whitney Summit Shelter로 부른다. 1909년에 스미소니언재단이 만든 대피소로 추위나 더위를 피하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대피소 앞에는 방명록이 있다. 산 정상에 방명록이라니? 휘트니산에 올라온 모든 사람들은 존경받을 자격이 있음이다. 나도 당당하게 방명록에 이름을 썼다.
죽을 만큼은 아니어도 너무나 힘들었던 과정은 어느새 잊어버리고 휘트니 정상에서 펼쳐지는 광활한 대자연에 취해서 미친 듯이 정상을 한 바퀴 돌았다. 그때 눈에 뜨인 호수. 눈이 시릴 만큼 맑고 밝은 코발트빛의 빙하호수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바로 아이스버그 레이크Iceberg Lake. 암벽등반가들은 아이스버그레이크부터 휘트니 정상까지 암벽등반을 한다고 한다. 그냥 바라보기조차도 무서운 코스인데.
정상에 정상석은 없지만 'Mt Whitney 14,505'라고 쓰인 동판과 나무판이 있다. 정상에 오른 사람 누구나 이 표지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정상 등정의 기쁨을 온 몸으로 만끽한다.

이제 하산이다. 이젠 고소도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참으로 홀가분하다. 올라온 길만큼이나 내려가는 길도 멀고 험하지만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았던 길은 또 어떤 모습일지도 궁금증이 솟는다. 끝없이 괴롭혔던 스위치백 구간을 통과하면서 가져 온 식수는 거의 바닥이 났다. 빨리 하산해서 빙하 물을 마셔야겠다는 생각에 발길이 더욱 빨라진다. 경사면 빙하구간도 생각보다 쉽게 통과했다.
빙하물이 흐르는 계곡에서 물을 받아 마시고 잠시 꿀맛 같은 휴식을 취하며 밤새 내 두 발로 걸었던 휘트니산으로 오르는 등로를 천천히 바라본다. 휘트니산 정상에서 360도로 펼쳐진 주변 산군들의 모습이 파노라마 영상으로 무한반복재생이 된다. 꿈속 같다.
분명 올라왔던 길인데 크랩트리 메도 캠핑장으로 돌아가는 길은 너무나 낯설다. 캠핑장에 도착하니 밤새 팽팽하게 나를 버텨주었던 긴장감이 일순간에 무너진다. 기분 좋은 피로감이 몰려든다.
'휘트니 할머니'로 불리는 훌다 크룩스Hulda Crooks는 65세에서 91세까지 휘트니산을 23번 올랐고 5년에 걸쳐서 존뮤어트레일을 완주했다. 휘트니 할머니에게 너무 높은 산은 없었다. 그녀는 정신적, 육체적, 영적 건강은 나이에 상관없이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 주었다. 도전에 성공하는 비결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게 아닐까?
월간산 9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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