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 할매들 오만 일 다 했던 거친 손으로 시를 그리다
산청 신안면 원산마을 할매들이 난생처음으로 색연필을 잡았다. 산청 청년 모임 '있다'와 권영란 작가(지역 쓰담 대표· <남강 오백리 물길여행>, <시장으로 여행가자> 저자)와 함께 진행한 '산청 할매 시인 학교'에서다. 있다는 7년째 이어지고 있는 산청 귀촌 청년 모임이다. 20명 정도가 속한 이 모임은 문화 예술로 함께 놀고 연대한다.
산청 할매 시인 학교는 있다가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한 공모 사업 '예술로 어울림'에 선정되며 시작했다. 지난달 16일 시작한 수업은 신안면 원산 마을회관과 나임아파트 경로당에서 각각 6~7회 씩 총 13회가 진행됐다. 20일 원산 마을회관에서 열린 마지막 수업에 다녀왔다.
◇시를 그리다 = 오후 1시 마을회관에서 점심으로 멸치국수를 끓여 먹은 할매들이 접이식 밥상 앞에 앉았다. 방금까진 밥상으로 썼지만, 이제부턴 책상이다. 이날은 날씨가 흐려서 더위가 조금 가셨다. 그래서 밭일 나가느라 오지 못한 학생이 몇 있었다. 보통 출석 표에 적힌 12명 중 10명은 참석하는데, 마지막 수업인데도 겨우 이묘혜(83), 문석남(82), 백수야(77), 김금순(78), 권성순(82), 이경애(75) 할매 등 6명만 참석했다.
이날 수업 주제는 논이었다. 권 작가는 할매들에게 논에 대한 기억을 물었다. 젊은 시절 모내기를 어떻게 했는지, 밭농사랑 논농사 중에 뭐가 더 쉬운지, 논 몇 마지기를 지었는지, 할매들 눈에 논은 어떨 때 가장 예뻐 보이는지 같은 질문이다. 그러자 할매들은 각자 할 말이 많아졌다.
이어 권 작가는 책 <모모모모모>를 꺼내 들었다. 모에서 쌀이 되기까지 과정을 유쾌하게 풀어낸 동화책이다. 할매들은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집중했다. 권 작가가 또, 아이들 시를 묶어낸 책 <엄마의 런닝구> 중 농사와 관련된 시를 낭송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할매들은 창밖에 바로 펼쳐진 논을 바라보거나, 고개를 끄덕이며 시를 감상했다.
이제 할매들이 직접 시를 쓸 차례다. 할매 12명 가운데 서툴게라도 글을 쓸 줄 아는 할매는 단 2명뿐이다. 그래서 할매들은 시를 쓴다기보단, 그린다. 할매들의 시가 완성되는 과정은 이렇다. 권 작가가 할매와 대화 중에서 한 부분을 발췌해서 종이에 쓴다. 할매들은 그 글자 모양을 따라 그린다. 글과 함께 주제와 관련된 그림을 그려 넣는다.
"우리 모는/주인 닮아/키가 크다"(문석남 할매)
"모가 갓 나는 기다/아직 어린 기라"(김금순 할매)
◇할매들의 첫 경험 = 색연필을 잡은 문석남 할매가 가장 먼저 새하얀 스케치북 모퉁이에 색연필을 비볐다. 그림을 그리기 전 미리 해보는 선 긋기 연습이다. 7회차 수업이었지만, 아직 색연필을 잡고 쓰는 게 긴장되는 듯했다. 문 할매 스케치북을 넘겨보니 거의 모든 장 모퉁이에 작게 색연필을 비빈 흔적이 남아 있다.
권 작가가 수업에서 '할매들의 첫 경험'을 강조하는 이유다. 할매들은 자식과 손주들이 색연필을 잡는 걸 본 적이 있어도, 직접 잡아보진 못했다. 또, 평생 일을 하다 보니 손이 붓고 어그러졌다. 처음 수업을 시작할 때 할매들은 색연필을 잘 쥐지도 못했다고 한다. 마지막 수업 때는 색연필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 손이 육 남매 만든 손이다/남 앞에 못 내놓는다."(문석남 할매)
"별거 있나예/오만 거 다한/만물 손이라예"(백수야 할매)
자기 손을 두고 할매들이 쓴 시다.
권 작가는 이렇게 수업을 통해 "우리가 일상적으로 해온 것들을 한 번도 못해본 어머니들이 처음으로 경험할 수 있길 바랐다"고 했다. 실제 수업에서도 시를 쓰는 것뿐만 아니라, 할매들과 함께 카페나 도서관 등을 방문하기도 했다.
할매들에게 산청 할매 시인 학교는 단순히 무언가를 공부하는 과정이 아니었다. 스스로 새로운 걸 시도하고, 해낼 수 있다는 걸 깨닫는 시간이었다.
마지막 수업을 마친 할매들은 아쉬운 듯 입을 모아 말했다.
"스케치북이 한참 남았는데, 인자 안 온다 카네."
/백솔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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