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자배구의 고질적 약점으로 꼽혀온 아포짓 공백이, 1999년생 왼손잡이 한 명으로 인해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나현수(수원 현대건설)가 2026 아시아배구연맹(AVC)컵에서 7경기 79점을 기록하며 대회 베스트 아포짓 스파이커에 선정됐다. 구단 공식 포지션은 미들블로커지만 대표팀에서는 아포짓으로 분류돼 뛴 독특한 이력의 선수가, 국제 무대에서 경쟁력 있는 공격 옵션임을 스스로 입증해 낸 것이다.

한국은 필리핀 캔돈시티 아레나에서 치러진 이번 대회에서 조별리그 5전 전승, 준결승·결승 2연승을 합쳐 7전 전승이라는 완벽한 성적표를 들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단순히 우승에 그친 것이 아니라 국제배구연맹(FIVB) 세계랭킹도 40위에서 31위로 9계단이나 끌어올렸다. 이 과정에서 나현수가 공격 균형추 역할을 맡았다는 점이 이번 우승의 핵심 포인트다.
한국 여자배구는 김연경·양효진이 이끌던 황금 세대 이후 세대 교체의 긴 터널을 지나고 있다. 특히 아포짓 포지션은 수년간 뚜렷한 주전급 자원이 없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아웃사이드 히터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다는 지적은 시즌마다 반복됐고, 강력한 역대각 공격으로 상대 블로킹을 흔들 수 있는 왼손 아포짓의 필요성은 꾸준히 제기돼 왔다.
나현수는 2018-2019시즌 신인드래프트 2라운드 1순위로 KGC인삼공사에 입단했다. 프로 초반에는 미들블로커 백업 자원으로 분류됐고, 큰 주목을 받지 못한 채 경력을 쌓았다. 2022년 현대건설로 트레이드된 이후에도 구단 공식 포지션은 미들블로커로 유지됐다. 그러나 2025-2026시즌, 팀 사정상 아포짓 자리에 더블 스위치로 투입되는 장면이 늘면서 가능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 시즌 나현수의 V리그 정규리그 기록은 36경기 116세트 출전, 140득점으로 프로 데뷔 이후 개인 한 시즌 최다였다. 직전 시즌인 2024-2025시즌의 86득점과 비교하면 무려 54점이 늘었다.

이 흐름이 대표팀 발탁으로 이어졌다. 2026년 4월 대한배구협회가 발표한 여자배구 국가대표 18인 명단에 나현수는 아포짓 스파이커로 이름을 올렸다. 구단 등록 포지션과 대표팀 포지션이 다른, 보기 드문 사례였다. 대표팀 내에서는 세터 김다인(현대건설)과의 호흡이 빠르게 자리 잡았고, 이는 같은 팀에서 오랜 기간 함께해 온 데 따른 자연스러운 시너지였다.
나현수의 이번 AVC컵 성적을 수치로 먼저 확인하면 다음과 같다. 7경기 전 경기 출전, 총 79득점, 경기당 평균 11.29점. 세부 내역은 공격 62점, 블로킹 10점, 서브 7점이며 공격 효율은 38.99%다. 대회 최저 득점이 첫 경기 키르기스스탄전의 7점이었고, 나머지 6경기에서는 모두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했다.
조별리그 대만전은 이번 대회에서 한국이 가장 힘든 경기를 치른 순간이었다. 풀세트(3-2)까지 간 유일한 경기였고, 나현수는 그 경기에서도 12점을 올렸다. 이후 준결승 베트남전에서 개인 대회 최다인 14점(공격 11, 블로킹 2, 서브 1)을 기록하며 결승행을 이끌었고, 결승 대만전에서도 12점을 보태 3-0 승에 기여했다.

