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외사 성철 스님 동상 말이 없다 진리를 설명할 수 없듯

남강은 이제 내처 달려 겁외사(劫外寺)로 향한다. 겁외사는 격동의 1980년대에 13년간 조계종 종정을 지내고 1993년 향년 81세(법랍 58세)로 입적한 성철 스님의 생가터에 세워진 절이다. 뭐든지 숫자로 표시하기 좋아하는 인도인들 계산으로 1겁은 43억 년의 시간이다. 그래서 불가에서 '겁외'란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 진리와 함께 머문다'라는 뜻이다. 겁외사 맞은편에는 '성철스님기념관'이 있다. 기념관의 가장 큰 건물은 스님의 호를 딴 퇴옹전(退翁殿)이다. 전(殿)은 최고 권위의 건물에만 사용되는 명칭이다.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의 근정전(勤政殿), 절집에서 가장 중요한 대웅전(大雄殿) 등의 용례를 보면 알 수 있다. 제자들의 욕심도 있었겠지만, 성철 스님이 한국 불교 중흥에 큰 역할을 한 것에 대한 인정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산청 성철스님 생가터에 세워진 겁외사 대웅전. /김석환

성리학자들의 나라인 조선 시대 내내 불교는 탄압의 대상이었다. 갑오개혁이 있던 1895년(고종 32)이 되어서야 비로소 승려들의 한양 출입이 허용될 정도였다. 1884년 건립된 양산 통도사 부도밭의 '덕암당혜경지역혁파유공비(德巖堂蕙璟紙役革罷有功碑)'는 그 생생한 사례이다. 종이를 만들어 납품하라는 가혹한 요구에 시달리던 통도사는 훗날 영의정이 되는 권돈인의 고향 친구인 혜경을 한양으로 올려 보낸다. 혜경은 6개월 동안 머리를 기르고 물장수로 위장해 권돈인을 만나 지역 면제 요청을 한다. 이 요청이 받아들여져 통도사는 폐사의 위기를 면했다. 이 일은 1838년(헌종 4)경으로 알려져 있는데 통도사에는 권돈인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도 있다.

일제도 불교를 탄압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의병 근거지'라는 이유로 경기 화성의 용주사, 전남 나주의 신륵사 등 많은 절집에 불을 질러 폐사로 만들었다.

한일 강제병합 다음 해인 1911년 일제는 사찰령(寺刹令)을 제정해, 남북한 31곳의 본사 주지는 총독부 승인을, 산하 1384곳의 사찰 주지는 도지사 승인을 받도록 했다. 일본의 패망 이후 진주한 미 군정은 "일본 불교의 재산은 조선불교에, 일본 기독교의 재산은 조선 기독교로 이속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는 말뿐이었다.

한국의 대표적 교회인 영락교회와 경동교회는 미 군정기에 서울의 일본 천리교 대형 교회를 불하받아 그 부지 위에 건립되었다. 가톨릭도 일본이 남기고 간 적산(敵産)을 불하받아 경향신문사와 대건인쇄소를 설립할 수 있었다.

미 군정은 영어가 가능하고 반공정신에 투철한 개신교 인사들의 말에만 귀를 기울였다. 그들 대부분은 친일파였다.

미 군정에 의한 적산 불하는 해방 당시 한국 종교의 경쟁력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좋은 조건의 적산을 많이 차지한 종교는 탄탄한 인프라를 기반으로 급속하게 신도를 늘려나갔다. 그 덕분에 해방 당시 남한의 기독교 신자는 대략 10만 명, 그 무렵 인구의 0.5% 정도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20%로 늘었다. 2024년 현재 대한민국에서 개신교의 현실적 영향력은 그 비율보다 훨씬 더 크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1948년 들어선 신생 대한민국 정부도 불교에 우호적이지는 않았다. 김진흠의 논문 <1950년대 이승만 대통령의 '불교 정화' 유시와 불교계의 정치 개입>에 따르면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부터 55년에 걸쳐 7차례의 불교 관련 유시를 발표한다. 민주주의 국가는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기반으로 하고, 신생 대한민국의 헌법에도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었음에도 이승만은 노골적으로 그랬다.

'불교 정화 유시'의 요지는 "가정 가지고 사는 중(帶妻僧)들은 다 친일자이니 절에서 나가라"는 것이었다. 당시 1000여 개의 사찰 중 900개소를 7000여 명의 대처승이 점유하고 있었고 비구승은 500여 명이었다. 이승만의 유시는 이를 뒤집으라는 것이었다.

성철 스님 생가인 율은 고가. /김석환

강준만은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 편 2 >에서 이승만의 유시가 "대처측 정치 인사 다수가 반이승만 진영으로 돌아섰고, 사사오입 개헌 파동으로 야기된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국면 전환"일 가능성을 기술하고 있다.

이승만은 1954년의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대통령의 연임제한 규제를 풀고 종신 집권으로 가는 문을 열었다. 이승만이 권력 유지에 방해가 되자 만주를 근거로 독립운동을 벌였던 이시영, 이범석 등 대종교 계열도 탄압했던 것을 보면, 이 같은 분석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이승만이 꿈꾸는 나라는 하느님의 축복 속에 자산이 왕처럼 군림하는 기독교 국가였다.

불교계의 수난은 그 뒤로도 끝나지 않았다.

