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총선 참패 이시바, 위안부-징용 등 전향적 결단 어려워져”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일본 총리가 이끄는 집권 자민당이 27일 중의원(하원) 선거(총선)에서 참패하면서 한일 관계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당장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전 총리 때부터 이어져온 한일 관계 개선세가 꺾이진 않겠지만 과거사 문제 등과 관련해 일본 정부가 ‘적극적이며, 성의 있는 호응’을 보이기 어려워졌다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다.
이시바 총리는 일본 보수 정치인 중 상대적으로 전향적인 역사 인식을 가졌다고 평가되지만, 총선 참패로 구심력이 크게 약화돼 자신의 소신을 펴기 어려운 환경이 됐다.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이 20%대에 머물며 국정 운영 동력이 떨어진 상황에서 이시바 총리까지 자국 내 입지가 약해지면서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을 계기로 기대됐던 일본의 역사 인식 개선, 양국의 협력 비전 제시 등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 “의지는 있지만 능력이 없는 상황”
이시바 총리는 취임 전 저서에서 “한일 관계는 윤석열 대통령의 리더십으로 극적으로 개선됐다”며 “윤 대통령이 한국에서 조금이라도 유리한 입장에 설 수 있도록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선거에서 크게 패배하며 이시바 총리의 입지가 좁아진 상황에서 한국을 위해 전향적 역사 인식을 내놓기는 어렵다. 당내 인사들과 일본 국민의 반발을 무릅쓰고 자신의 소신을 펼칠 수 있는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신각수 전 주일 대사는 “의지는 있지만 능력은 없는 상황이 됐다”며 “이시바 총리가 과거사에 대해선 자민당 내 비주류로서 솔직한 입장을 보여왔기 때문에 우리로서도 기대를 했는데 이제는 (전향적 조치의) 실현이 어려워지는 것”이라고 했다.
외교 소식통은 “전임 기시다 내각과는 달리 과반이 되지 않기 때문에 야당 말도, 자민당 내 반대파 의견도 수렴해야 하는 제약이 늘어났다”며 “이시바 총리만의 독자적인 정책을 추진해나갈 동력은 떨어진 것”이라고 했다.
이시바 총리는 28일 기자회견에서 “다음주 미국 대선이 있지만 누가 이기더라도 현재의 양호한 미일 관계를 유지하고, 주변국과의 대화도 계속 해나가겠다”며 현재의 외교 정책 기조를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 “대담한 결단 추진 어려울 듯”
일본 전문가들 역시 당분간 일본 정부가 한일 관계에서 성의 있는 모습을 보이거나, 대담한 결단을 내리기는 어려운 환경이 됐다고 평가했다.
오쿠조노 히데키(奥薗秀樹) 시즈오카현립대 교수(정치학)는 “한일 관계 개선은 일본 정치권에서 여야를 막론하고 필요성에 공감하기 때문에 크게 바뀌지 않을 것”이라면서도 “이시바 총리만의 색깔을 내며 새로운 단계로 한일 관계를 발전시킬 만한 여유는 상실한 상태”라고 지적했다.
내년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을 맞아 일본이 위안부와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사죄 담화를 내거나 일본 기업의 배상 참여를 유도하는 등 ‘통큰 결단’을 기대하는 건 구조적으로 어려워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또 여당 과반 붕괴로 정국 운영이 어려워진 만큼, 외교보다는 연립 정권 확대, 정당간 합종연횡 등 국내 사안에 집중할 수밖에 없을 것이란 관측도 많다.
기미야 다다시(木宮正史) 도쿄대 교수(정치학)는 “이시바 총리가 어떤 형태로든 지도력을 발휘해 현상을 바꾸는 대담한 대처를 하는 건 어렵게 됐다”며 “한국이 일본 측에 대담한 결단을 원해도 일본이 응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시바 총리가 취임 전부터 주장해온 ‘아시아판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창설, 자위대 헌법 명기 등도 총선 참패로 추진 동력을 잃을 것으로 보인다. 자민당이 개헌이 가능한 3분의 2 의석은커녕 과반 확보도 실패했기 때문에 일본 내에서조차 논란이 큰 정책을 추진할 힘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원덕 국민대 교수(일본학)는 “이시바의 리더십이 많은 상처를 입은 만큼 방위 안보 정책에서 본인이 하고자 했던 것을 추진할 수 있는 동력도 떨어진 것”이라고 했다.
도쿄=이상훈 특파원 sanghun@donga.com
고도예 기자 ye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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