팀 전체로 보면, 강소휘가 블로킹 10개·서브 4개 포함 100점으로 대회 전체 득점 2위에 오르며 MVP와 베스트 아웃사이드 히터를 수상했다. 나현수는 강소휘에 이어 팀 내 두 번째로 많은 득점을 올린 선수로, 대회 개인 득점 순위 7위를 기록했다. 박은진은 베스트 미들블로커로 선정되며 현대건설 출신 선수들이 베스트7 명단을 휩쓸었다. 이번 대표팀에는 현대건설 소속 선수만 총 4명(김다인·나현수·이예림·이영주)이 포함됐으며, 이예림은 준결승 베트남전에서 19점을 올리는 등 대회 전체 63점을 기록했다.
GS칼텍스 소속 2007년생 김효임도 이번 우승 멤버에 이름을 올렸다. 주로 '서베로(서브 특화 리베로)' 역할로 교체 투입돼 서브 득점 4점을 기록했다. 팀 전체가 단 한 경기도 내주지 않은 7전 전승 우승이었다는 점에서, 교체 자원의 역할 분담도 이번 우승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이번 대회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숫자는 79점이 아니라, 7경기 연속 두 자릿수에 근접한 득점 일관성이다. 국제대회에서 신진 자원이 가장 흔들리는 지점은 특정 경기의 폭발적인 활약이 아니라, 토너먼트 전체를 통틀어 꾸준한 기여를 유지하는 것이다. 나현수는 조별리그 쉬운 경기부터 풀세트 접전, 준결승, 결승까지 득점이 일정하게 나왔다는 점에서 단기 반짝이 아님을 수치로 보여줬다.

현대건설 강성형 감독은 대회 기간 중 나현수에 대해 "잘할 때는 잘하지만 경험이 부족한 건 사실"이라고 했다. 이 발언은 단순한 걱정이 아니라 이 선수의 과제를 가장 정확하게 짚은 말이기도 하다. 실제로 나현수는 이번 대회 이전까지 대표팀 주전 아포짓으로 풀 토너먼트를 완주한 경험이 없었다. 이번 AVC컵은 그 공백을 실전으로 채운 첫 번째 대회라는 점에서 결과 자체보다 과정이 더 중요하게 읽힌다.
다만 이번 대회의 맥락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변수가 있다. 일본·중국·태국은 같은 시기 발리볼 네이션스리그(VNL) 출전으로 이번 AVC컵에 참가하지 않았다. 아시아 최강 라인업이 모두 빠진 대회에서의 7전 전승 우승과 베스트 아포짓 수상은 유보적 시각으로 볼 필요가 있다. 랭킹이 31위로 올라선 것 역시 고무적이지만, 이 순위가 의미를 갖는 건 아시아선수권이나 아시안게임처럼 일본·중국·태국이 모두 나오는 무대에서 유사한 경기력을 유지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그럼에도 이번 대회가 의미 있는 이유는 따로 있다. 한국 여자배구는 오랫동안 아포짓을 '없는 포지션'처럼 운영해 왔다. 나현수의 등장은 그 포지션에 실전 가능한 선수가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국제 무대에서 확인한 사례다. 구단에서 미들블로커로 등록된 왼손잡이가 대표팀에서 아포짓으로 7경기를 완주하고 베스트7에 이름을 올린 이 흐름은, 이제 대표팀 설계 방식 자체를 조금씩 바꿀 수 있는 근거가 됐다.
한국은 7전 전승으로 AVC컵 정상에 올랐고, 나현수는 그 과정에서 아포짓 공백이라는 오래된 과제에 숫자로 답했다. 랭킹은 40위에서 31위로 올랐지만, 진짜 검증은 일본·중국·태국과 맞붙는 다음 국제대회에서 이뤄진다. 이 경험이 나현수를 대표팀 확정 자원으로 올려놓을지, 아니면 새로운 경쟁의 출발선이 될지—다음 소집 명단이 나왔을 때 어떤 이름이 아포짓 자리에 있을지 지켜볼 이유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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