1980년 5.18 광주민주항쟁 이후 계엄사령부는 10월 27일 새벽, 무장한 계엄군을 전국 사찰에 투입했다. 이들은 스님들의 재산 축적과 축첩에 관한 비리를 조사한다며 처음에는 155명의 승려를, 추가로 승려 및 관련 인사 1776명을 잡아갔다. 전두환 정권 지지를 거부했던 조계종 총무원장 월주(月珠)는 서빙고 지하실에서 27일간 감금·폭행을 당하고 총무원장직을 사퇴했다. 성철은 다행히 체포를 면했다.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에 따르면 권총 찬 군인들이 백련암까지 올라와 "여기 성철이가 누구야? 같이 가야겠으니 빨리 나오라고 해"라며 압박했지만, 성철은 그때 산책 중이었다고 한다.

끌려간 승려들은 죄수복을 입은 채 폭행과 고문에 시달렸다. 일부는 삼청교육대로 갔고, 일부는 교도소에 수용돼 순화 교육을 받았다. 이후 신군부의 강요로 조계종 측에서는 '정화 중흥회의'를 열고, 13명의 승려에 대해 승려 자격을 박탈했다. 그 와중에 신군부에 빌붙어 종단 권력을 차지한 승려도 있었다. 도올 김용욱은 <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에서 걸핏하면 시국선언을 발표했던 가톨릭이나 개신교가 아니라, 체제 순응적이고 권력에 고분고분했던 불교만 이렇게 당한 이유를 '빽이 없고, 만만해서'라고 기술했다. 불교를 탄압한다고 해서 로마 교황청이나 국제적인 개신교 종단들이 항의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성철(性徹)이 조계종 종정이 된 것은 '10.27 법란(法亂)' 두 달 뒤인 1981년 1월이었다. 취임 수락 법어는 암울한 시대의 화제가 되고 불교 신도들의 자부심이 되었다.

산청군 단성면 겁외사에 있는 성철 스님 동상. /김석환

"보이는 만물은 관음(觀音)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妙音)이라.

이 외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시회대중(示會大衆)은 알겠느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산은 산이요, 물은 이로다"를 처음 화두로 언급한 이는 9세기 당나라 황벽((黃檗) 선사이다. 근데 무슨 뜻일까?

황벽선사의 200여 년 뒤 12세기 송나라 청원(靑原) 선사는 또 이렇게 말한다.

"내가 30년 전 참선하기 전에는 산은 산이고 물은 물로 보았다. 그 후 어진 스님(善知識)을 만나 선법을 깨치고 나니,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닌 것으로 보았다. 지금 편안한 휴식처를 얻고 나니 마찬가지로 산은 다만 산이고 물은 다만 물로 보인다. 그대들은 이 세 가지 견해가 서로 같은 것이냐? 각기 다른 것이냐? 만약 이를 명확히 설명할 수 있다면 이 노승은 그에게 엎드려 절을 하겠노라"

생각을 비워내는 그대로 본성을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뜻일까?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는 쉬운 듯하면서 어려웠다. 해석은 각자의 몫이었다. 누구는 진리의 밝은 눈으로 사물의 핵심을 본다는 의미라고 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상식이 상식으로 통용되는 세상이 반드시 올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이기도 했다.

성철은 철저하게 은둔하며 구도자의 삶을 살았다. 음식은 소금기가 없는 무염식으로 최소한만 섭취했고, 옷도 누덕누덕 기워서 입었다. 그가 종정으로 있던 1980년대는 조계종단에서도, 절집 내부에서도 조폭까지 동원하는 폭력 사태가 빈번하게 발생하던 시절이었다. 1986년 해인사에서는 '10.27법란'을 계기로 독재 권력과 유착해, 종단 고위직을 독차지했던 사판승을 내쫓기 위한 전국 승려대회가 열렸다. 이명박 정부 당시 강남 봉은사에서 내쫓긴 명진(明盡)도, 최근 '소신공양'이냐 '분신자살'이냐 논란을 빚은 조계종 최고 실력자 자승(慈乘)도 불교계 개혁을 주장하며 해인사 전국 승려대회에 있었다. 그때 해인총림과 한국 불교의 최고 어른으로 해인사 사내 암자인 백련암에 머물던 성철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산청군 단성면에 있는 성철스님기념관. /김석환

1987년 민주항쟁으로 사회가 들끓던 시기, 그의 법어는 "사탄이여! 어서 오십시오. 나는 당신을 존경하며 예배합니다. 당신은 본래 부처님입니다. 사탄과 부처란 허망한 거짓 이름일 뿐! 본 모습은 추호도 다름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당신을 미워하고 싫어하지만 그것은 당신을 모르기 때문입니다"였다. 많은 이들이 사탄에서 전두환 대통령을 연상했지만, 또 다른 많은 이들은 절집 특유의 반어법으로 이해했다. 그의 발언은 늘 한결같았기 때문이었다. 비구-대처 분쟁 때에도 "정화란 안으로 정진력(精進力)을 키워 내실을 기하면서 이루어져야지, 자기편을 늘려 사찰을 뺏는 싸움이 되면 '묵은 도둑 몰아내고 새 도둑 만드는 꼴'이 아닌가"라고 할 정도였다.

대통령이 찾아와도 만나지 않을 정도로 권력과 거리를 두었다. 성철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옳은 편도 들지 마라. 아무 편도 안 드는 게 한쪽 편을 드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그는 출가자로서의 본분을 지키고 의연하게 수행자의 참모습을 보이는 것이 추락한 불교계의 위상 회복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던 것일까? 그는 꽃을 들어 이심전심으로 뜻을 전하는 '염화시중(拈花示衆)'의 미소처럼 '은둔적 참여'를 했던 것일까?

겁외사의 성철 스님 동상은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이 없다. 정녕 진리나 깨달음이란 문자나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영역일까?

/김석환 부산대 석좌교수·전 한국인터넷진흥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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